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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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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OTL] 연금생활자는 돼야 올림픽도 간다


2008 장애인올림픽 출전 선수들의 남모를 고통… 정부는 체계적 지원 외면하다 대회 때만 생색 내
등록 2008-09-23 15:00 수정 2020-05-03 04:25

햇살이 따가운 날이었다. 출발대에 선 김규대(24) 선수는 고개를 숙인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홍석만(33) 선수에 이어 두 번째 주자로 나선 정동호(33) 선수가 바통 터치 구간을 앞두고 그에게 출발 신호를 줬다. 일반 육상의 계주에서처럼 후발 주자가 속력을 높일 때 바통을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고!” 신호는 짧고도 간결했다.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고개를 최대한 숙이고 휠체어를 밀었다. 중국 베이징 장애인올림픽 대회 8일째인 지난 9월14일 낮 12시40분(현지시각). 남자 4×400m 계주 T53/54(T는 트랙경기, 숫자는 하반신 마비의 장애정도를 의미) 1라운드가 열린 베이징 주경기장은 관중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펴지지 않던 낙하산, 그리고…

장애인 육상 계주는 바통이 따로 없다. 선수들이 손으로 휠체어를 밀어야 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후발 주자의 등을 치는 것으로 바통 터치를 대신한다.

장애인 육상 계주는 바통이 따로 없다. 선수들이 손으로 휠체어를 밀어야 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후발 주자의 등을 치는 것으로 바통 터치를 대신한다.

가속도가 붙지 않은 휠체어는 무거웠고 김규대 선수는 온몸으로 휠체어 바퀴를 밀어냈다. 서서히 속력이 붙을 때 정 선수가 김 선수의 등을 쳤다. 바통 터치였다. 장애인 육상은 두 손으로 휠체어를 밀어야 하기 때문에 바통이 따로 없다. 손으로 후발 주자의 등을 치는 것으로 바통 터치를 대신한다. 미국과 일본 선수 사이에서 2위로 바통을 이어받은 김 선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팔은 1위를 달리던 일본 선수보다 빨랐다. 200m를 지나 곡선 구간에 접어들었을 때 그를 따라올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1위로 유병훈(36) 선수에게 바통을 넘겼고 유 선수는 3분18초98을 기록하며 조 1위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결승 진출. 경기 직후 김 선수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가 다리를 다친 것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했던 그는 그해 1월 해군특수전여단(UDT)에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지옥훈련’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혹독했던 6개월간의 특수전 교육훈련을 모두 마쳤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있었던 고공강하 훈련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기분이 안 좋았어요. 컨디션도 안 좋았고, 꿈자리도 뒤숭숭했고.” 꼭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훈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원들을 태운 수송기가 강하 지점에 이르자 문이 열렸고 강하 신호에 맞춰 허공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낙하산이 펼쳐지기를 기다렸다. 거칠 것 없이 자유낙하하던 몸이 지상 1500m 상공에 이르렀을 때 펴져야 할 낙하산이 잠잠했다. 이상하다 생각하던 것도 잠시. 자신보다 먼저 뛰어내린 동료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낙하산 고장이었다. 보조 낙하산을 펼치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을 때 뒤늦게 낙하산이 펼쳐졌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낙하 속도가 빨랐다. 고개를 들어보니 낙하산 줄이 엉켜 있었다. 손을 써볼 도리도 없이 그 상태로 땅에 추락했다. 그는 당시 일을 회상하며 “꿈에 그리던 베레모까지 썼는데…”라고 말을 흐렸다.

그렇게 정신을 잃고 난 뒤 한 달여를 중환자실에서 보냈다. 군병원과 민간병원을 오가며 수술을 받았다. 사고가 나고 5개월이 지났을 때 군의관은 그에게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믿기지 않았죠. 내가 왜 휠체어를 타야 하냐고 생각했어요. 재활훈련을 받으면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신적으로 재활이 덜 된 거였죠.” 그렇게 병실에 누워 있을 때 우연히 TV에서 휠체어마라톤 중계방송을 봤다. 잠깐 보다 말고 채널을 돌렸다. 휠체어에 앉은 그들의 모습이 불편해서였다. “나는 그렇게 안 될 줄 알았으니까요.”

