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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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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OTL] 우리 자립했어요

부모 집이나 시설을 떠나 홀로서기에 나선 중증장애인들,
‘턱’ 투성이 세상과 싸우다
등록 2008-10-03 07:04 수정 2020-05-02 19:25

서울 용산구 청파동 한 다가구 주택에 올해 4월 세들어 간 김현주(36)씨. 그는 셋방 문을 넘어서기까지 ‘20전21기’의 사투를 벌여야 했다. 팔다리를 쓰지 못하고 언어장애까지 있는 그에게 현관 문턱부터 사람들의 편견의 턱까지 이 세상은 온통 ‘턱’ 투성이였다. 그 어느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김현주씨가 서울 청파동에 마련한 보금자리. 함께 사는 유용비씨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지면에서 문턱까지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만든 경사로를 오르고 있다.

김현주씨가 서울 청파동에 마련한 보금자리. 함께 사는 유용비씨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지면에서 문턱까지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만든 경사로를 오르고 있다.

계약자 보고 줄행랑 친 집주인들

그가 집을 구하러 나선 건 지난 2월. 이동과 대화 모두 불편한 그가 방을 구하러 다닌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다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독립연대)에서 중증장애인에게 방을 얻어주는 ‘IL복덕방’ 사업을 벌인다는 걸 알게 됐다. 값싼 1층 셋방을 구해야 했다. 지하층도, 2층도 휠체어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방 안까지 전동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지면과 현관 문턱의 높이 차가 작은 1층 방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독립연대 쪽에서 부동산중개소들을 수소문해 1층에 방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가면 1층 현관까지 계단을 두세 개는 꼭 올라가야 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열댓 군데를 돌아다녔다.

어쩌다 턱이 없는 방을 구해도, 전동휠체어를 탄 김현주씨를 데리고 가 “이 사람이 계약자”라고 하면 부동산중개인들이 기겁하기 일쑤였다. 부동산중개인은 어쨌건 복비라도 받을 요량이어서 어렵사리 설득이 가능했다. 그러나 부동산중개소의 관문을 통과하면 그보다 훨씬 견고한 집주인의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씨를 본 집주인들이 아예 줄행랑을 치곤했다”는 게 최흥수 독립연대 사무국장의 전언이다. 서울 회기동에서도, 영등포에서도 그렇게 퇴짜맞기를 일곱 차례나 거듭한 뒤 지금의 청파동 셋방을 가까스로 구할 수 있었다. 마음씨 좋은 집주인을 만난 덕이다.

그것으로 ‘셋방얻기 전투’의 끝은 아니었다. 지면에서 현관 문턱까지 경사로를 설치하는 진입로 공사는 필수다. 화장실에 장애인용 변기를 설치하고, 용변 작업의 편리를 위해 세탁기는 마루로 뺐다. 이런 후속 작업을 거쳐 중증장애인 거주를 위한 최소한의 거주 시설이 마련됐다.

비로소 김현주씨가 본격적인 자립생활을 시작하는 팡파르가 울렸다. 보증금 2천만원을 김씨 어머니가 댔고 임차인도 김씨 이름으로 돼 있으니 말이다. 한 달에 180시간을 쓸 수 있는 활동보조인 서비스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같은 1급 중증장애인 최종식(31)씨의 생활 속 도움도 그에게 큰 힘이 된다. 지난 7월과 8월에는 뇌병변 1급 장애인 김길면(32)씨와 유용비(32)씨가 독립연대를 통해 차례로 합류하면서 이 집은 장애인들이 자립을 하기 전에 미리 자립생활을 체험해보는 ‘체험홈’의 성격도 띠게 됐다.

김길면씨는 지난 16년 동안이나 경기도에 있는 시설에서 지내다 나온 경우다. 다른 누구보다 지금의 경험이 새롭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역시 언어장애가 심한 그는 “시설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여기서는 현주형이나 용비와 마음이 통해서 좋다”면서도 “시설에 있을 때는 자립생활 하는 것 보고 편하겠다 싶었는데, 막상 나와보니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살다 자립생활 한 달째를 맞은 유용비씨는 “장애인끼리는 서로 잘 알고 이해가 빠르니까 용기를 얻고 힘이 된다”며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불 못 켜고 길 잃어도 포기 안해

자립생활을 하다 보면 웃지 못할 일들도 자주 벌어진다.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휠체어에 오르고 내릴 수도 없는 김현주씨 얘기다. 집에 이사 온 초창기, 한 번은 저녁 9시 쯤 전동 휠체어를 몰고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는 컴컴한 방 안에서 전동휠체어에 앉아 다음날 아침까지 12시간 동안 버텨야만 했다. 혼자 있다 오줌이 마려운데도 반나절가량 참은 적도 있다. 김씨는 화장실 이용이 불편하다 보니 예전부터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일주일에 한 번만 대변을 보는 습성을 길렀다고 한다.

