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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OTL] 국가유공자 가족 몰살 사건

등록 2008-06-27 00:00 수정 2020-05-03 04:25

한국전쟁 당시 국군으로 참전한 김은수씨, 한국 경찰에 가족 살해된 뒤 한 품고 산 58년

▣ 해남=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인권 OTL-30개의 시선 ⑨]

군번 K1105264. 김은수씨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7월11일 징집됐다. 스무 살이었다. 전남 해남에 살던 김씨는 보성을 거쳐 순천 15연대에서 신병 훈련을 받았다. 인민군의 남하 소식이 전해지면서 부대는 마산을 거쳐 부산으로 옮겼다. 훈련을 마친 그는 대구에 있는 유엔군 제1기갑사단 8연대에 배치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공산에서 인민군과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참호 속에 있던 김씨의 동향 사람은 인민군의 박격포 공격을 직격으로 받았다. ‘쾅’ 소리 뒤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뼈도 못 추스르고 나뭇가지에 그이의 살점만 붙어 있었다”고 한다. 무서웠다. 하지만 그는 나라에 목숨을 맡긴 군인이었다.

그가 사고를 당한 건 부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허허벌판 모래사장뿐이던 여의도와 마포를 거쳐 평양을 찍고 평안북도로 진격하던 때였다. 입대한 지 넉 달이 갓 지난 11월, 찬바람이 불었다. 앞서가던 물탱크 트레일러가 튀어오르는 듯하더니 뒤따르던 김씨의 가슴을 덮쳤다. ‘헉~’ 숨이 막혀왔다. 그는 마포에 있던 미군 야전병원을 거쳐 대구, 그리고 부산으로 후송됐다. 여섯 달가량 치료를 받고 제대하게 된 김씨는 계속 군에 남기를 원했다. 이등병으로 전역하기는 싫었다. 수원 비행장 경비를 맡던 13경비대대에 다시 배속받았다.

첫 휴가 나와보니 새까맣게 타버린 집

1952년 10월께 그는 첫 휴가를 명받았다. 식구들은 잘 있을까?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편지를 계속 보내도 답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통에 흩어진 건 아닐까? 2년 넘게 떠나 있던 집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 집 앞에 선 그의 숨이 턱 막혀왔다. 집은 꺼멓게 불에 타 있었고 할머니와 부모, 두 형과 형수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순간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가족의 숨통을 끊은 것은 한국 경찰의 칼빈 소총 혹은 권총이라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작은형은 김씨가 입대하던 날 경찰에 끌려갔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진도 갈매기섬에서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살해됐다. 어머니가 섬에 가서 주검을 수습했는데 한쪽 어깨를 찾을 수 없어 그 상태로 가져와야 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넓은 들을 갖춘 해남군 계곡면에는 대대로 농민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 심해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 운동이 활성화돼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해방 뒤 인민위원회에 몸을 담게 된다. 다른 지역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던 이들도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계곡면은 ‘해남의 모스크바’라는 별명을 얻었다. 소학교만 졸업한 김씨의 작은형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던 집안 형님을 따라 해방 뒤 반탁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1948년 5월에는 이 지역에서 남한 단독선거 반대 궐기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듬해 이승만 정부가 좌익 성향 인물들의 사상 전향을 유도하기 위해 창설한 관변 조직 보도연맹에 김씨 형은 의무적으로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붙들려가서 동향 파악을 당하는 ‘예비 검속’에 시달렸다. 전쟁이 나고 7월 말 인민군이 해남으로 진입하기 직전 국가권력은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 부역하리라고 보고 미리 몰살에 나섰다.

‘해남의 모스크바’에 들이닥친 ‘연좌제’

순천 김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김봉태(89)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우린 우익을 따라갈 수 없었어. 우리 마을의 우두머리가 좌익이었응께. 그러다 경찰이 들어오고 나서는 밤이면 달아났어. 집에 가 있지도 못해. 밤이면 경찰이 잡으러 다니고 걸리면 죽이려고 하니까. 낮에는 훤하니까 무자비하게 못했지. 달아나는 사람들을 보면 총으로 쏘고 그랬어. 나도 물 마른 깊숙한 도랑에 가족들이랑 숨어 있다 날이 새면 들어오고 그랬어. 뱀은 나와봐야 무섭지도 안 해. 사람이 무섭제.”

