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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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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의 아이콘이 ‘희망’을 보다


이주아동·학생 인권 법안 발의, 매장에 의자 지급, 경비원 충원 결정 등 ‘OTL’이 돌아본 30회 성과
등록 2008-12-12 11:26 수정 2020-05-03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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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OTL’입니다. ‘오티엘’이라고 읽으시면 됩니다. 사람이 손으로 땅을 짚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꼴과 비슷하다 하여 ‘OTL’은 ‘좌절’의 다른 이름입니다.

‘인권 OTL-30개의 시선’이 30주 대장정의 막을 내렸습니다. 덕분에 저는 30주 연속 각종 인권침해 현장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죠. 학교 대신 일터로 향하는 이주노동자 자녀들의 쓰린 새벽(708호)을 보았고, 학교 옥상에서 비행기를 날리며 학교폭력에 항거하는 아이들(710호)도 만났습니다. 매일같이 자해를 하는 10대 레즈비언(711호)의 눈빛도, 자립하고 싶은 중증 장애인들(730호)의 눈빛도 기억합니다. 기륭전자(725호), 아파트(726호), 방송사(734호) 등의 ‘비정규’ 삶 앞에 분노했고, 반지하(724호), 지옥철·만원버스(719호), 교소도(736호) 안에선 숨이 막혔습니다.

‘쓰린 새벽’과 ‘금속탐지기’를 막아라

오늘은 30회가 끝난 마당에 뭐 변한 것 없나 돌아보려고 합니다. 차가운 바닥에 오랫동안 꿇고 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세상을 둘러봤습니다. 좌절한 저를 일으켜주기 위해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우선 법안이 눈에 띕니다. ‘쓰린 새벽의 아이들’(708호)을 위해 미등록 외국인 자녀들도 국내 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안이 발의됐네요. 지난 8월5일 김세연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교육기본법 일부개정 법률안’과 ‘초·중등교육법 일부개정 법률안’입니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미등록 외국인이 보호하는 자녀 또는 아동의 학습권을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해 취학연령 당시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 아동·청소년에게 초·중·고등학교 입학을 허용하게 됩니다. 김세연 의원은 “우리나라가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라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는 부분에 대해 입법 발의를 한 셈”이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올해 안에 이 개정안이 통과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여야 간 마찰로 국회 상임위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법안 심의조차 들어가지 못했다네요. 김 의원은 “교육과학기술부 쪽에서 해당 법안에 대한 이해가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 하나의 법안은 학생 인권을 위해 11월3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초·중등교육법 일부개정 법률안’입니다. 법안은 학생 징계 때 의견 진술권·재심 청구권 보장, 육체적 체벌 금지, 0교시·강제 추가학습 금지, 두발·복장·개인 소지품 등 검사 금지, 각종 차별 금지, 인권교육·학생인권 실태조사 실시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법안이 통과돼 ‘시퍼런 가위와 금속탐지기, 무서운 학교’(710호)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에 절 일으켜세울 법안이 3개나 걸렸네요. 교과위 의원님들, 일루 와서 법안 넘기슈. 냉큼!

“앉아서 일하니 좋아요.” 세이브존 서울 노원점이 계산대마다 의자를 지급했다. 한 직원이 의자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앉아서 일하니 좋아요.” 세이브존 서울 노원점이 계산대마다 의자를 지급했다. 한 직원이 의자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현장에서 눈에 띄는 변화도 일어났습니다. ‘여성 노동자는 앉고 싶다’(720호) 보도가 나간 뒤, 한 백화점 관계자의 말로는 “바로 전 매장 실태조사에 나섰다”고 합니다. 7월22일 ‘서서 일하는 서비스 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국민캠페인단’이 발족한 건 이미 지면(726호 ‘여성 노동자에 의자를 캠페인 확산’)을 통해 말씀드렸죠? 지난 10월30일에는 노동부가 백화점·대형마트 사업주를 대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 건강보호를 위한 간담회’를 개최했고, 이후 각 사로 의자 지급을 권고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지난 11월6일 롯데백화점 노조와 회사가 의자 제공에 합의했습니다. 롯데백화점과 현대백화점은 12월 말까지 매장에 의자를 지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지급 범위는 아직 결정 못했다고 하니 앞으로 좀 지켜봐야겠습니다. 아직까지는 주로 계산대 직원들에게 의자가 지급되고 있습니다. 마산 대우백화점, 대구백화점, 세이브존 노원점 등은 계산대에 의자를 놓았고, 이마트와 홈플러스는 신규 매장에 의자를 놓는 구조의 계산대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최근 문을 연 이마트 안성점의 경우 앉아서 일할 수 있는 ‘V자형 계산대’를 도입했습니다. 정미정 민주노총 여성부장은 “의자가 계산원이 아닌 점원들에게는 여전히 제공되지 않아 확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제 쇼핑할 때 ‘이 매장이 판매 사원에게 의자를 지급했나’를 따져보는 건 어떨까요.

