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을 수 없는 고객용 의자만 있는 백화점, 서비스연맹 조사 결과 서서 일하는 노동자의 하지정맥류 유병률 8배 높아
▣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인권OTL-30개의 시선 ⑬]
“앉고 싶다.”
7월15일 오후 6시. 정은미(34·가명)씨 입에서 외마디가 새나왔다. 정씨는 서울의 한 백화점 1층 매장에서 일하는 판매사원이다. 오전 9시30분에 출근해서 이 시각까지 점심시간 1시간 쉰 게 다다. 그가 일하는 매장에는 의자가 없다. 점심을 먹은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5시간을 줄곧 반듯한 정자세로 서 있었다. 얼마 전 백화점의 모니터링에서 ‘자세 불량’으로 경고를 받았기 때문에 요즘 자세에 더욱 신경을 쓰는 중이다. 이날따라 손님이 없는 탓에 제품에 대해 설명하느라 손을 움직이거나 폭 70cm의 ㄱ자 모양 좁은 매장을 왔다갔다 할 일도 없었다. 손님이 없으면 대기 자세로 가만히 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 힘들고 지루하다.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재발
정씨는 지난해 하지정맥류 진단을 받고 3개월간 주사로 치료했다. 하지정맥류는 다리 부분에서 혈액이 제대로 순환하지 못하고 정체돼 혈관이 부풀어오르는 병이다. 서 있는 시간이 길면, 발병 확률이 높다. 3년 전부터 혈관이 부풀어올라 겉보기에 흉했지만 별다른 통증이 없어서 내버려뒀더니, 지난여름부터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치료하는 데만 120만원이 들었다. 그 뒤로도 빡빡한 하지정맥류 스타킹을 신고 몇 달을 더 지내다가 겨우 스타킹을 벗었는데,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사라진 실핏줄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다리가 피로를 느낄 때는 앉아서 쉬어줘야 해요. 안 그러면 재발합니다.” 정씨 머릿속으로 의사의 충고가 스쳤다. 그러나 매장에는 의자가 없으니 앉아서 쉴 수가 없다. 사정은 의자가 있는 매장도 다르지 않다. 판매 직원이 앉아서 손님을 맞는다는 것은 서비스 정신에 어긋난다는 게 이 백화점의 ‘깨뜨릴 수 없는’ 방침이다.
하루 8시간 이상을 서서 일하는 백화점 판매직 여성 노동자들의 건강권이 위험에 놓여 있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은 지난 5월 백화점에서 서서 일하는 판매직 여성 노동자 88명과 카드회사 등에서 앉아서 일하는 전화상담원 및 사무직 여성 노동자 169명을 대상으로 하지정맥류 검사를 했다(보통 이런 조사를 할 때는 대조군을 실험군의 2배 이상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앉아서 일하는 여성을 더 많이 조사했다). 그 결과 서서 일하는 시간이 하루 8시간이 넘는 판매직 여성 88명 중 하지정맥류 진단을 받은 이는 모두 30명으로 나타났다. 반면, 앉아서 일하는 169명 중 하지정맥류 진단을 받은 경우는 7명에 불과했다. 앉아서 일하는 노동자의 유병률은 4%인 데 반해, 서서 일하는 노동자의 유병률은 34%로 무려 8배 이상 높다.
서서 일하는 기간이 길수록 하지정맥류 유병률도 높았다. 각 요인이 병을 유발하는 정도를 나타낸 위험비를 조사한 결과, 서서 일한 기간이 하지정맥류의 발병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높았다. 서서 일한 기간이 3년 미만인 사람보다 3~5년 일한 사람이 하지정맥류에 걸릴 확률이 8.9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3년 미만 일한 사람과 5년 이상 근무한 사람을 비교하자 그 간극은 더 커져, 무려 1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윤간우 녹색병원 전문의는 “출산 경험, 가족력 등 요인도 위험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번 검진에서 보듯 서서 일하는 기간이 길수록 하지정맥류에 걸릴 확률은 높았다”고 설명했다(표 참조). 그는 “하지정맥류는 오래 서 있어서 생기는 병인데, 종일 서서 일하는 분들은 중간에 적절히 앉아주면 발병률을 많이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의자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지만, 백화점의 의자들은 대부분 고객용이다. 정은미씨가 일하는 백화점 현관 앞에는 고객용 등나무 의자가 아무도 앉지 않은 채로 놓여 있었다. 현관 밖에도 벤치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모두 ‘고객의 쉼터’다. “저희는 고객용 의자에는 앉을 수가 없어요. 잠깐이라도 앉았다가 일어설 수 있는 공간이 1층 언저리에 있었으면 좋겠네요.” 55개 화장품·가방 매장이 꽉 들어찬 화려한 백화점 1층을 둘러보며 정씨가 말했다. 정씨가 쉬기 위해서는 지하 2층에 있는 직원 전용 휴게실로 내려가야 한다. 10분 쉬기 위해 지하 2층에 가면 내려가고 올라오는 데 2~3분이 지나간다.
