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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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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OTL] 인간답게 죽고싶다

등록 2008-05-27 00:00 수정 2020-05-03 04:25

골방에서 거친 음식을 삼키며 시한부 삶을 살아내는 빈곤층 말기암 환자들과의 대화

▣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 영상 박수진 취재영상팀 피디

[인권 OTL-30개의 시선 ⑤]

말기암 선고. 생의 모든 게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남은 시한부 인생. 존엄하고 소중한 한 생명을 어떻게 마무리지을 것인가.

그러나 빈곤층 말기암 환자들에게 삶의 반추는 사치일 뿐이다. 지저분하고 컴컴한 골방에서, 홀로, 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병들고 지친 가족과 함께, 거친 음식으로 연명하며, 그들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만큼이나 쓰디쓴 시한부 삶을 살아내야 하고, 누추한 죽음을 쓸쓸히 기다려야 한다. 그들에게 생의 존엄은 무엇이고, 존엄한 죽음은 무엇인가.

이 기사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빈곤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시한부 삶들과 나눈 대화이다.

시한부, 빈곤층 말기암 환자들과의 대화

종일 싱크대 옆에 누워있는 이혜용씨

5월19일 오후 1시 경기 일산시 덕양구 고양동. 지은 지 20년이 넘어 붉은 벽돌이 거뭇거뭇해진 낡은 연립주택 2층. 한낮이지만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데다 불을 켜지 않아 집 안은 컴컴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대소변 냄새가 섞여 있는 듯한 지린내가 훅 끼쳤다. 거실 겸 부엌 싱크대 바로 옆에 이혜용(79)씨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뼈 위에 얇은 거죽을 걸쳐놓은 듯 살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핏기 하나 없는 샛노란 얼굴. 푹 파인 눈두덩이 주변은 푸르스름하다. 이씨는 때때로 비썩 말라 부서질 것 같은 팔을 뻗어 두유를 마셨다. 석 달에 20kg씩 지원되는 쌀로 버티기 위해서 점심 대신 두유를 먹는다. 그나마도 아까워 조금씩 몇 시간을 두고 마신다.

이씨는 지난해 10월 직장암을 선고받았다. 8년 전 비암으로 수술을 크게 받은 뒤, 두 번째 암 선고다. 직장에서 생긴 암세포는 몸을 타고 뼈로 옮아갔는지, 석 달 전 심하게 열이 난 뒤로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하루 24시간을 가만히 누워 있는다. 스스로 몸을 뒤척일 수도 없다. 암이 얼마나 어떻게 번졌는지, 병원에 가지 않아서 정확히 상태를 알지도 못한다. 덕양구 보건소 ‘방문간호사업’을 통해 이씨를 방문한 김아무개 일산병원 전문의(가정의학)는 “검사기구로 정확한 진단을 한 건 아니지만, 발이 붓는 등 상태로 보아 말기인 것 같다”며 “노인이어서 지금은 통증에 무디지만 두 달 이내에 통증이 극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를 돌보는 건 아내 김춘자(74)씨다. 관절염, 허리 디스크, 저혈압 등 김씨가 앓고 있는 만성질환도 여러 가지다. 김씨 역시 ‘돌봄’과 ‘부양’을 받아야 하는 노인이지만, 그는 꼼짝 못하는 남편을 돌봐야 한다. 이 노부부의 하루는 길다. “밤에 잠이 안 와서 밤 12시~새벽 1시에 겨우 눈을 붙여. 아침 6시면 눈이 떠져. 그러면 뭘 해. 가만히 계속 있어. 1시간쯤 있으면 할아버지가 내 발을 막 잡고 흔들어. 기저귀 갈아달라고. 그러면 내가 기저귀를 갈아주지.” 김씨가 하는 일은 하루 다섯 번 남편인 이씨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하루 두 번 밥을 챙기는 일이다. 밥은 하루 두 끼, 기저귀는 다섯 번만 간다. 10개들이 6천원인 기저귀 값만 한 달에 9만원쯤 된다. 노령연금 13만7천원, 기초생활급여 31만원, 장애인 아들에게 나오는 돈 15만원이 생활비의 전부인 이들에게 방세 30만원을 빼고 나면 그나마도 남는 돈이 없다. 두 부부가 싱크대 옆에 자리한 것도 밥을 하고 밥을 먹이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 움직이는 거리를 가장 짧게 하기 위해서다.

