안마는 산업이다. 2008년 현재 한국의 안마 산업은 삼분돼 있다. 변종 성매매의 대명사인 안마시술소, 보건의료 목적의 안마원, 여가와 휴식 공간으로 떠오른 마사지숍 등이다. 최근 경찰의 단속, 헌법재판소의 결정, 관련 단체와 업주들의 반발 등으로 이들 안마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안마라는 산업’에 종속된 ‘안마하는 사람들’도 흔들리고 있다. 법률, 공권력, 시장 논리 등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건 매일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시각장애인, 여성 이주노동자, 성매매 여성 등은 한국 안마 산업의 최하층을 이루고 있다. 이 글은 그들의 이야기다. 서로를 탓하고 밀어내야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의 엇갈린 시선에 대한 이야기다.
사채에 쫓겨 ‘스스로’ 들어온 이들
두 사람 모두 안면이 있다. 오며 가며 아는 체할 정도는 됐다. 10월31일과 11월1일, 그들이 잇따라 자살했다는 뉴스를 봤다. 슬펐다기보다는 공감했다. 서울 장안동 안마시술소 종업원 이아무개(26)씨와 오아무개(36)씨의 심정을 김수빈(30·가명)씨도 모르지 않는다. 언제건 손님이 오면 맞아야 하는 안마시술소에서 숙면은 사치다. 잠이 부족하니 감정의 기복이 심해진다. 처지를 비관하기 십상이다.
우울함을 곱절로 키우는 건 돈이다. 지난 8월 이후 근처 ‘아가씨’들은 일손을 놓았다. 석 달째 수입이 없다. 지금 장안동에는 불 켜진 ‘안마’ 간판이 몇 개뿐이다. 경찰 단속 때문이다. 2004년엔 청량리였고 2008년엔 장안동이다. 그때는 집창촌이었고 이번엔 안마시술소다. 자살을 택하지 않은 대다수 장안동 성매매 여성들은 이주를 선택하고 있다. 지방 도시의 안마시술소로 옮겨 돈을 계속 버는 것이다.
최대 2천여 명에 이르렀던 장안동 안마업소 종사자들은 대부분 이미 떠났다. “그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애를 키우는 엄마였다”고 김씨는 말했다. 엄마는 생활력이 강하다. 자식 때문이다. 단속 이후, 장안동 안마시술소 ‘엄마들’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다방 또는 술집에 들어가거나 출장 안마사 일을 시작했다. 그들에겐 돈이 필요하다.
집창촌에 비해 안마시술소의 성매매 여성들은 ‘하이 클래스’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제로 발목 잡힌 게 아니라 스스로 이 직업을 선택했고 벌이도 그만큼 많다는 게 통설이다. 한 꺼풀 벗기면 다른 맥락이 있다. ‘큰돈’이 필요한 여성들이 이곳에 온다. 큰돈을 벌고 싶은 탐욕이 아니라 달리 큰돈을 벌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이곳에 온다. 급한 돈이 필요한 여성에게 한국의 노동시장은 냉혹하다. 할 일이 없다.
김씨 역시 고교 졸업 뒤 회사원 생활을 했지만 빚 때문에 ‘스스로’ 장안동에 왔다. 2004년 오토바이 퀵서비스 일을 하던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 병원비가 1천만원이 넘었다. 이럴 때 은행은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월급 더 주는 회사로 옮기려 해도 고졸 20대 중반 여성에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사채를 썼다. 안마시술소는 사채를 갚을 유일한 길이었다.
사채를 갚으러 오기도 하지만 사채를 얻으러 오기도 한다. 장안동 안마시술소와 결탁한 사채업자들이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이자와 원금은 안마시술소의 수입에서 떼간다. ‘돈 많이 버는 자발적 성매매 여성’이란 표현은 장안동 안마시술소 여성에 대한 반쪽짜리 설명이다. 이들이 짊어진 사채의 굴레를 다른 ‘노동’으로 해결할 길을 터주지 않는 한, 경찰 단속은 성매매 근절과는 거리가 있다.
김씨는 ‘안마’도 한다. 처음 오면 열흘에서 보름 정도 배운다. “안마를 잘못해서 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업주가 배상해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김씨는 말했다. 그러나 순전히 안마 받으러 오는 이는 드물다. 경찰 단속이 시작된 이유다. 2004년 9월,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경찰은 청량리, 미아리 등 집창촌을 집중 단속했다. 성매매 산업은 사라지지 않고 변신했다. 2005년부터 안마시술소는 성매매의 대명사가 됐다.