10분 앉으려고 다른 층의 휴게실로
매장 내에 의자가 있는 경우에도 앉을 수는 없다.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는 손님과 상담할 때 앉는 의자가 있다. 그러나 이 의자는 말 그대로 상담용일 뿐이다. 손님용으로 마련된 의자가 놓인 의류 매장에서도 마찬가지다. ㄱ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는 김아무개(29)씨는 “아무리 다리가 아파도 손님이 없을 때는 매장 내 의자에 앉을 수 없다”며 “앉으려면 휴게실이 있는 2층이나 4층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ㅅ백화점 6층 아동복 매장에서 일하는 박아무개(40)씨는 “예전에 목동 ‘행복한 세상’이라는 매장에서 직원이 앉아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고객들이 이걸 못 받아들여서 결국 나중에 의자를 다 치웠어요. 여기 의자가 두 개 있지만, 앉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라고 말했다. 다른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이아무개(28)씨는 “저희 매장은 직원이 4명입니다. 의자도 두 개가 있죠. 사실 4명 모두 종일 서 있을 필요는 없어요. 4명 중 2명이 서서 고객 응대를 하면 다른 1명은 앉아 있는 것도 합리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법인데, 그런 게 불가능해요”라고 말했다. 이씨는 “컴퓨터 전산 작업을 할 때도 앉아서 하면 집중도 잘될 텐데…”라며 말을 흐렸다.
매장 내에 의자가 없거나 의자가 있어도 앉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휴게실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과 은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점, 롯데백화점 본점·노원점, 신세계백화점 본점, 현대백화점 목동점 등 서울의 다섯 군데 백화점을 대상으로 휴게실 현황을 조사했다. 이 중 휴게실이 층마다 있는 곳은 신세계백화점 본점 한 군데에 불과했다. 롯데백화점 노원점은 3층과 5층, 롯데백화점 본점은 1층, 5층, 6층에 휴게실이 없었다. 갤러리아백화점은 2층, 4층에만 휴게실이 있었다.
정민정 민주노총 여성부장은 “백화점 직원들의 경우 쉴 수 있는 시간이 간식 시간 30분, 상황에 따른 티타임 20분 등으로 하루 평균 30~40분에 불과한데, 이 시간 동안 동선이 긴 백화점에서 다른 층까지 오고 가는 것은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 다른 층에 있는 휴게실은 이용하기 힘들다”며 “층마다 다리를 편안히 하고 쉴 곳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본점 1층에서 일하는 김경란(32·가명)씨는 “지하 1층 휴게실까지 가려면 너무 멀기 때문에 2층에 있는 직원 통로의 계단에서 주로 쉰다”고 말했다.
통로에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김씨를 따라 직원들이 다니는 직원 동선 구간에 가봤다. 1층의 한 명품 매장 옆 통로를 꺾어드니 문이 나왔다. 문을 밀자 화려한 백화점 매장과는 상반되는 어두컴컴한 직원용 통로가 나왔다. 그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의류 상자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바닥에는 유니폼을 입은 다른 매장 직원 3~4명이 바닥에 주저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씨는 “여기는 일하는 직원이 정말 많거든요. 다른 백화점의 두 배예요. 그런데 휴게실은 다른 백화점과 마찬가지로 층마다 하나씩이에요. 결국 이런 통로에서 쉬는 거죠. 여기저기 상자를 깔고 앉아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그래요”라고 말했다. 지하 1층 푸드코트에서는 손님과 섞여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음식만 사서 15층 직원식당으로 가는데, 밥은 빨리 먹어야 하고 15층까지는 너무 먼 탓에 통로 바닥에 주저앉아 먹기가 일쑤라고 한다. 통로에선 치마를 입은 판매 직원이 무릎 꿇은 자세로 쉬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치마를 입고 바닥에 앉기가 어려워 이런 자세로나마 쉬고 있는 참이다. 다시 직원 전용 통로인 초록색 계단이 나왔다. 그 계단 통로 여기저기에 직원들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거나 쉬고 있었다. 홍보실 관계자는 “인원은 많지만 공간은 부족하기 때문에 직원용 통로에 의자를 두고 휴식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갤러리아 백화점에 근무하는 ㄱ씨도 “4층 휴게실에 쉬려고 가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리다가, 한 사람이 나가면 그제야 자리로 가서 누울 때도 많다”고 말했다.