김길면씨는 고도근시와 난시에 사시까지 겹쳐 시력이 안 좋은데다 시설에 있는 동안 전동휠체어를 탈 일이 거의 없어 조작이 아직 서툴다. 이 때문에 집 근처를 돌아다니다 여러 차례 길을 잃어 다른 사람들 애를 태웠다. 그는 활동보조인 등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있는 곳을 설명한 뒤 한참 만에야 ‘미아 상태’를 끝낼 수 있었다. 집안에서 ‘나무늘보’란 별명을 갖고 있는 김씨는 “다른 사람들이 ‘쟤는 왜 빠릿빠릿하지 않느냐’고 하곤 한다”며 적응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한때 장애인 탁구선수를 꿈꾸던 유용비씨는 훈련 도중 목을 다쳐 장애가 더 심해진 경우. 요즘에도 가까스로 혼자 서 있다가 곧잘 넘어지고, 그러고는 잘 일어나지 못해 주위를 걱정시킨다. 김현주씨는 “집 안팎에서 뭐가 떨어지듯 ‘쿵’ 소리만 나면 용비 걱정부터 한다”고 했다.

9월23일 서울 청파동 집에서 기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김길면(사진 왼쪽)씨와 유용비씨.

9월23일 서울 청파동 집에서 기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김길면(사진 왼쪽)씨와 유용비씨.

김길면씨와 유용비씨 두 사람은 모두 장애인 문학 계간지 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다. 장차 시인의 꿈을 불태우고 있다. 장애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특유의 시각과 그 동안 겪었을 차별에 대한 고뇌가 뚝뚝 묻어나는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 특히 일반 초등학교 1학년 등교 첫날 친구들의 심한 놀림에 학교를 그만둬버린 유씨의 시 속에는 짙은 어둠이 배어난다. 그가 쓴 ‘반달’이라는 제목의 시는 이렇다.

“보름달이 되지 못한 슬픔을/ 먹구름으로 가려보지만/ 너의 모습은 너무 슬프게 보인다.// 강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별들이 놀려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눈물 흘리지 않던 니가/ 모두 잠든 깊은 밤/ 혼자서 울고 있다.// 외롭고 힘든 날을 보내며/ 보름달만 생각한다.// 보름달이 되기 위해/ 아픔도 참고 살아가는 너.// 오늘도/ 눈물을 닦고/ 기도하는 슬픈 너의 모습.”

지난 9월24일 김현주씨를 만나기 위해 서울 홍은동에 있는 한 정형외과를 찾았다. 그는 1주 전 혼자 전동 휠체어를 몰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옆에서 급정거를 하는 자동차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해 입원 중이었다. “전동이 아닌 그냥 휠체어였으면 더 다쳤을 것”이라며 웃는 그는 왼쪽 다리가 좀 아프다고 했다. 인터뷰 동안 그는 더 정확한 발음을 위해 몸을 많이 움직여야 했는데, 이 때문에 자꾸 코 중간으로 미끄러지는 안경을 무릎을 이용해 추어올렸다.

“서른 다섯,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어”