그렇지만 감각 없는 다리는 회복될 기미가 안 보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석 달이 지나서야 제 몸을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토록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막상 인정하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만나 어울리면서 잃었던 웃음도 하나둘 되찾아갔다. 그렇게 퇴원일은 다가왔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됐을 때 언젠가 TV에서 봤던 휠체어마라톤이 생각났다. 경찰공무원인 아버지에게 “휠체어육상을 해보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그가 입원하고 있던 서울 강북구 국립재활원의 사회복지사에게 그 말을 전했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병실로 손님들이 찾아왔다. 국가대표 휠체어육상 선수인 홍석만·유병훈·정동호 선수였다. 그들의 손에는 레이스용 휠체어가 들려 있었다. 2006년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생계 보장 안 돼 오래 버티지 못해

중국 베이징 장애인올림픽 남자 4×400m 계주 T53/54에 나선 김규대 선수가 트랙에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중국 베이징 장애인올림픽 남자 4×400m 계주 T53/54에 나선 김규대 선수가 트랙에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휠체어육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빠르게 달리기 위해 몸을 낮추다 보니 다리에 가슴이 눌려 호흡하기가 힘들었고 팔로만 휠체어 바퀴를 밀다 보니 손에는 매일 물집이 잡혔다. 그렇지만 즐거웠다. “못 걷게 되면서 다시는 땀 흘리고 심장을 뛰게 할 수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형들을 만나고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도록 달려보니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죠.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보통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그렇게 즐겁게 운동한 덕분일까. 그는 2년 만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올림픽이라는 한 무대에 섰다.

9월14일 남자 4×400m 계주 T53/54 1라운드가 끝나고 6시간이 지났을 때 김규대 선수는 다시 트랙 위에 올랐다. 결승전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중궈, 짜이오”를 외치며 중국 선수를 응원하는 중국 관중 속에서 홍석만·정동호·김규대·유병훈 선수는 휠체어 바퀴를 굴렸고 중국과 타이에 이어 3위로 골인했다. 동메달이었다. 그렇지만 그 기쁨도 잠시, 심판은 이들에게 실격을 선언했다. 이유는 바통 터치 라인 위반이었다. 김규대 선수는 “아쉽고, 안타깝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경기가 끝나고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어머니 배숙자(50)씨였다.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항상 잘 뛰어줘서 엄마가 힘이 난다”고 했다. 아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그런 엄마가 있어서 힘이 된다고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전해준 아들의 휴대전화 액정 화면에는 “내가 바라던 꿈의 무대”라고 적혀 있었다.

2008 베이징 장애인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는 모두 79명. 이 중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선수는 7명에 불과하다.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군대에서 사고로 장애인이 된 선수가 14명으로 2명의 비장애인 선수를 제외한 57명의 남자 선수들 중 무려 25%를 차지한다. 대표선수 중 상이군경이 특별히 많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휠체어펜싱의 김기홍(37) 선수는 안정적인 수입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그나마 군대에서 다친 사람들이 운동할 수 있는 조건이 좋아요. 그들은 적은 돈이지만 매달 연금을 받잖아요.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거나 병 때문에 장애인이 된 사람들은 운동하러 왔다가 오래 버티지 못해요. 생계가 보장이 안 되기 때문이죠.”

은행 대출 받아 국제대회 참가

군대에서 사고를 당한 군인은 장애등급에 따라 90만원에서 200만원의 생활조정수당이 나온다. 산업재해를 입은 사람들은 그들이 사고 전 받던 1일 평균임금에 따라 차이가 난다. 김기홍 선수는 매달 200여만원의 산재보험금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 돈으로 역시 장애인육상 선수인 부인 이윤미씨와 먼저 세상을 떠난 형의 두 아이들과 함께 생활한다. 저축은 꿈도 꿀 수 없지만 그는 “산재수당이 없었다면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0년 7월25일 자신이 일하던 공장에서 기계에 깔려 하반신을 잃은 뒤 2002년 부산 장애인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소집되면서 본격적으로 펜싱을 배우게 됐다. 그때만 해도 휠체어펜싱의 대표선수는 13명이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고 지금은 김기홍 선수 혼자 남았다. 그는 “올림픽에 나가려면 해외 대회에 출전해 성적을 내야 하는데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장애인 선수들은 많지 않다”고 했다.

