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노동자들의 기나긴 일본 원정투쟁이 승리를 거뒀다.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일본인 투자회사 한국수미다전기(대표 구시노 고이치)의 폐업 철회를 요구하며 일본 도쿄의 본사 건물 앞에서 6개월 동안 노숙을 하는 눈물겨운 투쟁을 해온 수미다전기 노조 간부 4명은 폐업 238일 만인 지난 8일 밀린 임금 등 3억9600만원을 받아내는 대신 마산공장 문을 닫는다는 회사 쪽의 제안에 합의함으로써 긴 투쟁의 막을 내렸다.”
1990년 6월12일 은 사설에서 이렇게 전했다. 1987년 민주노조가 결성된 뒤 감원을 시도해온 일본계 업체 수미다전기는 1989년 10월14일 팩시밀리 1장으로 ‘도산 및 해고’ 통지를 보냈다. 임금과 퇴직금을 떼먹은 사장은 일본으로 달아났다. 이른바 ‘자본 철수’다. 정현숙 당시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4명의 노동자가 그해 11월15일 일본으로 건너가 단식농성 등 끈질긴 싸움을 이어갔고, 일본 시민사회의 지원 속에 ‘작은 승리’를 일궈냈다.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장시간·저임금 노동으로 한국 노동자들의 고혈을 빨았던 ‘외국자본’의 철수가 꼬리를 물었다. 수미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한창이던 1990년 봄 경기 부천의 전자부품 생산업체 한국피코의 노동자 100여 명도 미국 자본의 급작스런 철수에 맞서 투쟁의 날을 벼렸다.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피코 아줌마들’로 불린 피코노조는 두 차례나 대표단을 미국 뉴욕의 본사로 보내 장기간 원정투쟁을 벌이면서 사회적 반향을 불렀다. 피코노조 법규부장을 지낸 최만정 민주노총 충남본부 사무처장은 “미 현지에서 법정 다툼이 길어지면서, 결국 공장에 남아 있던 제품을 처분해 체불임금의 일부만 건진 채 2년여 만에 싸움을 접어야 했다”고 말했다. 은 1990년 7월11일치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노동부 등 관계 당국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자본을 철수하거나 휴업을 한 외자기업은 32개사로, △1987년 22개 △1988년 20개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외자기업이 밀집해 있는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경우에는 100여 개에 이르던 입주업체 수가 70여 개로 줄어들었다. 이같은 현상은 1987년 ‘외국인 투자사업의 노조 및 노동쟁의에 관한 임시특례법’이 폐지돼 외자기업에서의 노동운동이 자유로워진데다, 지난 3년간의 비교적 높은 임금 인상과 세금 감면 혜택 축소, 원화 절상 등으로 한국에 대한 투자 매력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피해’의 역사가 ‘가해’의 역사로 탈바꿈하는 데는 채 한 세대가 걸리지 않았다. 수미다와 피코 노동자들의 투쟁이 세상에 알려진 지 14년여 만인 지난 2004년 8월16일 필리핀 카비테주 로사리오 지역의 수출자유지역(CEPZ)에선 낯익은 풍경이 연출됐다. 필리핀 정부가 외자 유치를 위해 조성한 카비테 공단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한국계 의류업체 ‘필스전’의 노동자들은 이날 공장 안에서 노동조합 등록 선거를 치렀다. 찬성 277 대 반대 77. 숨죽이고 1년여를 기다려온 노동자들은 환호성을 울리며 노조 설립을 자축했다. ‘어제의 피해자’와 벌이게 될 기나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회사는 노조 설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합 설립 과정에서 “절차상 하자가 있다”며 현지 노동당국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며 시간을 끌었다. 마침내 2005년 11월19일 필리핀 노동부는 필스전 노동조합이 ‘유일하고 배타적인 단체협상권을 가진 노조’라는 결정문을 공표했다. 회사 쪽은 이 결정에 반발해 한 달여 만에 법원에 소송을 냈다. 필리핀 법원은 4개월여 만에 이를 기각했다. 그 새 회사 쪽은 엠마누엘 바티스타 노조위원장을 해고했고, 법정 다툼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조의 단체협상 요구를 철저히 묵살했다.
