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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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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OTL] 약이 있는데 왜 죽어야 합니까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 가격 올려받으려 4년째 국내 공급 안하는 로슈, 절규하는 환자들
등록 2008-10-17 16:29 수정 2020-05-03 04:25

그는 절규하고 있었다. “비싸서 먹을 수 없는 약은 약이 아니라 독일 뿐!”이라고.
10월7일 오전 10시30분께, 서울 강남의 글래스타워 앞에서 ‘우리는 모두 에이즈 환자다’라고 적힌 글귀를 가슴에 붙인 사람들이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환자에게 죽음의 관이 아닌 생명의 약을 달라!’ ‘부풀려진 약가를 즉각 인하하라!’ ‘정부는 의약품 접근권, 환자의 생명권을 보장하라!’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환자복을 입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 윤가브리엘(36)씨가 쓰러져 있었다. 윤씨는 일어나 말했다. “한국의 환자들은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약이 있는데 왜 죽어야 합니까? 환자들은 생명을 연장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물기로 젖었다. “에이즈 환자는 살고 싶다! 로슈는 푸제온을 당장 공급하라!”

HIV 감염인 윤가브리엘씨가 10월7일 열린 집회에서 에이즈 약을 구하지 못해 쓰러진 환자들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HIV 감염인 윤가브리엘씨가 10월7일 열린 집회에서 에이즈 약을 구하지 못해 쓰러진 환자들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파리~방콕~서울~뉴욕에서 잇단 시위

이날은 ‘로슈 규탄 국제공동행동’이 서울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서울의 인권·의료 단체 활동가들은 HIV 감염인 단체 회원들과 함께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고! 고! 12시간 시위’를 벌였다. 10월1일 다국적 제약회사 로슈 창립일에 맞춰 시작된 국제공동행동은 앞서 10월1일 프랑스 파리, 3일 타이 방콕에서 벌어졌다. 프랑스 에이즈 운동단체 ‘액트 업 파리’(ACT UP Paris), 타이의 HIV/AIDS 감염인 네트워크 ‘티엔피 플러스’(TNP+)는 로슈가 한국에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Fuzeon)을 공급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한국의 시위가 벌어진 다음엔 9일 미국 뉴욕과 애리조나에서 같은 시위가 이어졌다. 언어는 다르지만 세계의 시위대는 다 함께 외쳤다. “이윤보다 생명!” 윤씨에게 이것은 추상적 슬로건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이다.

그는 푸제온 때문에 울고 웃었다. 윤씨는 2000년 3월 HIV 양성 판정을 받았다. 불행히도 발견 당시부터 HIV 감염인 건강의 지표가 되는 면역수치가 낮았다. 게다가 에이즈 치료를 시작하고 3년이 지난 2004년엔 에이즈 약에 내성이 생겼다. 에이즈 환자는 세 가지 약을 함께 쓰는 병행요법(칵테일 요법)을 사용하는데, 2004년 초 국내에 들어온 모든 에이즈 약에 내성이 생겨버렸다. 에이즈 치료제가 면역력을 지켜줘 다른 질병의 감염 가능성을 줄여줘야 하는데, 기존의 치료제가 더 이상 듣지 않게 된 것이다. 방법은 한 가지, 새로운 치료제를 쓰는 것뿐이었다. 보험이 되지 않는 치료제를 온전히 자신의 부담으로 외국에서 구입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기초생활수급권자에게 나오는 생계비 30여만원. 한 달에 수백만원에 이르는 약값을 지불하며 외국에서 약을 수입해 먹을 형편이 아니었다. 다행히 그가 사는 HIV 감염인 쉼터의 수녀가 주한 외국인 대사 부인 모임의 후원을 주선해 1년치 약값 840만원을 후원받았다. 그렇게 에이즈 치료제 ‘테노포비어’를 복용했지만 1년이 지나 후원이 끊겼다. 2005년엔 방법이 없어 다시 예전의 약을 먹었지만 내성 때문에 듣지 않았다. 면역수치는 한 자리 숫자로 바닥을 쳤고, 면역이 약해져 생기는 ‘기회 감염’이 이어졌다. ‘거대세포 바이러스’가 대장에 생겨서 하루에 12번이 넘게 설사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급기야 2006년 11월 거대세포 바이러스가 신경계로 침투해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다. 그렇게 상황이 악화돼 의사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리고 거대세포 바이러스가 망막으로 퍼지면 실명할지 모른다는 소리도 들었다.

