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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OTL] ‘이길준’들의 외침 “우린 정당하다!”

등록 2008-08-05 00:00 수정 2020-05-03 04:25

촛불집회 진압 명령 거부한 이길준 의경, 4박5일간의 농성 마치고 경찰서로 향하기까지

▣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이상규 인턴기자 postdoal@hotmail.com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인권OTL-30개의 시선 ⑮]

헬멧 안에서 울었던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경찰로 향했다.

7월의 마지막 날, 촛불집회 진압 명령을 거부하는 양심선언을 했던 이길준 의경은 아니 청년은 5일의 농성을 끝내고 자신의 의지로 경찰서로 향했다. 그는 “새로운 저항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의 몸은 갇혔으나 양심은 자유를 얻었다. 은 그가 지독한 고민을 털고 마침내 안식을 찾았던 서울 신월동 성당의 농성을 줄곧 지켜보았다. 그곳엔 방방곡곡에서 온 남녀노소 ‘이길준들’이 있었다. 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달려온 시민 이길준, 그처럼 양심의 문제로 고민했던 전·의경 제대자 이길준…. 농성장에는 끝없는 이길준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젖과 꿀이 흐르는 농성장’이 된 성당

그곳엔 마을이 생겼다. 이길준씨가 우여곡절 끝에 양심선언 기자회견을 열었던 다음날인 7월28일 신월동 성당엔 어느새 ‘촛불 마을’이 생겨나 있었다. 성당에 들어가면 오른쪽엔 촛불집회 참가자들에게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는 ‘다인 아빠’의 밥차가 400인분의 삼계탕을 끓이고 있었고, 정면엔 냉커피·냉음료·냉수를 ‘공짜로’ 나누는 촛불 다방이 마련돼 있었다. 무엇보다 주민들이 있었다. 양심선언 소식을 듣고 방방곡곡에서 달려온 ‘시민 이길준들’이 양심선언을 한 이길준을 지키기 위해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이미 성당 주변엔 전·의경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이날 저녁 7시, 농성을 함께 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이용석씨는 “지금까지 (여호와의 증인을 제외한) 한국 병역거부자 30여 명에 대한 지지자를 다 합친 것보다 (이곳의 지지자가) 많다”고 말했다. 저녁 8시 촛불집회 시간이 가까와지자 성당 마당엔 벌써 200명이 넘는 ‘촛불들’이 모였다.

이날 성당 마당 한켠에 젊은 여성 대여섯 명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 카페 ‘화장발’의 회원들이었다. 광화문이 직장이라는 이지혜씨, 시청 인근에서 일하는 아이디 ‘호박 고구마’씨 등은 이길준 의경을 “용자”(‘용감한 사람’을 줄인 인터넷 용어)라고 표현했다. 이씨는 “예전에 인터넷에 한 전·의경 부대에서 대원들이 집단으로 촛불집회 진압을 거부한다는 얘기가 올라온 적이 있지 않느냐”며 “비록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간절히 그것을 원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무더운 여름날, 옆에서 더위를 식히던 여성의 부채에는 ‘촛불이 상상하면 현실이 됩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날 집회에는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이 참석했다. ‘촛불소녀 코리아’의 촛불소년 김현민(17)군은 “전경도 국민인데, 그동안 집회에서 국민끼리 싸워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며 “길준이 형의 용기가 이런 현실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예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집회를 기다리는 가족도 있었다. 자매인 이혜경(38)씨와 이연정(36)씨는 경기 김포에서 12살, 6살, 3살 아이들을 데리고 달려왔다. 언니 이씨는 “제2, 제3의 이길준씨가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했다. 곧이어 시작된 촛불집회엔 사회자의 발언과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섞이는 동네 잔치 같은 풍경이 연출됐다.