장애인올림픽 대표선수들에 대한 지원은 2004년 아테네 장애인올림픽 전까지 보건복지부 산하 장애인복지진흥회에서 담당해왔다. 이 업무가 2006년 문화관광부 산하 대한장애인체육회로 넘어오면서 대표선수들에 대한 훈련수당과 훈련지원비는 이전에 비해 강화됐다. 그렇지만 이는 대표선수로 뽑혔을 때의 이야기다. 장애인 체육선수를 육성·지원하고 관리하는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에 선수들은 자비를 들여가며 스스로 올림픽을 준비한다. 또한 장애인 실업팀이 없어 대부분의 선수들은 생업과 운동을 병행하고 있다.


장애인올림픽에는 선수들만 장애인이 아니다. 장애인 기자들도 비장애인 기자들과 취재경쟁을 벌인다.

장애인올림픽에는 선수들만 장애인이 아니다. 장애인 기자들도 비장애인 기자들과 취재경쟁을 벌인다.

휠체어테니스의 황명희(41) 선수 프로필에는 소속란에 ‘개인’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소속팀이 없다. 대표팀에 소집되기 전까지 그는 훈련과 올림픽 준비를 모두 혼자서 감당했다. 이는 황 선수뿐만이 아니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한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비를 들여가며 올림픽 출전 티켓을 땄다.

황 선수는 1993년 1월 회사 난간에서 떨어져 척수장애를 입었다. 그는 다쳤을 때의 일을 물어보자 “별거 없었다”고 했다. 2m 되는 높이에서 떨어져 목과 허리를 땅에 부딪친 게 전부였다. 몸에서 피가 나지도 않았고 정신도 잃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병원으로 후송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회사 상사는 그렇게 떨어진 그를 소형차 뒷좌석에 구겨넣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때 입은 2차 부상으로 그는 영영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됐다. 장애인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퇴원하고 나서는 매일 술만 마셨다. “막 살았던 거죠. ‘이렇게 살아봤자 뭐 하나’ 싶었어요.” 그러던 중 재활치료를 받으며 장애인들도 테니스를 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촌오빠에게 테니스채를 선물받은 뒤 큰맘 먹고 테니스 코트로 갔다. 그렇지만 테니스장 쪽에서는 클레이코트가 패인다는 이유로 휠체어 출입을 못하게 했다. 순간순간이 도전이고 좌절이었다. 그때 서울 압구정 현대테니스코트의 유지곤 대표가 코트 하나를 장애인들을 위해 내주고 그들에게 테니스를 가르쳤다. “처음에는 공은 안 쳐주고 심부름만 시키더라고요. 그런데도 재미있었어요. 매일 술만 마시고 집에서 동생들과 싸움만 하다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니 숨을 쉬는 것 같았죠.” 테니스를 정식으로 배우면서 술을 줄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됐다. 운동하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니 가족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웃을 일도 많아졌다. 테니스에 빠져들자 새로운 세계가 보였다. 올림픽이었다. “테니스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줬어요.”

그 꿈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500만~600만원에 달하는 경주용 휠체어가 필요했고 유럽투어도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은행에서 500만원을 대출받았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스위스 등에서 열린 유럽투어 5개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국제대회 성적이 있어야 했고, 유럽투어에 참가하지 않으면 그 성적을 얻을 수 없었다. 대출은 매달 산업재해연금이 나와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연금을 쪼개서 적금을 넣었어요. 테니스 경기는 주로 유럽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미국에서 열려요. 돈이 많이 들죠. 적금한 돈으로 투어 다니고, 모자라면 대출받고. 다녀와서는 대출금 갚으려고 허리띠를 졸라맸지요.”