나머지 시간에는 김씨도 남편 이씨 옆에 모로 누웠다, 바로 누웠다, 텔레비전을 켰다, 껐다를 반복할 뿐이다.

몸 전체에 마약성 패치 붙인 정광명씨

2003년 직장암에서 시작해 지금은 척추·폐 등 온몸에 암세포가 번져 말기 상태에 이른 정광명(49·가명)씨. 그의 세상은 서울 답십리1동 방 두 개짜리 반지하 주택의 큰방 침대 위가 전부다. 기자를 처음 보자마자 그는 “내가 얼마나 아픈지 아냐”며 통증에 대해 설명했다. “일단 배 쪽은 계속해서 전기고문을 하는 것처럼 찌릿찌릿한 고통이 24시간 계속되고요. 왼쪽 다리는 누가 칼로 다리를 째는 것 같고, 오른쪽 다리는 쇳덩이로 짓이기는 것 같아요. 말로 다 못해. 말로는….” 정씨는 말하면서 웃옷을 들어올려 그가 붙이는 마약성 패치를 보여줬다. 시간당 50mg으로 진통제 중 강도가 가장 센 약이다. 몸 전체에 붙어 있는 마약 진통제만 총 20개다.

정씨의 또 다른 고통은 ‘밤’이다. “나는 잠도 맘대로 못 자요. 너무 아프니까….” 밤새 잠 못 이루는 정씨는 크게 앓는 소리를 내지도 못한다. 밤이 되면 정씨 침대 옆에는 낮에 일하러 갔다가 돌아온 아내 류영미(45·가명)씨와 중학교 2학년 둘째딸, 원래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지만 왼쪽 손발이 작아 발달이 늦된 셋째딸이 잠을 자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옆 작은방에는 올해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큰딸이 자고 있다. 정씨는 “밤에 캄캄해지면 그래도 옆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과 아내를 보고 꼭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움직이지 못하지만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앉아요. 내가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거든요. 그래서 혼자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요.”

표막달레나 모현호스피스센터 책임수녀는 정씨의 상태를 전해듣고 “척추나 신경으로 암세포가 번져서 패치를 아무리 붙여도 통증이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그럴 땐 의료진이 주사 등을 투약하고 다른 방법들을 써서 통증을 전문적으로 조절해야 하는데, 혼자 악으로 버티고 있으면 환자의 마음이 너무나 지쳐버린다”고 걱정했다. 수면장애도 말기 암환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장애로 정맥주사나 적절한 약 처방이 필요하다. 또 밤사이 죽으리라는 두려움과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환자를 안심시키고 격려하는 말을 해주거나 정신과 의사가 상담을 해주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정씨는 ‘가족이 있다’는 위안과 그것 때문에 살고 싶다는 ‘의지’ 외에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태다.

정씨는 말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서 1년쯤 지내다 보면 병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죠. 여건이 안 되니까….”

간호하던 딸이 우울증 걸린 홍진녀씨

“간장 좀 사와라, 경애야.”

대구에 사는 홍진녀(52·가명)씨가 숨을 몰아쉬며 딸에게 말했다. 홍씨는 요즘 매일같이 딸에게 하루 한 가지씩 심부름을 시키면서, 딸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연습시킨다. 그는 2000년 비강암 진단을 받은 뒤 1년 정도 항암치료를 받고 식당 보조일, 파출부 일을 시작했다. 남편은 심근경색으로 10년 전 세상을 떠났다. 열심히 살아보려던 2004년 여름, 홍씨는 다시 숨이 찼다. 병원에 갔더니 암세포가 폐로 전이됐다고 했다. 폐암 말기로 집에서 마약성 진통제로 통증 조절만 하고 있는 홍씨는 매일 호흡곤란, 팔다리를 찢는 것 같은 온몸의 통증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그러나 지금 홍씨의 머릿속에는 고통보다 더 큰 걱정이 가득하다. 둘째딸 김경애(26·가명)씨 걱정이다. 홍씨에게는 딸이 셋 있다. 큰딸은 이혼한 뒤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근근이 살고 있다. 막내딸은 가출 뒤 연락이 안 된다. 홍씨의 곁을 떠나지 않고 홍씨를 돌봐준 건 둘째딸 경애씨다. “밥 차려주고, 몸 씻겨주고, 집안일 하고.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늘 나를 돌봐줬어.” 홍씨에게 경애씨는 착한 딸이었지만, 경애씨는 점차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보이기 시작됐다. 밖으로 나가는 일도 적어졌다. “내가 재발하고 1년쯤 지났을까. 집에 누가 찾아오면 경애가 방으로 콕 들어가는 거야. 아무리 불러도 밖으로 안 나와. 그때부터 며칠씩 문을 잠그고 있어. 나중에 물으니 거의 1년을 집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만 있었다나봐. 내가 내 아픔에 급급해서 딸이 어떤 마음인지 전혀 몰랐던 거야.”