이날 집회엔 2003년의 ‘이길준’이 참석했다. 당시 이라크 파병에 반대해 부대 복귀를 거부했던 이등병 강철민씨가 이길준씨를 응원하기 위해 대구에서 올라왔다. 강씨도 당시 서울 기독교회관 708호에서 일주일간 농성을 벌였다. 그는 당시의 고민에 대해 “첫째는 부모님, 둘째는 여론, 셋째는 징역살이였다”며 “농성 중이지만 길준씨가 여전히 고민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당시에 견주면 방문자들이 훨씬 많고, 음식이 공수돼 오는 점이 다르다”며 웃었다. 이러한 ‘입장의 동일함’ 때문일까. 강철민씨와 대화를 나눈 이길준씨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들이 만났던 성당 지하의 농성장 냉장고엔 과일이 넘쳐나고 한쪽엔 라면 박스가 쌓여 있었다. 농성 기간에 아침은 성당 신도들이, 저녁은 인터넷 모임 ‘82쿡닷컴’ 회원들이 해결해주었다. 출판사 두리미디어는 농성단이 돌려 읽으라며 100여 권의 책을 기증했다. 이날 하루에 모금된 후원금이 113만원. 그리하여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농성장’으로 불렸다. 물론 세상이 그를 응원만 하지는 않았다. 이날 심야엔 동네 주민이라는 중년 남성이 찾아와 농성에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다. 다음 아고라에는 이길준 이경을 지지하는 글과 비판하는 글이 엇갈려 올라왔다. 이길준 이경이 입대 당시에 작성한 ‘나의 성장기’까지 인용하며 부대로 복귀하라고 하는 현직 경찰의 글도 있었다.

“양심자 지키러” 온 누나·동생·할머니…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7월29일 오후, 농성장엔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였다. 아예 집에도 가지 않고 이길준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었다. ‘막내’로 불린다는 탈학교 청소년부터 ‘어르신’으로 환갑이 넘은 할머니까지 4박5일의 농성 기간에 성당을 떠나지 않았다. 마음으로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막내’가 아프리카 방송 채팅을 통해 ‘수건이 부족해 머리를 못 감는다’고 하면 두어 시간 뒤 누군가 수건을 들고 농성장을 찾아왔다. 농성단 이용석씨는 “이길준씨의 병역거부 소견서를 영어로 번역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하면 이길준씨 지지 카페에 누군가 소견서를 번역해 올린다”며 신기해했다. 농성단에서 안전을 담당한 병역거부자 경수씨는 “성당에 계시는 촛불들이 그냥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 안전 포인트가 되는 장소를 찾아서 지키며 경비를 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농성단이 나서지 않아도 촛불들의 자율 순찰이 조직됐다. 이삼신(69) 할머니는 27일 저녁에 기자회견 소식을 9시 뉴스에서 보고 경기 성남에서 달려왔다. 그는 “양심자를 지키러 왔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4박5일 농성 기간에 잠시도 성당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긴 밤 지새우고’ 아침 이슬을 맞으며 농성장을 지키는 촛불들이 적잖았다. 이렇게 한국방송, YTN, 조계사 등 중요한 촛불집회 현장이나 농성장을 끈질기게 지켜온 이들이 속속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이날도 매일 저녁 8시에 열렸던 촛불집회 시간이 가까워지자 삼삼오오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임은정(36)씨와 정아무개(34)씨는 프로축구팀 전남 드래곤즈 서포터즈로 만났다. 전남 소속 김남일 ‘오빠’를 응원하다 만났지만 요즘엔 촛불 동지로 변했다. 마침 서울 한남동에서 일하는 임씨와 공덕동이 직장인 정씨가 이날은 성당을 찾기로 마음을 모았다. 예전엔 시위라곤 몰랐던 이들이 촛불집회에 나오면서 전·의경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임씨는 “처음엔 정말로 안쓰러워서… 성난 시위대에 쫓기는 전경을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그러나 7월의 어느 날 그들은 안스러운 마음을 접었다. “주말 새벽 3시 시위대 허리가 잘렸다. 우리가 잘린 허리 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주변엔 여성만 있었다. 전·의경이 우리를 쫓는데 시위대에 등을 보인 사람들이 많이 맞았다는 국제앰네스티 보고서가 생각나 그들을 똑바로 보았다. 그런데 전경들이 비무장 여성인 나를 발로 차고 지나가 상처가 생겼다.” 옆에서 얘기를 듣던 임씨도 “나도 거기서 방패에 얼굴을 맞아서 안경이 부서지고 부상을 당했다”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시위는 전경에 대한 ‘누나들’의 호의도 바꾸어놓았다. 정씨는 “이길준씨처럼 양심선언을 하라고 말하긴 어렵다”며 “그렇다면 촛불집회 진압에 나섰다가 제대한 전경들이 목소리를 내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이렇게 “전·의경에게 맞았다”고 말하는 촛불들이 이길준을 지키러 나왔다. ‘우아’(Woman Of Agora) 여성회 회원들도 갈비 한 상자를 들고서 농성장을 찾았다. 독산동에 산다는 50대 여성은 “어떤 갈비를 좋아하는지 몰라서 왕갈비, 떡갈비, 매운 갈비 골고루 싸왔다”며 이길준 의경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결국 20대 여성은 우아 여성회 ‘언니들’이 붙잡아서 농성장에서 밤을 보내고 직장으로 출근했다. 농성단 최정민 활동가는 “이렇게 밤을 새우고 화장하고 직장으로 나가는 이들이 있다”고 전했다.