불길한 진단은 현실이 되었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집에서 쉬는데 거대세포 바이러스는 망막을 덮쳤고,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나중에 왼쪽 눈의 망막도 떨어져 실리콘으로 고정했다. 이제 그는 돋보기 안경을 써야 겨우 글자가 보이고, 어두운 밤에는 혼자 외출하기도 어렵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 빠진 그를 위해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활동가들이 후원의 밤을 열었다.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한 달에 200만원이 넘는 거대세포 바이러스 치료제 ‘포스카넷’을 사용했다. 하지만 포스카넷 내성마저 생겨 언제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아찔한 시간이 있었다. 여전히 방법은 하나, 새로운 에이즈 치료제로 면역력을 회복하는 것뿐이었다.

“한 병에 3만원 이하는 안 돼”

어렵게 투병하는 그에게 희소식이 들렸다. 미국의 에이즈 구호단체 ‘에이드 포 에이즈’(AID For AIDS)에서 푸제온을 무상으로 후원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가 대표로 있는 나누리+ 친구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2007년 10월부터 푸제온을 복용했고 두어 달이 지나자 한 자리 숫자를 맴돌던 면역수치가 200까지 올랐다. 면역력이 강해지자 거대세포 바이러스도 활동을 멈췄다. 그래서 한 달에 200만원의 경제적 부담과 매일 혈관주사를 맞는 고통을 안겼던 ‘포스카넷’ 주사도 끊을 수 있었다. 그는 “정말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만 같았다”고 돌이켰다. 그야말로 기사회생, 그는 푸제온 덕분에 그렇게 살아났다. 현재까지 그는 8년의 에이즈 투병 기간 중 가장 높은 면역수치를 유지하고 있다. 걷기조차 힘들었던 그가 하루 종일 집회에 참가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지만, 그는 푸제온을 만드는 로슈를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

에이즈 약값 문제는 이제 인권의 문제가 되었다. 10월7일 집회에 참가한 사회단체 활동가.

에이즈 약값 문제는 이제 인권의 문제가 되었다. 10월7일 집회에 참가한 사회단체 활동가.

시계는 2004년으로 돌아간다. 한국로슈는 2004년 5월 새로운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의 시판 허가를 받았다. 기존의 에이즈 약에 내성이 생긴 환자에게 쓰는 푸제온은 치료에 반드시 필요한 의약품인 ‘필수약제’로 지정됐다. 로슈는 푸제온 한 병에 4만3234원을 요구했지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2004년 11월 한 병당 2만4996원(연간 약 1800만원)으로 약값을 정했다. 하지만 푸제온은 4년이 지난 오늘에도 국내에서 유통되지 않고 있다. 로슈가 한 병에 3만원 이하로는 푸제온을 국내에 공급할 수 없다는 정책을 고수하는 탓이다. 로슈가 2005년과 2007년 푸제온의 보험약가를 올려달라는 조정신청을 했지만 협상은 결렬됐다. 푸제온을 필수약제로 지정해놓고도, 정부는 그 판매를 강제할 방법이 없다. 물론 의료운동 단체와 인권운동 모임은 꾸준히 푸제온의 공급을 요구해왔다.

윤씨는 “2004년부터 에이즈 치료제에 내성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푸제온이 공급됐다면 실명도 하지 않고 생명의 위협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로슈가 요구하는 가격은 기존의 에이즈 치료제 중에서 가장 비싼 약제의 2배에 이르는 액수다. 에이즈 환자는 푸제온 외에 다른 치료제를 함께 쓰는 병행요법을 써서 한 해에 3만~4만달러의 약값이 든다. 그래서 서울의 집회 참가자들은 외쳤다. “1년에 푸제온 약값만 2200만원, 국민소득 2만달러보다 비싼 약이 약이냐!”