평소에 무관심하던 정부가 그들에게 관심을 보일 때는 올림픽처럼 큰 대회가 있을 때뿐이었다. 대표팀에 소집되면 매일 3만원의 훈련수당과 2만6천원의 급식비, 2만원의 숙박비가 나왔다. 변변한 선수촌이 없어 전국을 떠돌며 합숙훈련을 해온 이들에게 이 지원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더욱이 이들은 비장애인과 달리 이동이 불편했다. 모텔과 식당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공간이 없어 휠체어로 언덕을 오르내리며 근력을 키웠다.

생업 포기하고 참가한 올림픽

9월15일 장애인올림픽 휠체어펜싱 에페 남자 개인전에 출전한 김기홍 선수. 그는 이날 8강전에서 패해 4강 진출에 실패했다.

9월15일 장애인올림픽 휠체어펜싱 에페 남자 개인전에 출전한 김기홍 선수. 그는 이날 8강전에서 패해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장애인스포츠 강국인 영국은 복권사업을 통해 공공기금을 마련하고 이렇게 마련된 기금을 장애인 선수들을 지원하는 데 사용한다. 특히 스포츠클럽이 발달한 영국은 각 클럽 산하에 따로 마련된 장애인 스포츠팀들이 수백 개에 이른다. 장애인 선수들은 올림픽 대표팀으로 선발되기 이전에 이미 체계적인 교육과 지원을 받으며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다. 민간 기업들의 지원과 광고 활동도 활발해 장애인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거나 세계대회에서 성적을 내면 높은 수준의 광고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미국은 장애인올림픽 메달리스트들에게 포상금을 지원하지 않지만, 미국올림픽위원회의 상임기구인 장애인스포츠위원회와 주정부 그리고 민간이 미국 전역의 장애인 선수들과 장애인 스포츠를 지원한다. 미국의 강점은 민간 후원금의 규모가 정부의 장애인 예산보다 크다는 데 있다. 네덜란드는 유소년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체육 교육 프로그램에서 선두를 달린다. 주니어 장애인 스포츠 캠프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네덜란드는 장애인 스포츠 종목별로 세계 최고의 선수를 캠프로 초청해 캠프에 참여한 유소년들의 꿈과 의지를 자극한다. 또한 지루하고 반복적인 체육 훈련 대신 훈련에 게임을 도입해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리고 그 성과는 장애인올림픽을 통해 서서히 증명되고 있다. 지난 9월15일 휠체어테니스 남자단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일본의 구니에다 신고 선수와 그에게 아깝게 패해 은메달에 머문 네덜란드의 로빈 암메를라안은 모두 네덜란드 주니어 테니스 캠프 출신이다.

지난 9월15일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베이징 선수촌의 대한민국 시각축구 대표팀 숙소를 찾았을 때 스페인과의 경기를 끝낸 선수들은 숙소에서 소리 나는 공을 가지고 훈련을 하느라 분주했다. 10명의 시각축구 대표선수 중 비장애인인 골키퍼 2명을 제외한 8명의 선수들은 모두 앞을 볼 수 없다. 이들의 직업은 대부분 안마사다. 김정훈(33) 선수는 “우리는 맹인학교에서 안마 기술을 배웠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생업을 포기하고 이번 올림픽에 출전했다. 올림픽이 끝나면 이들은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이옥형(42·시각장애인) 시각축구 대표팀 감독은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이들을 기다려줄 업소 사장은 없다”고 말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이들이 생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올림픽에 출전한 이유는 뭘까? 김 선수는 “자유롭고 싶어서”라고 했다. “축구를 하기 전까지 우리에게 자유롭게 허용된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유일한 곳이 안마업소의 좁은 방들뿐이었죠. 그런데 축구를 하면서부터 달라졌어요. 필드에서는 마음껏 뛸 수 있고, 우정도 나눌 수 있잖아요.”