직원들이 ‘쉬는 곳’에 대한 백화점의 방침도 문제다. 홍보실 직원이 “층마다 쾌적한 휴게실을 갖추고 있다”고 소개한 신세계백화점 본점 1층 여성쉼터를 가봤다. 들어가니 녹초가 된 여직원 20여 명이 의자에 앉아서 발을 뻗고 쉬고 있었다. 환기가 잘 되지 않아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휴게실 곳곳에는 피곤에 절어 의자를 붙여 누워 있는 직원도 여러 명이었다. 휴게실에서 쉬고 있던 한 직원은 “환기가 잘 되지 않아 답답하다”고 말했다. 이 직원은 “종일 서 있다가 점심 시간에 잠깐, 또 간식 시간에 잠깐 와서 쉬는 건데, 누워 있으면 백화점 직원이 와서 톡톡 두드린다”고 귀띔했다. 그는 “휴게실에서 누우면 다른 직원이 이용하지 못한다는 건데, 그러면 다른 백화점처럼 잠시 누워서 몸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백화점은 이율배반의 공간이다. 쇼핑하는 손님들은 점점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 편리하게 쇼핑할 수 있다. 그러나 고객의 공간이 넓어질수록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공간은 좁아지고 있었다. 직원들은 마땅히 앉을 곳도 없고 마땅히 쉴 곳도 부족했다. 갤러리아백화점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은 “예전에는 3층에도 직원 휴게실이 있었는데 3층을 수선실로 바꿨어요. 고객에게 더 빨리 수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죠. 직원의 공간을 줄여서 고객의 편의를 확보하는 식이죠”라고 말했다.
의사와 변호사는 앉아서 일하는데…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여성연대, 한국여성민우회, 노동건강연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참여연대 등은 7월22일 ‘서비스 여성 노동자에게 의자를 주자’는 국민캠페인단을 구성한다. 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의자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고객 동의를 확보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백화점 사업주와 노동부에 요구를 전달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정민정 민주노총 여성부장은 “의사와 변호사가 고객을 맞을 때 앉아 있다고 해서 아무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백화점 판매 직원들이 앉아 있으면 무례하다고 생각한다”며 “고객의 그런 인식이 백화점 업계에서 직원들을 앉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국민캠페인단은 백화점 업주들을 설득하는 것은 물론, 고객의 인식 전환도 함께 유도할 예정이다. 정 부장은 “고객을 기다리는 동안 다리가 아플 때 잠시 앉아서 쉴 수 있으면, 몸과 마음이 피로한 채로 일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안전보건법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277조는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작업 중 때때로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때에는 당해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비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고객이 왕’인 백화점에서는 이 법도 뒷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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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사람들의 작업 환경은 어떠해야 할까.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카운터를 앞에 두고 좁은 공간에서 종일 서 있는 계산원, 재고나 지난 상품을 매대에 내놓고 하루 종일 팔거나 향수·보석 등 진열장을 앞에 두고 종일 서 있는 판매원 등은 카운터, 매대, 진열장이 작업 공간이다.
미국 보건행정안전국은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편안하고 건강한 자세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이런 공간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발끝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발바닥이 편안하도록 발판이나 푹신한 깔개를 깔아야 한다(그림 오른쪽). 둘 다 조금만 신경쓰면 금방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현재 우리나라 마트나 백화점에서 서서 일하는 노동자의 작업대에는 이런 배려가 전혀 없다(사진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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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은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백화점 화장품 판매직 여성노동자 6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직장에서 가장 먼저 해결돼야 할 것’에 대한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249명(41.5%)이 “아픈 다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166명(27.6%)은 “과도한 평가 금지”를, 151명(25.1%)은 “제대로 휴가를 갈 수 있는 것”을 원했다. 심지어 △폭력 문제 해결 △화장실 증설 △식수 설치도 요구사항에 포함돼 있었다.
판매직 여성노동자들은 하지정맥류 외에도 여러가지 병들로 고생하고 있었다. 230명이 알레르기성 비염을, 153명은 방광염을 앓고 있었다. 우울증에 걸렸다고 응답한 사람도 57명으로, 전체의 9.7%를 차지했다. 방광염이 있다고 응답한 한 직원은 “고객을 상대하다가 화장실을 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참는 버릇이 생겼다”며 “그러다 보니 물도 잘 안 먹게 되고, 결국 방광염이 걸렸다”고 말했다. 우울증을 호소하는 직원은 “매장에서 항상 웃으며 고객을 상대하잖아요. 고객이 어떤 모욕적인 말을 해도 웃어넘기잖아요. 이 때문에 집에 오면 갑자기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변해요. 집에 가는 길에는 자꾸 우울해지고 말을 안 하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인권 OTL-30개의 시선]
[인권 OTL-30개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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