그러던 2006년 8월 말 회사는 두 차례에 걸쳐 조합원 63명에게 사전 통보도 없이 무기한 ‘강제 휴가’를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사실상 해고나 다름없었다. 노조는 그해 9월1일 파업 찬반 투표를 실시해 204명의 조합원 중 179명의 찬성을 얻어 파업을 결정했다. 협박과 회유에도 노조가 같은 달 25일 파업에 들어가자 회사 쪽은 이틀 만에 현지 경찰과 경비용역 업체를 동원해 파업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했다. 흩어진 노동자들은 다시 뭉쳤고, 같은 해 10월19일 또다시 농성장 철거와 함께 강제 해산 작전이 벌어졌다. 노동조합 간부에 대한 회사 쪽의 고소·고발과 ‘의문의 린치’도 잇따랐다. 한국에서 즐겨 쓰던 수법이다.
돌파구 없이 장기화한 파업은 노동자들을 지치게 했고 하나둘 파업을 접었다. 그럼에도 몇 사람 남지 않은 필스전 노동자들은 여전히 복직과 대화를 요구하며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해 11월 현지를 방문해 필스전 노조 지원활동을 한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필리핀 정부나 법원은 필스전이 외자 유치 기업이란 점 때문에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현지에서 만난 노동전문가들은 민사소송을 제기할 경우 최종 판결까지 10~20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외자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는 필리핀 당국은 필스전 사태가 ‘좋지 않은 선례’로 남겨지기를 원치 않고 있다. 현지에서 문제를 풀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불행한 역사가 장소를 바꿔 되풀이되고 있는 게다.
남의 땅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의 횡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자본은, 국경을 넘는 것을 종종 ‘자유’로 인식한다. 더 싼 임금, 더 열악한 노동환경, 그리고 노동조합 없는 세상을 찾아 오늘도 국적을 초월한 자본의 논리가 지구촌을 배회하고 있다. 한때 피해자의 나라였던 ‘신흥 경제대국’ 한국의 자본 역시 마찬가지다.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제사회는 이미 1970년대부터 고삐 풀린 다국적 자본에 재갈을 물리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윤효원 국제화학에너지광산일반노련(ICEM)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는 지난 9월25일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대회에서 내놓은 ‘노사관계 측면에서 바라본 기업의 사회적 책임 관련 국제기준’이란 제목의 발표문에서 이런 노력을 크게 3가지로 나눠 설명했다.
첫째, 유엔세계협약(글로벌 컴팩)이다. 세계협약은 1999년 1월 말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역설하면서 시작된 지구촌 차원의 캠페인으로, 인권·노동기준·환경·반부패 등 4가지 영역에서 10가지 원칙을 내걸고 있다. 2000년 7월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된 이래 지난해 말까지 120개 나라 4300여 기업이 참여하고 있는데, 사용자단체와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등 ‘이해당사자’까지 합치면 참가 단위는 5600여 개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도 2008년 8월 현재까지 세계협약에 참가하고 있는 기업과 단체가 모두 127개에 이른다.
최근 한국 관련 10건 중 7건이 ‘가해자’그러나 세계협약은 한계가 명확하다. 조약이나 협정처럼 법적 구속력이 없으니, 따르지 않아도 특별한 제재 수단은 없다. 곽노현 국제민주연대 공동대표는 지난 10월21일 열린 ‘다국적기업 관련 국제인권기준 국내 적용을 위한 워크숍’에서 “이른바 ‘자율적·자발적 규제’를 강조하는 건, 기업의 윤리적 행동이 가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법적으로 강제할 만큼 가치가 큰 것은 아니라는 말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모양내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둘째,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한 핵심 노동기준, 즉 8대 기본협약이다. 협약과 권고 형태로 만들어지는 ILO의 노동기준은 국내 노동법을 위한 모델 역할을 한다. ILO는 187개 협약 가운데 노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8개를 △결사의 자유와 단체 교섭권 △강제노동 폐지 △아동노동 철폐 △작업장 차별 폐지 등 네 부문으로 나눠 ‘기본협약’으로 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는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강제노동 폐지 관련 4개 협약을 아직까지 비준하지 않고 있다. 기실 조약 비준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전체 노동자의 60%를 넘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결사의 자유 △단체교섭권 △동일노동·동일임금 △작업장 차별 등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마련한 다국적 기업 가이드라인(이하 가이드라인)이다. 애초 1976년에 처음 만들어진 가이드라인은 세계화의 진척과 함께 다국적 기업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지면서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에 따라 2006년 6월 서문과 정보공개·노사관계·환경·뇌물방지 등 10개 장으로 이뤄진 새로운 가이드라인이 채택됐다. 새 가이드라인은 역시 ‘권고’이자 ‘자발적인 원칙과 기준’일 뿐, 법적 강제력은 없다. 그럼에도 서문에서 “원칙과 기준은 (회원국의) 적용 가능한 법령과 합치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가이드라인 홍보와 이행 감시를 위해 국가별 연락사무소(NCP) 설치를 의무화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자율규제’의 허울은 버리지 못했지만, 분명 한 걸음 나아간 게다.