그게 다 김씨와 같은 ‘아가씨’들 탓이라고 시각장애인 안마사 임희연(51·가명)씨는 생각한다. 경력 30년의 임씨는 스무 살 때까지 지방 소도시에서 집안 농사일을 도왔다. 부모님은 아예 학교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성년이 되어서야 대한안마사협회가 운영하는 안마수련원에 갈 수 있었다. 2년 동안 해부생리, 병리보건, 안마이론, 안마역사, 안마실습, 전기치료 등을 배웠다. “모두 1031시간의 과정을 이수해야 안마사 자격증이 나온다”고 임씨는 말했다. 1031시간의 수업은 임씨가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1979년 그가 안마사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안마시술소는 없었다. 시각장애인들이 일하는 안마원이 전부였다. “안마원은 직접 손님을 받기보다는 호텔이나 여관과 계약했어요. 호텔에 외국 손님이 오면 거기 가서 안마를 했죠. 일본 손님이 많았어요.” 방귀 뀌는 소리에 잠시 웃었다고 발로 걷어찼던 일본 손님을 잊을 수 없다. 그가 기억하는 ‘안마원 시대’는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이 세 끼니를 겨우 해결하던 때다. 안마 산업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80년대 중반부터 바뀌었다. ‘3저 호황’이 왔다. 기업들의 접대 비용이 늘었다. 성매매 산업이 팽창했다. 안마를 겸한 변종 성매매가 등장했다. 그 시절부터 임씨도 안마시술소에서 일했다. 안마원보다 큰 규모로 영업하니까 손님도 늘고 수입도 늘었다. 결정적인 변곡점은 외환위기였다. 1998년부터 돈이 안마시술소 시장에 흘러들었다. 기업형 안마시술소가 생겨났다.
큰 규모로 하는 만큼 법적 안전판이 필요했다. 현행법상 안마자격증은 시각장애인만 받을 수 있다. 이들만이 안마를 내건 영업행위를 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은 합법적 운영을 위한 ‘바지사장’이 되고, 실제 사업자금과 운영은 업자가 담당하는 방식이 자리를 잡았다. 시각장애인들은 이를 두고 ‘정안(正眼) 자본’이라고 부른다.
업자들 가운데 다수는 술집 등을 운영하다 사업을 전환한 경우다. 외환위기 이후 중소 자영업자의 급증이 안마 산업의 판도에도 영향을 준 셈이다. 이후 안마시술소의 ‘주객’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안마의 타락이 본격화됐다. “그 뒤부터 안마사라고 하면 남자들한테 ‘서비스’해주는 걸로 알더라”고 임씨는 말한다. 2004년 성매매 집결지 단속은 화룡점정이었다. 포주들까지 안마시술소에 뛰어들었다. 지난 1일 자살한 이아무개씨가 일한 곳도 시각장애인 명의의 안마시술소였다.
“정상·퇴폐 가려 일할 처지 아냐”지난 20여 년간 안마 산업은 극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 안마사 임씨의 처지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타락한 ‘정안 자본’의 유입은 오히려 족쇄가 됐다. 임씨는 안마시술소에서 일한 돈을 모아 지난 2000년 경기 광주에 직접 안마시술소를 차렸다. 그러나 경쟁을 이기지 못했다. 더 큰 시설과 ‘아가씨’를 갖춘 다른 업소가 손님을 끌어갔다. 결국 2006년에 문을 닫았다. “눈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속이는” 억울한 일도 많이 겪었다. 평생 모은 돈도 날렸다.
지금은 충남 서산의 안마시술소에서 다시 안마사로 일하고 있다. “그 신세가 처량하고 서글프다”고 임씨는 말했다. 임씨가 일하는 업소에는 시각장애인 안마사 3명과 ‘아가씨들’이 있다. 손님이 오면 18만원을 받는다. 그 가운데 2만원이 안마사 몫이다. 10만원은 성매매 여성이 가져간다. ‘일반인’ 업주와 ‘시각장애인’ 사장이 1만원씩 받고, 4만원을 다시 가게 운영비 명목으로 업주가 가져간다. 임씨는 아가씨들이 밉다. “그런 걸 해서 돈 버는 아가씨들 가운데 뭐 제대로 된 게 있겠느냐”고 말한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시각장애인들의 생존 문제가 있다. 중증 시각장애인들의 다수는 가난하다. 임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모와 형제조차 도와주지 않는다.” 일제 때부터 시각장애인들에게 독점권이 주어진 안마사 자격증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영세했던 안마 산업에 외부 자본이 밀려들면서 일부 시각장애인 안마사는 자신의 생계를 의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마시술소 바지사장이 되면 한 달에 200만~300만원까지 받는다. 안마원에선 열심히 해도 한 달에 170만원 정도가 고작이다.
안마시술소 단속이 나오면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이 경찰서 앞에 몰려가는 경우도 있다. 경찰의 단속은 성매매를 대상으로 삼지만, 안마시술소가 문 닫으면 시각장애인 바지사장과 안마사까지 일자리를 잃는다. 최근 장안동 단속은 예외다. 기업형 안마시술소가 밀집한 이곳 70여 개 업소 가운데 시각장애인 이름으로 등록된 곳은 서너 곳에 불과하다. 사업이 번창하자 장안동의 ‘정안 자본’은 시각장애인을 제쳐두고 대담한 무허가 영업을 해왔다.