서울 홍은동이 본래 집인 그는 생후 한 달여 만에 길고 긴 황달로 고생한 탓에 뇌병변 장애를 갖게 됐다. 당시 의사는 “별것 아니니 집으로 가도 된다”고 했으나, 결과는 오진이었던 셈이다. 일반 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특수학교 초등 과정만 마치고 그의 학업은 중단됐다. 15살 때부터 10여 년 동안은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재활원에서 지냈다. 중증장애인 중에서도 특히 증세가 심했지만,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워낙 좋아했다. 다니던 교회에서 장애인 두세 명씩 모아 두 달마다 장애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만남을 조직하기도 했다. 친구의 친구들까지 엮이고 이동을 도와주는 이들까지 따라붙으면서 많을 때는 수십 명이 모이기도 했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김현주씨가 부모 곁을 떠나 자립생활을 시작한 건 올해 4월이 처음은 아니다. 시작은 2006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에서 알게 된 한 형이 김씨에게 함께 살 것을 제안했다. 그 형은 인천 계양구에 직장을 다니며 셋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김씨의 가족들은 물론 반대했다. 다른 비장애인들의 생각도 그렇듯, “집에 있으면 편하고 좋을 텐데 왜 자꾸 나가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각종 시설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다. 김길면씨도 유용비씨도 모두 가족들에게서 같은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쉽지 않은 선택은 스스로에 대한 치열한 실존적 고민에 뒤따른 산물이다. 그들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서울시민이고, 법적 권한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는 성인이다. 다만 장애라는 ‘다름’을 갖고 있을 뿐이다.

“언제까지 부모님 밑에서 살 수 있겠어요?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누가 날 보살펴주겠어요.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그 단계에서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집을 나와 자립을 위한 기초 틀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부분에서 부모님도 인정하시더라고요.”

계양구로 짐을 옮긴 그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가로도 일했다. 같이 사는 형이 출퇴근을 시켜주는 등 많은 도움을 줬다. 기초생활보장수급권자로도 선정돼 장애수당을 포함해 한 달에 52만원을 받고 있는 김씨는 없는 살림에도 지난해 추석에는 부모님에게 작은 선물과 용돈까지 드렸다. 이를 위해 센터에서 받은 얼마 안 되는 활동비를 아껴 모았다. 부모님은 “우리 아들이 처음으로 돈 벌어서 이렇게 갖고 왔네”라며 흐뭇해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함께 살던 형이 사귀던 배필과 지난해 말 결혼을 했다. 처음 세 달가량은 신혼집에 함께 살았지만, 아무래도 서로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옮기기로 했다. 하지만 다시 집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기왕 시작한 자립생활, 어떻게든 버텨내야 했다. 그가 청파동에 정착한 까닭이다.

김현주씨는 요즘 자립생활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게다가 요즘엔 식구가 늘어 맏형으로서의 책임감도 더 커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성취감도 쌓아가고 있다.

“중간에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 견딜 수 있었어요. 내가 다시 집에 들어가고 무너져버리면, 나도 부모님도 주변 사람들도 힘들어질 것 같았어요. 내 목표를 향해 꾸준히 노력할 거예요. 지금 하고자 하는 일에 한발한발 다가가고 있는 셈이잖아요. 시간은 남들보다 느리지만 결국 할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은 그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김씨는 훗날 다른 장애인의 자립을 도울 수 있는 자립생활센터를 운영하는 게 꿈이다. 그의 침대 위에 놓인 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김현주씨가 24일 서울 홍은동의 한 병원에서 기자와 이야기를 하던 중 웃음을 짓고 있다. 사지가 모두 불편한 그는 항상 오른쪽 귀에 휴대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는 블루투스 송수신기를 끼고 있다.

김현주씨가 24일 서울 홍은동의 한 병원에서 기자와 이야기를 하던 중 웃음을 짓고 있다. 사지가 모두 불편한 그는 항상 오른쪽 귀에 휴대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는 블루투스 송수신기를 끼고 있다.

장애 수당, 공공임대주택… 갈길 먼 제도

김씨는 중증장애인이 자립생활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여러 제도적 맹점들도 지적했다. 인천에 살 때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신청했는데, 담당 구청에서 장애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현장조사에 훈련이 안 된 아르바이트직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배정된 시간은 한 달에 고작 40시간. 김씨가 해당 구청 민원 게시판에 상황을 다시 설명하자 며칠 뒤 “해결이 됐다”는 문자 메시지가 왔는데, 결과는 180시간으로 대폭 늘었다고 한다. 또 공공임대주택 신청을 하려고 보니 부모님 집을 나온 지 1년이 지나야 대상이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씨는 “그럼 1년 동안 어디 가서 생활하라는 말이냐”며 “너무나 모순된 제도”라고 비판했다.