작은형이 처형되고 나자 ‘연좌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집안을 덮쳤다. ‘낮엔 한국 경찰, 밤엔 인민군’이 지배하면서 수시로 상대방에게서 선택을 강요받고 의심의 굴레를 벗기 어려운 때였다. 사람들은 인민군이 오면 “인민군 만세”를, 한국 경찰이 오면 “경찰 만세”를 외쳐야 했다. 당시 큰형은 인민군을 따라 산으로 올라간 뒤 이제껏 소식이 없다. 그 탓에 오늘내일 출산을 앞뒀던 형수도 경찰에 끌려갔고, 총에 맞아 숨졌다는 소식은 있었으나 주검은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 경찰이 마을에 불을 지른 뒤 나머지 가족들은 닭장에 기거했는데, 이듬해 1월 닭장까지 찾아온 경찰의 총탄에 할머니가 목숨을 잃었다. 어릴 적 어머니 젖이 부족해 배를 곯던 김씨를 위해 물레 품앗이를 하면서도 밥을 오물오물 씹어 입에 넣어주던 인자한 할머니였다. 김씨 아버지도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은 얼마 뒤 “시신을 수습해가라”고 통보했다. 함께 붙잡혀갔다 풀려난 어머니도 사흘 만에 다시 끌려가 세 발의 총탄을 가슴에 맞고 운명하고 말았다.

국군에 들어가서 목숨 걸고 인민군과 싸워온 김씨에게 국가는 철저한 배신의 쓴잔을 안겼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분노가 피어올랐으리라. “그 얘길 듣고는 황당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안 뵈었제. 지서를 찾아가 항의도 했어. 뭔 죄가 있어 (우리 식구들을) 죽였냐고. 느그가 안 죽여도 수복이 되면 검사국도 있고 재판부도 있고 한디, 거기 가서 해야지. 그랬더니 경찰들이 안하무인이여. 그 당시는 자기들이 안 있어서 모른다고 말이여. 미뤄분 것이제. 내가 그때 휴가 중이라 군복을 입고 갔는디, ‘총 하나 달라’고 그랬어. ‘뭣하려고 그러냐’고 그러기에 ‘느그들 다 쏴죽일라고 그런다’고 그랬제.”

1954년 7월1일 국군 일등중사(지금의 하사)로 전역한 김씨는 그제야 어머니의 주검을 찾으러 나설 수 있었다. 처형이 이뤄졌다고 들은 부락에 들어가 수소문했다. 몇 년 전에 이러저러하게 여기서 숨진 어머니를 찾는다는 말에 마침 밭 주인이 “콧등에 사마귀 난 분 아니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맞았다. 밭고랑의 흙을 살살 덜어내자 뼈만 남은 어머니 주검이 나왔다. 스티로폼 상자에 유골을 담은 김씨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무공훈장 받고도 ‘빨갱이 집안’ 감시당해

정나미가 떨어진 마을을 떠나려다 당숙모의 만류로 다시 자리를 잡아나갔다. 미군 구호품으로 집을 다시 지었다. “그래서 집이 허술하다”는 게 김씨 생각이다. 동네 저수지 축조공사에서 막일을 했다. 어릴 적 보릿고개 한 번 겪지 않을 정도로 먹고살 만한 집안이었으나 풍비박산의 대가는 혹독했다.

‘한번 빨갱이 집안은 영원한 빨갱이’라고 강변하고픈 걸까, 아니면 국가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개인의 기억을 지우도록 강요하고픈 걸까. 국가는 부끄러운 과거를 스스로 밝히지 못했다. 비겁했다. 되레 전쟁이 끝나고도 10여 년 동안 김씨 집 주변엔 경찰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혹시나 산으로 올라간 큰형이 찾아오지는 않을지 의심했던 것이다. “윗집에 살던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밤이면 어떤 사람들이 와서 몰래 엿듣더라고. 누군지 모르지. 근데 경찰 아니면 그럴 사람들이 없제.”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인근 마을 사람들은 ‘빨갱이 집안 출신’인 김씨를 놓고 뒷말을 했다. 무슨 얘기를 하다가도 김씨가 나타나면 얘기를 못했다. “나를 적대시하는구나….” 하지만 몇 다리 건너서 그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속닥임을 들을 수 있었다. 요즘에는 괜찮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김씨는 올해 설날 심장 수술을 받았다. 심장이 답답하고 무엇으로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동맥으로 관을 집어넣어 심장의 혈관을 넓히는 수술이었다. 전쟁 때 당한 사고가 마음에 걸렸다. 전역 뒤에도 완연히 성치는 않던 심장이 10여 년 전부터는 더욱 가슴을 죄어왔다. 인터뷰 내내 그는 ‘흠흠’ 하고 끊임없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장의 답답함에 호흡곤란을 겪는 탓이다.