다행히 한국 정부는 비록 후불제지만, 에이즈 환자의 약값을 전액 지원한다. 하지만 비싼 약값의 부담은 고스란히 의료보험 재정으로 이전된다. 대한에이즈학회는 2007년 말 현재 국내에 유통되는 에이즈 약에 내성이 생긴 환자를 88~138명으로 추정했다. 내성이 생긴 환자에게 푸제온을 투여할지 여부는 의사의 판단을 거쳐야 하지만, 내성이 생긴 환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푸제온의 잠재적 투약자로 추정된다. 푸제온을 해외에서 공급받지 못하는 ‘윤가브리엘들’이 존재할 가능성은 상당한 것이다.

로슈의 반박도 있었다. 스위스의 로슈 본사는 10월1일과 6일 두 차례 ‘로슈 규탄 국제공동행동’에 반박하는 성명서를 ‘액트 업 파리’에 보냈다. 성명서에는 “한국 정부와 약가 협상을 계속하고 있으며 만족스런 합의에 도달할 것으로 믿는다” “로슈가 한국정부에 제시한 가격은 발전된 나라에 푸제온을 공급하는 최저가격 수준이다” “한국의 감염인 단체·활동가와 대화할 의지가 있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나누리+ 등 ‘로슈 규탄 국제공동행동 한국참가단’은 로슈의 성명에 재반박했다. 이들은 “이미 로슈 본사에 보내는 성명을 통해 한국 활동가 두 명의 전자우편 주소와 전화번호를 전달했는데도 로슈는 우리에게 연락하는 대신에 액트 업 파리에만 성명을 보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로슈가 한국의 푸제온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약 없어 죽는 아프리카’ 남 일 아냐

지난 7월3일 윤가브리엘씨를 포함한 한국의 활동가들과 한국로슈 대표이사의 면담이 어렵게 성사됐지만, 이견을 좁히진 못했다. 결국 윤씨는 9월25일 ‘로슈의 푸제온 공급 거부를 방관한 보건복지가족부의 건강권·생명권 침해 진정’을 국가인권위원회에 냈다. 윤씨는 진정서에서 “강제 실시 등의 방법을 동원해 환자의 생사 위협을 구제하려 하기보다 복지부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제 실시는 특허권을 가진 주체의 동의가 없더라도 특허권을 강제로 정지하는 제도다. 심지어 미국도 9·11 테러 직후 독일 바이엘사의 탄저병 치료제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바이엘사의 특허권에 대해 강제 실시를 한 바 있다. 변진옥 나누리+ 활동가는 “한국의 특허법은 미국보다 철저하게 특허권을 보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병에 불과 5천원, 로슈의 푸제온 요구가와 보험가의 차이다. 그런데 왜 4년이 넘도록 타협점을 찾지 못했을까. 권미란 나누리+ 활동가는 “한국의 약값이 아시아 약값의 기준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로슈가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국 쪽은 푸제온 가격을 높게 책정할 경우 앞으로 들어올 에이즈 신약의 가격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판단해 5천원 인상도 꺼린다. 무엇보다 다국적 제약사엔 구매력 강한 미국과 유럽 시장이 중요하다. ‘국제공동행동 한국참가단’이 10월9일 발표한 성명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로슈의 지도에는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라카·동유럽이 없다. 우리의 지도에는 전세계 4천만이 넘는 감염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있다. 전세계 감염인의 90% 이상이 살고 있는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동유럽이 선명하다.” 이렇게 세계는 구매력이 있는 생명과 구매력이 없는 생명으로 나뉜다.

10월7일 집회에서 윤가브리엘씨는 호소했다. “전세계적으로 한 해에 에이즈 환자 210만 명이 숨집니다. 하루에 5700여 명, 1분에 4명이 숨진다는 말입니다. 지구에서 전쟁이나 테러로 숨지는 사람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더구나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등에서는 대부분 에이즈 때문에 죽기보다는 에이즈 약을 먹지 못해서 숨집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머나먼’ 아프리카만의 현실이 아니다. 환자복을 입고 외치는 그의 옆에는 유엔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 12조를 새긴 피켓이 서 있었다. ‘1항. 규약의 당사국은 모든 사람이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향유할 권리를 가지는 것을 인정한다. 2-(d)항. 질병 발생 때 모든 사람에게 의료와 간호를 확보할 여건의 조성.’ 1990년 이 규약을 비준한 한국 정부는 규약을 준수할 의무를 지닌다. 생명권은 기본권이다.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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