이들과 같은 중증장애인 사이에서는 최근 2∼3년 동안 ‘자립생활’의 바람이 세게 불고 있다. 2005년 국가가 전동휠체어에 대한 보조에 나서면서 보급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그 결과 중증장애인들이 이동할 수 있는 폭이 크게 넓어졌기 때문이다. 또 지난해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본격화하면서 자립생활을 할 수 있는 기초적인 토대도 마련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시작일 뿐이다. 전체 등록 장애인 210만5천여 명 가운데 중증장애인으로 볼 수 있는 1·2급은 54만9천여 명에 이르지만, 자립생활을 하는 이들은 극히 소수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파악하고 있다. 이유로는 여러 제도적 미비점들을 들 수 있는데, 활동보조인 서비스 시간의 제약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중증장애인 1인당 하루 평균 2.5시간의 서비스만 제공한다. 루게릭병에 걸린 1급 장애인이 밤중에 돌아눕지 못해 호흡곤란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 한국이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장애가 심한 경우 최고 24시간 개인보조 서비스(Personal Assistant Service)를 제공한다.

또 장애인 자립생활을 위해 시급한 건 주거권의 확보와 연금을 통해 기초소득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중증장애인에게 10만∼12만엔(약 110만∼131만원)가량의 기초연금을 지급함으로써 기초적인 생활이 가능케 한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72㎡가량의 주택을 공급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엔 한 달에 700달러가량을 주택 자금으로 주기도 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장애인 수당이 최고 13만원에 불과하다. 집도 수입도 없고 가족과 함께 살지도 않는 등의 요건을 충족해야 기초생활보장수급권자가 돼 한 달에 40여만원을 보조받는다. 또 한 달에 30만원 이상의 수입이 생기면 수급 대상자에서 해제되기 때문에 장애인들의 경우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구조적 문제도 함께 지적된다. 조영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장애인의 자립 문제를 한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기반 차원에서 접근하는 의식의 전환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런 한계 속에서도, 지금까지 중증장애인들이 집이나 시설에 격리되고 처박혀 있도록 강제해온 사회 시스템에 서서히 균열이 생기고 있다. 김현주·김길면·유용비씨 같은 이들의 마음속에 사람답게 살 권리를 흔들어 깨우는 욕망이 갈수록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중증장애인 전문 부동산 중개
방 구할 땐 ‘IL 복덕방’

김현주씨가 살고 있는 셋방을 찾고 계약하기까지에는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독립연대)의 ‘IL(Independent Living) 복덕방’ 사업이 있었다. 중증장애인들은 사회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셋방을 구하고 계약하는 요령 등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에 착안해 이를 도와주려고 만든 서비스다.
IL 복덕방은 우선 이용을 신청한 장애인의 형편에 맞는 집을 찾는데, 이 과정에서 부동산 정보업체 ‘부동산114’가 자체 망을 이용해 방 구하기를 돕는다. 적당한 물건을 발견하면 독립연대 활동가가 찾아가서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지, 화장실은 중증장애인의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은지 등 적합성 여부를 따져보고 개조를 통해 문제 해결이 가능한지도 점검한다.
적합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집주인 설득에 들어간다. 집주인들은 대부분 “몸도 성치 않은데 사고 나면 어떡하냐”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계약서에는 진입로와 화장실 등에 대한 개조 공사 뒤 계약기간이 끝나면 이를 원상복구하겠다는 각서를 써준다.
입주 뒤에는 기본적인 개조 공사를 해준다. 이 과정에서 화장실 공간 확보를 위해 세탁기를 옮기면 배관 공사를 새로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수도꼭지 위치도 장애인의 몸에 맞춰 바꿔줘야 한다.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올해 사업비용으로 5천만원을 지원받아 1가구당 150만원씩 개조 공사 비용 등을 지원하지만, 전세나 월세 보증금은 어차피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최근까지 30명이 신청했는데 김현주씨를 포함한 15명이 집을 찾아 입주를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가진 돈이 부족해 집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최흥수 독립연대 사무국장이 전했다. 부족한 돈에 맞춰 높은 지대에서 셋방을 찾았는데, 도저히 전동휠체어가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경사가 급해 포기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최 국장은 “집주인 중에는 ‘그냥 시설에서 살도록 놔두지 왜 장애인들을 데리고 다니느냐’ ‘중간에 복비 받아먹으려고 이러는 거 아니냐’고 의심을 하는 이들도 있다”며 “15명 모두 서울 영등포와 노원구, 경기 광명시 등 서울 비강남권 외곽 지역에 방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독립연대 쪽은 내년에도 같은 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쪽에 예산 지원 신청을 해놓았다. 문의 02-716-0302.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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