그가 안방 시렁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하나 꺼냈다. 전역하면서 국방부에서 받은 무공훈장이었다. 열심히 잘 싸운 병사에게 국가가 표현한 고마움의 상징이다. 지난 4월25일 이명박 대통령이 보내온 국가유공자증도 있었다. 증서엔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 유공자의 공훈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를 애국정신의 귀감으로서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해 이 증서를 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진실규명 결정과 국가 사과 기다릴 뿐

그는 58년 전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할머니와 부모, 형들의 얼굴이 또렷이 떠오른다고 했다. 본인은 흰머리와 굵은 주름살에 덮였지만, 그가 기억하는 가족들의 얼굴은 젊을 적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한 번도 꿈에서 본 적은 없다. “꿈? 안 나와. 나는 꿈을 못 꾸어. 왜 그럴까, 잉? 이런저런 것 생각하면 기가 막히제. 나라에 얘기하면 뭣해? 제주 4·3도 있고 나 말고도 수만인디…. (명예회복을 위한) 법이 제정된다면 모를까….”

김씨 가족 사건을 포함한 한국전쟁 당시 해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 사건들은 6월24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이 나길 기다리고 있다. 이때 위원회는 국가에 사과를 권고할 수 있다. 받아들이는 건 국가의 선택이다.

◎ 연속기획의 제목인 ‘인권 OTL’은 좌절해 쓰러진 사람을 상징하는 이모티콘 ‘OTL’을 활용해 인권침해를 당한 사람들의 슬픔을 담았습니다. 제보와 문의는 syuk@hani.co.kr 혹은 02-710-0552로 해주시면 됩니다.



위기 맞은 ‘과거사 진상규명’

진실·화해 위원회 말려 죽이기?

경찰청 과거사 진상규명위는 2006년 9월 “한국전쟁 당시 1만7716명이 국민보도연맹과 관련해 처형당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학살의 주체는 경찰과 국군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국가기관이 보도연맹원 학살의 실체를 인정한 첫 사례다. 하지만 희생자 규모는 경찰의 기록만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수십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유가족의 주장과 상당한 거리를 보였다. 당시 한강택 경찰청 차장은 “국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개개인의 생명과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고, 아무리 전시라도 국가기관인 경찰과 군인이 적법한 사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공식 사과했다.
울산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추모식이 열린 올해 1월에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직접 사과를 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서 당시 국가 권력이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무고하게 희생당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는 이때가 처음이다.
하지만 4년짜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활동 기한이 이미 절반이 지나갔는데도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은 아직 20% 선에도 이르지 못했다. 법에 따라 기한을 2년 더 연장한다고 하더라도 접수된 사건을 모두 조사할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미지수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사 문제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한나라당이 행정부와 국회 권력을 장악하면서 진상규명 작업은 더 동력을 잃고 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행정안전부는 지난 5월 위원회의 재계약 대상 전문계약직 12명 가운데 3명의 정원을 줄이라고 통보했다. 설동일 진실화해위 사무총장은 “당시 실무선에서는 ‘그러려면 12명을 다 없애라’는 격한 반응이 나왔다”고 전했다. 지난 3월께에는 행정안전부에서 위원회에 파견된 5급 공무원이 사직했으나 정부는 결원 보충을 거부했다. 또 사직 등으로 그만둔 별정직 6명을 진실화해위가 신규채용하려고 하자 행정안전부는 파견직을 보내주겠다며 이를 말렸다. 16개 시도에서 1명씩 파견된 지방직 공무원 가운데 근무 기간이 끝난 인천시 쪽 정원 보충을 거부하는 데서도 이명박 정부가 과거사 문제 해결에 얼마나 소극적인지를 알 수 있다.
여기에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 가운데 하나인 과거사 관련 각종 위원회 통합 작업이 올해 정기국회에서 어떻게 진행될지도 관심거리다. 한나라당은 일단 진실화해위 등 13개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통폐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위원회 예산이 얼마나 줄어들지도 주목할 부분이다.
김동춘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진실에 대한 전 사회적 공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보도연맹 사건 등 집단 희생 사건에서 중요한 건) 일차적으로 사회가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아는 것입니다. (유가족) 본인이 당당하게 사회에 커밍아웃을 할 권리를 가져야죠. 그러려면 진실규명이 철저히 이뤄져야 하고 그 결과가 충분히 공개돼야 하고요.”



[인권 OTL-30개의 시선]

① 쓰린 새벽의 아이들
② 아이들의 끔찍한 SOS
③ 시퍼런 가위와 금속탐지기, 무서운 학교
④ 내가 10대 레즈비언이다, 어쩔래?
⑤ 인간답게 죽고싶다
⑥ “난 네가 병원에서 한 일을 알고있다”
⑦ 장애인에게 ‘퇴소 협박’하는 복지시설?
⑧ 전.의경은 ‘현대판 노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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