가정방문을 하는 보건소 간호사의 연결로 정신과 상담을 받은 지 1년. 경애씨는 이제 조금씩 혼자서 나가는 연습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집 밖엔 잘 나가지 않고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내가 죽으면 우리 경애는 어떡해. 저걸 생각하면 내가 못 죽어. 내가 어떻게 죽어.”

마약성 진통제 패치를 몇 개씩 붙여도 끊이지 않는 통증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홍씨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노인 인구와 저소득층이 많은 동네

경기 일산시 덕양구 대덕동에서 지난해 12월까지 1년6개월 동안 방문간호사업을 진행한 소행연 간호사는 “유독 노인 인구가 많은 이 지역은 마을 전체가 ‘놀랄 노자’”라고 말했다. 대덕동은 노인 인구가 12%(인구 4500명 중 550명)로 전체 평균 노인 인구 비율(9.1%)을 훨씬 웃돈다. 소 간호사는 이 지역에 저소득층이 많다고도 덧붙였다.

아들 둘, 딸 한 명을 둔 아주머니가 식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두 아들 중 한 명은 집을 나갔고, 다른 한 명은 파산 선고를 받았다. 돌봐줄 사람이 없어 마을 이장이 경기 의정부시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딸에게 아주머니를 보냈지만, 한 달 뒤 딸은 “도저히 돌볼 수가 없다”며 어머니를 다시 대덕동으로 돌려보냈다. 동네 사람들이 가끔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홀로 병마와 싸우던 아주머니는 지난 2월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이 아주머니는 실질적으로 자신을 부양하지 않는 딸이 부양가족으로 등록돼 있고 집이 있다는 이유로 차상위계층으로 등록돼 기초생활급여 대상자도 되지 못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부부는 재혼한 지 5년 만에 부인이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결혼해서 집을 샀는데, 3년 동안 치료비를 대느라 집을 팔았다. 고물상을 하던 남편은 아내가 죽은 뒤 알코올중독으로 매일같이 술만 마시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또 다른 노부부도 할아버지가 암에 걸려서 숨지자, 할머니가 자살을 하기도 했다.

이경식 가톨릭의대 명예교수(종양내과·완화의료학)는 올해 2월부터 돈이 없거나 돌봐줄 가족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않고 생을 포기한 채 집에만 있는 사람들에게 가정방문 호스피스 사업을 하는 ‘삼성산 호스피스 봉사회’를 설립했다. 그는 빈곤층 시한부 삶의 현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병원에 올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 방치된 사람들이 여전히 너무 많다. 지금의 보험 수가로는 이들을 병원으로 끌어낼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거나, 돌봐줄 가족이 없다. 가족이 있는 경우도 암환자가 있으면 나머지 가족은 미성년자가 아닌 다음에야 모두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 그러니 추가로 간병인이 필요하고, 그것도 다 돈이다. 이들을 포섭할 수 있는 ‘제도’는 현재로선 없다. ‘자원봉사’, 여러 단체나 재단의 ‘지원’밖에 대안이 없는 실정이다.”

말기암 환자들은 수술, 약물요법 등 적극적인 항암치료가 더 이상 효과가 없다고 판단되는 환자다. 기대되는 수명은 6개월 이하다. 이들은 회복 가능성은 없지만,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기 때문에 통증을 조절해주는 ‘통증완화 치료’가 필요하다. 통증은 암의 종류마다 다르지만 말기에 다다르면 대체로 호흡곤란, 통증으로 인한 수면장애, 방광 팽만이나 변비, 마약성 진통제 사용으로 인한 입마름증, 구토, 복수, 딸꾹질, 발열, 부종, 욕창 등 다종다양의 통증이 온몸을 공격한다. 통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울증과 이로 인한 자살 시도 등 정신적으로 겪는 불안도 심각하다.