8천여 ‘마사지숍’ 종사자 20만 명그래도 장안동 단속이 마냥 남의 일은 아니다. 서울 시내 다른 지역과 지방 도시의 안마시술소로 단속이 확대된다면 적잖은 시각장애인들은 생계의 터전을 잃게 될 것이다. 현재 안마사 자격증을 소지한 시각장애인은 전국적으로 7천여 명인데, 등록된 안마시술소는 850여 개, 안마원은 530여 개다. 당연히 일자리가 부족하다. 시각장애인 안마사 절반이 아예 취업을 못하는 상황이다. ‘정상 안마원’과 ‘퇴폐 안마시술소’를 가려 일할 처지가 아니다.
그러나 임씨의 유일한 버팀목인 안마사 자격증 때문에 재중동포 김성령(40·가명)씨는 벼랑에 몰렸다. 1995년 한국에 들어온 뒤 식당 허드렛일, 건물 청소, 목욕탕 때밀이 등을 전전했다. 그나마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마사지였다. 마침 중국에 있을 때, 헤이룽장성 노동국 마사지학습반에서 한 달간 마사지를 배웠다. 김씨는 얼마 전부터 ‘타이 정통 마사지’라는 간판을 내건 서울 강동구의 한 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손님이 4만원을 내면 업주와 반반씩 나눠갖는다.
지난 10월30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김씨에겐 위협이다. 헌재는 시각장애인 안마사의 안마업 독점권을 규정한 현행 의료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제 타이 마사지, 중국 마사지, 스포츠 마사지, 스파 마사지, 발 마사지 등은 모두 불법이 됐다. 한국인과 결혼한 김씨는 불법 체류자가 아니다. 그러나 남편 역시 벌이가 시원찮아 함께 일해야 한다. 어쩌면 김씨의 실직은 결혼의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혼하면 한국에 머물 권리도 사라진다. 불법 영업 단속의 낌새가 있으면 김씨는 곧바로 몸을 숨긴다. 실제로 김씨 주변에서 일하는 상당수 이주여성 노동자는 한국인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일거리를 찾아 마사지숍에 온 경우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마사지숍에 몰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에 도착한 이들은 공항과 항구에서 한국인 브로커들이 나눠주는 전단지부터 받아본다. 앞에는 서울시 지하철 노선도, 뒤에는 마사지 학원 광고가 있다. 학원에서 몇 달 배우면 숙식까지 해결해준다는 브로커의 말에 쉽게 넘어간다. 다른 일을 하다가 마사지 업소를 찾는 경우도 적잖다. 중국 출신 이주노동자 이경희(42·가명)씨는 충남 천안의 자동차 부품 회사, 경기 부천의 용접공장에서 일했다. 월급을 못 받았다. 화난 마음으로 길을 걷는데 ‘중국 전통 마사지’라는 간판이 보였다. 지난해 9월의 일이다. 지금은 한 달에 180만원 정도 번다. 공장에서 뼈빠지게 일해 정해진 월급 60만원도 못 받던 그로선 더 바랄 게 없다. 사장도 잘 대해준다. “다른 데서 일하기 싫다. 왜 한국에선 마사지가 불법이냐”고 이씨는 되물었다.
현행법상 무허가 업체를 운영하는 업주들은 사업의 장래를 점칠 수 없다. 노임도 많이 줄 수 없다.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이 사업의 유일한 인적 자원이다. 그들이 도망가면 가게를 운영할 수 없다. 꼬박꼬박 월급을 줘야 한다. 그 소문이 퍼져 더 많은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마사지 업체에 몰리고 있다. 전국적으로 8천여 곳의 마사지숍에서 20만여 명이 일하고 있다. 여기서 일하는 이주여성 노동자의 규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수십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게 관련 업계의 추정이다.
이 시장이 팽창한 것도 97년 외환위기와 관련이 있다. 당시 지방자치단체와 노동부 등은 스포츠 마사지 등의 재취업 강좌를 열었다. 실직자·퇴직자 및 그 가족들이 이를 배워 가게를 열었다. 안마사 자격증과는 달리 스포츠 마사지류의 자격증은 민간단체에서 몇 달간의 교육만 들어도 따낼 수 있다. 많은 업소가 문을 열었고 많은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고용됐다. 최근 불경기의 여파로 중소 제조업체들의 고용이 불안해진 것도 여기에 영향을 줬다. 지금 이들은 당국의 단속이 언제부터 본격화될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누군가에겐 휴식, 누군가에겐 죽음안마 산업의 밑바닥을 차지한 이들에게 공통점이 없지는 않다. 올해 3월, 인천 마사지숍에서 일하던 재중동포 출신의 이주여성 노동자가 숨졌다. 그는 불법 체류자이자 불법 안마사였다. 반팔만 입고 있던 그는 옷을 껴입고 나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피했다가 4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이 2006년 5월 서울 마포대교에서 펼친 장기 농성은 유명하다. 당시 집에서 투신하거나 거리에서 분신해 두 명의 시각장애인이 숨졌다. 한강 다리에서 집단으로 강물에 뛰어들기도 했다. 최근 장안동 성매매 여성 두 명의 잇따른 자살까지 더하면, 안마 산업의 변두리에서 벼랑까지 몰린 이들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안마는 위로와 휴식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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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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