롯데·현대 “올해 안 의자 지급” 결정

‘감단직 노동 착취 현장, 아파트’(725호)가 소개했던 아파트 경비원 이광철(72·가명)씨도 좋은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김씨가 일하는 아파트는 11개동 1530세대 아파트에서 24명 있던 경비원을 지난해 3월 12명으로 ‘반토막’ 감원을 했었지요. 경비원 한 명이 두 동을 담당해 24시간 맞교대로 근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아파트 동대표들이 모여 “경비원을 충원하자”는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관리비 조금 아끼겠다고 경비원을 줄이니 택배 하나 받는데도 주민들이 불편했던 것이죠. 이씨는 “동료인 75살 최씨도 내년 3월 재계약 때 잘릴 것을 걱정하다가 충원 소식에 안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직 감시·단속직들을 옥죄는 저임금과 고용 불안, 열악한 노동 환경은 개선되지 않았지만, 이씨네 아파트의 ‘감원 후회’ 결정이라도 ‘경비원 감원’을 시도하는 다른 아파트에 알려졌으면 좋겠네요.

“비대위 활동을 계속하면 시설에서 퇴소 조처하겠다”는 공문이 붙었던 경기 김포시 석암베데스다요양원. 지난 6월 보도(714호)가 나간 뒤 딸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탈퇴했던 이민수(59·가명)씨가 돌아왔답니다. 7월31일에는 제복만 이사장이 물러났습니다. 비대위 회원들은 지속적으로 석암재단 비리에 맞서면서 장애인 활동보조금, 자립생활 등과 관련한 이슈에도 적극적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설’ 문제에서 시작해 ‘장애인 인권 전반’으로 운동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더 바빠졌지만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뭐니뭐니 해도 힘 나는 소식은 ‘연대가 강화됐다’는 소식이지요. 저를 일으켜세워 흙을 털어주고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촛불을 드는 ‘연대’ 말입니다. 지난 9월12일에 94일간의 단식을 끝낸 기륭전자 김소연 분회장. 탈모와 기억력 감퇴, 만성피로는 단식 후유증입니다. 그에게 힘을 주는 건 ‘촛불들’입니다. 11월28일 저녁 가산동 공장 부지 앞 문화제에는 200명이 모였답니다. 릴레이 단식을 해온 ‘함께 맞는 비’ 회원들, 촛불 네티즌, 한국작가회의, 이랜드일반노조, 한국합섬HK지회, IT산업노조, 금속노조, 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등이 함께했습니다. 12월15일엔 함께 주점도 연답니다(cafe.naver.com/kiryung). 촛불집회 진압을 거부해 징역 1년6개월형을 선고받은 이길준씨를 찾는 손길도 꾸준합니다. 11월 안양교도소로 이감된 그를 ‘촛불’들이 찾아옵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음 카페 ‘이길준과 함께하는 저항’을 통해 전·의경제 폐지 운동 고민을 나눕니다.

늘 ‘좌절’이었던 30주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돌아보니 힘이 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뭔지 아시나요? ‘좌절 금지’입니다. 제가 더 이상 무릎이 꺾인 채 살지 않도록, 사람이 더욱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힘써주세요. 인권은 절대 ‘좌절 금지’이니까요.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은 지난 5월 초부터 30회에 걸쳐 청소년, 장애인, 이주노동자, 빈곤층,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의 주류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치·사회·경제적 약자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이들의 인권 문제를 짚었습니다. 30회 연속 기획은 한국 언론 사상 처음 시도된 것입니다. 연재는 끝나지만 인권 문제에 대한 의 관심은 멈추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늘진 곳에서 억압받는 이들의 대변인으로서, 그리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의 확성기로서 발걸음을 묵묵히 내디딜 것입니다. 그동안 ‘인권 OTL-30개의 시선’에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끊임없는 제보 부탁합니다.
[인권 OTL-30개의 시선]
(1) 쓰린 새벽의 아이들
(2) 아이들의 끔찍한 SOS
(3) 시퍼런 가위와 금속탐지기, 무서운 학교
(4) 내가 10대 레즈비언이다, 어쩔래?
(5) 인간답게 죽고싶다
(6)“난 네가 병원에서 한 일을 알고있다”
(7) 장애인에게 ‘퇴소 협박’하는 복지시설?
(8) 전·의경은 ‘현대판 노예’인가
(9) 국가유공자 가족 몰살 사건
(10) 교도소 밖, 갈 곳이 없다
(11) 지옥철과 만원버스, 깨지 않는 악몽
(12) MB정부, 대체복무제로 반기문 발등 찍다
(13) 여성 노동자는 앉고 싶다
(14) 밥이 인권이다
(15) ‘이길준’들의 외침 “우린 정당하다!”
(16) 곰팡이 핀 주거권, 지상에서 살고싶다
(17) 기륭에서 죽어갑니다, 사람이
(18) ‘감단직’ 노동 착취 현장, 아파트
(19) 사회주의자를 잡아라, 거꾸로 가는 역사
(20) 간첩의 계절, 국보법이 회춘하다
(21) 연금생활자는 돼야 올림픽도 간다
(22) 우리 자립했어요
(23) 열세 살, 약한 어깨를 두드려준다면
(24) 약이 있는데 왜 죽어야 합니까
(25) 슈퍼맨에 맞서는 배트맨 판사들
(26) 싼 노동자 짓밟기, 돌고 도는 역사
(27) 공룡에게 먹힌 꿈, 막내작가 무한노동
(28) 욕망의 도시, 안마하는 사람들
(29) 사람 좀 살게, 교도소를 바꾸라
(30) 출발점부터 빚더미, ‘마이너스족’의 늪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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