그는 “메달을 꼭 따고 싶다”고 했다. 시각축구를 국내에 조금이라도 알려 후배들이 좀더 좋은 환경에서 훈련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필드 위에서 자신의 경기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 유니폼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다만 “태극마크가 붙은 유니폼을 입고 필드를 달리는 모습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시각축구 대표팀의 유니폼에는 태극마크가 붙어 있지 않았다. “태극마크를 달게 돼 자랑스럽다”는 그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작은 태극마크 하나 달아주지 않았다.


장애인 수영선수 스톡웰의 눈물
이라크에서 테러로 다리 잃고 재활
관중은 숨을 죽였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경기장에는 8명의 선수들이 힘겹게 물과 씨름하고 있었고,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또 한 번 생생하게 솟아올랐다. 온몸으로 물살을 받아내던 선수들 뒤쪽으로 흰 물거품이 낮게 일고 있었는데, 페드로 랑헬(멕시코) 선수의 뒤에서만큼은 그 물거품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힘있게 물을 차고 나갈 두 다리가 없었다.
지난 10월12일 오후 6시께 중국 베이징 장애인올림픽 남자평영 100m SB5(SB는 평영, 숫자는 1~9등급의 신체 장애 정도를 의미) 결승전이 열린 워터큐브. 경기 시작 전 랑헬이 모습을 드러내자 시끌벅적했던 관중석이 이내 고요로 가득 찼다. 휠체어에서 ‘두 손’으로 내려선 그에게 출발점에서 결승점에 이르는 100m라는 거리는 아득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1분34초69를 기록하며 누구보다 먼저 터치 패드를 찍었고 그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던 관중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국적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장애인올림픽에서 수영은 여느 종목과 달리 선수들의 몸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의수도, 의족도, 보조기구인 휠체어도 없다. 양 팔꿈치와 무릎 아래가 모두 잘린 선수, 한쪽 팔다리가 모두 없는 선수, 하체가 없는 선수,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맨몸으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다리가 없으면 팔로, 팔이 없으면 다리로, 거침없이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뻗어나갔다. 그들은 물속에서만큼은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다.
2시간 뒤 여자 자유형 400m S9(S는 자유형을 의미) 결승전이 끝난 워터큐브에서 28살의 멜리사 스톡웰(미국)은 울고 있었다. 경기 내내 이탈리아의 세시 프란체스카와 선두를 다투던 그였다. 결승점을 20여m 앞뒀을 때 프란체스카가 앞으로 조금씩 치고 나왔고 스톡웰은 2위로 터치 패드를 찍었다. 5분9초89. 1위와 1초13 차이가 났다. 그러나 그는 금메달을 놓친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베이징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아쉬워하는 눈물이었다. “제 목표는 메달이 아니라 베이징에 오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 꿈을 이뤘고 경기하는 매 순간순간 행복했습니다.”
스톡웰은 4년 전까지만 해도 성조기가 그려진 수영복이 아니라 ‘미 육군’(US Army)이 새겨진 군복을 입고 있었다. 2002년 대학을 졸업하고 소위로 입대한 그는 2년 뒤 전쟁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은 이라크 바그다드로 파견됐다. 그는 그곳에서 군수물자를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폭탄테러를 당했고 왼쪽 다리를 잃었다. 사고 뒤 1년 동안 끔찍한 수술을 15번이나 경험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렇지만 죽음의 유혹은 끝내 삶의 의지를 꺾지 못했고, 재활훈련을 하면서 접하게 된 수영은 그에게 올림픽 출전이라는 꿈을 불러일으켰다.
“제 머릿속에는 온통 수영 생각밖에 없었어요.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이 수영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반대에요. 물속에서는 넘어져도 다칠 염려가 없잖아요. 그보다 더 좋은 점은 의족을 차지 않고도 남들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에요.”
땅보다 물을 더 좋아하게 된 그는 1년이 지났을 때 미국 국가대표 수영복을 입을 수 있었다. “꿈이 뭐예요?” 그는 “어느 자리에서든 전쟁의 고통으로 절단 장애인이 된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저는 불행하지 않아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후원: 푸르메재단

베이징(중국)=글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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