지난 1996년 12월 ‘세계화’의 열기 속에 OECD에 가입한 우리나라도 새 가이드라인에 따라 2001년 5월부터 NCP를 운영하고 있다. ‘외국인투자촉진법’에 따라 구성된 외국인투자실무위원회(위원장 지식경제부 차관)가 NCP 역할을 맡고, 실무는 지식경제부 투자정책과에서 처리한다. 하지만 출발부터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NCP 구성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다. 강연배 보건의료노조 정책국장은 “지식경제부 투자정책과는 외국자본 ‘유치’와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 지원을 주업무로 한다”며 “태생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증진과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구조”라고 비판했다. ‘현실’을 들춰보자.
OECD 노동조합자문위원회(TUAC)는 지난 1월9일 48쪽 분량의 보고서를 펴냈다. 지난 2001년 4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회원국 NCP에 제기된 가이드라인 위반 관련 진정 사건을 분석한 자료다. TUAC가 보고서에서 집계한 한국 NCP 관련 사건은 모두 10건이다. 이 가운데 2001년 11월 스리랑카 자유무역지대노조연맹(FTZWU)이 현지에 진출한 한국계 ‘코스모스맥’이란 업체의 노조탄압을 고발한 것을 비롯해 2007년 9월 필스전 노동탄압 사건에 이르기까지 모두 7건은 해외에 진출한 한국 자본이 ‘가해자’였고, 한국에 진출한 스위스 자본 네슬레와 프랑스 기업 라파즈·테트라팩 등이 관련된 3건은 한국 노동자들이 ‘피해자’였다.
한국 NCP의 대응은 어땠을까? TUAC의 보고서를 보면, 코스모스맥 노조탄압과 관련해 한국 NCP는 “문제의 업체는 한국-스리랑카 합작회사”라며 “노조탄압은 스리랑카 쪽에서 자행한 것으로 한국 쪽 업체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회사 쪽의 입장을 그대로 전달하는 수준에 그친 게다. 2002년 2월 진정서가 접수된 과테말라 진출 한국계 의류기업 ‘최신/사마텍스타일’의 노조탄압 진정건은, 한국 NCP가 차일피일 시간을 끄는 사이 과테말라 정부가 업체 쪽에 “수출면장을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진정 접수 17개월 만에 단체협상이 체결됐다. TUAC는 “한국 NCP는 회사 쪽이 노동자들의 결사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았고, 이른 시일 안에 문제를 푸는 데 건설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한국 노동자들이 ‘피해자’인 진정건에 대해선 달랐을까? 2003년 9월 진정 접수된 네슬레 건을 살펴보자. TUAC는 보고서에서 “네슬레 쪽이 단체협상 과정에서 공장 이전 위협 등 ‘명백한 가이드라인 위반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한국 NCP는 노사협상이 타결되기까지 노조 쪽과 단 한 차례도 만나지 않았다”며 “반면 스위스 NCP는 네슬레 쪽에 압력을 행사하는 한편 한국 노동자들의 원정투쟁 때도 면담에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중재 활동을 벌였다”고 지적했다. 처연한 일이다.
‘천일의 투쟁’도 자본의 횡포를 꺾진 못했다. 10월21일 오후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선 경찰특공대가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을 강제 진압했다. 비슷한 시간 기륭전자가 단파 위성라디오 부품을 납품하는 미국 뉴욕의 시리우스 본사 앞에선 기륭전자 방미투쟁단이 삼보일배를 하고 있었다.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고, 노조를 만들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한다.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자본의 논리다. 가해의 탐욕과 피해의 아픔이 동거하는 땅,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는 건 부질없는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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