‘버킷 리스트’엔 생계·가족 걱정 뿐

말기암 환자들은 이 모든 통증을 적절하게 관리받으면서 죽음을 잘 준비할 권리가 있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인간에게 부여된 마지막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소득층 암환자들은 통증을 세심하게 돌보면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기는커녕, 생계에 대한 두려움, 남겨진 가족의 생활에 대한 걱정까지 떠안고 얼마 남지 않은 삶을 홀로 숨죽이며 보내야 한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에서 돈 많은 시한부 환자 에드워드는 마지막 남은 삶을 뜻깊게 보내기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만들어 실천하는 여행을 떠난다. 카레이싱, 스카이다이빙,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문신하기 등 유쾌한 목록들을 하나하나 실천한다. 그러나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만나본 시한부 환자들의 버킷 리스트를 물었다.

“집 전셋값 좀 마련됐으면 좋겠어. 할망이 돈 걱정 안 하고 아프지 않게 죽었으면 좋겠고.”(이혜용씨)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고 싶어.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나) 간혹 집 앞에 산책이나 나가면 되지.”(송정란씨)

“누가 나 죽을 때 장례비만 좀 내줬으면 좋겠어. 우리 딸 돈도 없는데 나 초상도 못 치르면 어떡하나, 그게 걱정이야.”(홍진녀씨)

“내가 다시 건강해지는 거지. 둘째딸이 개그맨 기질이 있는 것 같아서 마술을 가르쳐주고 싶었는데 결국 못 가르쳐줬어.”(정광명씨)

‘가난’과 ‘죽음’을 동시에 떠안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 생계에 대한 걱정을 통증과 함께 머리에 이고 집 안에서 고통의 한숨을 내뱉었다.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침해받은 권리’를 찾기 위해 거리로 나오는 시대지만, 거리로 나올 힘조차 없는 이들은 별달리 바라는 것도 없이 조용히 집 안에 누워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우리에겐 잘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생명의 숨을 쉬고 있는 이들이 있다.



국내 호스피스 기관의 현실

의료보험만으론 턱도 없군요

말기 암환자를 위한 국내 호스피스 기관은 2007년 현재 총 78개다. 그러나 이들 호스피스 기관을 이용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국내에서 가장 시설이 잘돼 있다는 서울 강남성모병원의 경우 호스피스 병동에는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6인실이 없다. 6인실은 환자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1인실은 하루 병실료가 25만4천원, 4인실은 하루 17만2천원, 5인실은 하루 5만7천원이다. 의료보험에서 6인실 기준으로 지급되는 2만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환자 부담이다. 의료급여 대상자 여부, 기초생활급여 대상자 여부도 따지지 않는다. 각 병원 사회사업과에서 환자들의 상황을 점검해 재단 등과 연계해 병원비가 지원되기도 하지만, 지원 여부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환자들이 마음놓고 이용할 수 없는 형편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호스피스 병동의 경우 전체 병실의 절반 이상이 1인실이고, 모두 의료보험이 적용된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유방암이 피부·폐 등으로 전이된 송정란(45·가명)씨는 얼마 전 폐에 물이 차 숨이 넘어가기 직전 한 호스피스 병동 4인실에 입원했다. 각종 진료비를 포함해 2주 입원했고 113만원이 나왔다. 손씨는 “중·고생 딸이 있다”며 “언니가 도와줘서 가능했지만, 계속 그런 치료를 받기란 사실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병원 사회사업과에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우선은 병원비를 모두 지불한 상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완화치료를 받지 않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저소득층 말기 암환자를 대상으로 각 지역 보건소가 ‘맞춤형 방문보건사업’을 실시하기도 하지만, 실질적 도움을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말기 암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양성 과정을 이수하는 등 전문성을 갖춘 간호사도 적고, 간호사 1명이 담당해야 하는 가구 수도 평균 245가구로 너무 많다. 이 때문에 방문간호사들이 많게는 한 달에 한 번, 적게는 두세 달에 한 번 환자를 방문할 수밖에 없다.




[기획연재- 인권 OTL 30개의 시선]

▶① 쓰린 새벽의 아이들
▶② 아이들의 끔찍한 SOS
▶③ 시퍼런 가위와 금속탐지기, 무서운 학교
▶④ 내가 10대 레즈비언이다, 어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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