“양심선언 하고팠다”는 선배들의 고백

이날도 저녁 8시에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참석자 가운데 이명박 정권 이후에 ‘존재’의 위기를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경기 부천에 사는 최영선(52)씨는 “6살배기 외손녀가 담도폐쇄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며 “의료보험 민영화가 된다면 집안 형편이 어려운 손녀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집회장 한쪽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서울 관악구에 산다는 60대 남성은 “내가 수급권자인데, 정권이 바뀐 뒤로 자꾸 보조금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노인도 “예전엔 장애인으로 인정해주다가 갑자기 진단서를 들고 오라고 하질 않나 살기가 점점 어려워”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날 집회에는 1968년 베트남전쟁 당시 병역을 거부했던 미국인 하유설 신부가 발언자로 나섰다. 그는 대체복무로 한국에서 평화봉사단 활동을 했다. 그렇게 한국과 인연을 맺은 하유설 신부는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을 지지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신월동 성당 신자들도 촛불집회에 함께했다. 신월동 성당 신자 최아무개씨는 “시내까지 촛불집회에 나갈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여기서 평화롭게 촛불을 드는 이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농성장에선 학교도 열렸다. 매일 저녁 7시에 열린 ‘이길준과 함께하는 저항, 릴레이 강연회’. 28일 정치경제학자 홍기빈씨, 29일 한홍구 교수, 30일 박노자 교수가 100여 명의 사람들 앞에서 촛불과 사회에 대한 강연을 이어갔다. 농성의 마지막 밤이었던 30일 저녁, 농성장을 찾는 이들 가운데 이길준씨 친구들도 있었다. 대학 선배 정대훈씨는 “이길준 의경이 아니라 길준이를 보러 왔다”고 말했다. 그는 “길준이는 무언가에 구애받기 싫어하는 보통 애”라며 “우리가 부담을 주기보다는 그를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길준에 앞서 이길준의 길을 고민했던 이길준의 선배도 있었다. 이길준씨의 대학 선배 박재혁씨는 2004년 의경으로 제대했다. 그는 현역 시절 이길준씨처럼 양심선언을 하려고 고민하고 실행에 옮길 준비도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진 못했다. 박씨는 “의경 복무 기간에 나는 내가 아니었다”며 “어느 소설의 문구처럼 ‘인칭 없는 중립적 주체’였다”고 돌이켰다. 1인칭, 3인칭, 무엇도 아닌 지워진 존재였던 것이다.

박씨처럼 전·의경으로 근무하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이들이 적잖다. 2005년 전경으로 제대한 손원진씨는 “한때 자살을 고민했다”고 돌이켰다. 한총련 계열 학생회 활동을 하다가 입대한 그는 국군 훈련소를 마치고 전경으로 강제 차출당했다. 대구지방경찰청 특수전투경찰대에 배치됐던 그는 2003~2004년 시위가 많았던 전북 부안에 주로 있었다. 핵폐기장 부지 선정에 반대하는 할머니들을 진압해야 했던 기억은 아직도 끔찍하다. 그는 “진압할 때 뒤에서 목을 잡고 움직이는데 앞에서 이동하지 않고 있으면 뺨을 맞고 발로 차인다”며 “전·의경에겐 매일매일이 전투 상황”이라고 말했다. 가상의 적을 상대로 ‘훈련’하는 군인과 달리 전·의경은 실제 진압을 하기 때문에 군기가 세고 구타와 가혹 행위도 잦다. 그 결과로 가혹 행위 등과 연관성이 깊은 자살자 비율이 군부대에 견줘도 높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6년 경찰청, 국방부 등에 권고한 ‘전·의경제 개선 권고안’을 보면, 1만 명당 자살자 수(2003~2005년 평균)가 전·의경 부대는 1.94명으로 육군 1.17명에 견줘 높다. 결국 손씨는 부대 내부에서 ‘진압 부적격 판정’을 받아서 행정업무를 했다. 그는 “내 사연이 알려지자 몰래몰래 찾아와 ‘나도 운동을 했었다’고 하는 사람이 부대원 180명 중에 5명 있었다”며 “이렇게 양심의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이 적잖다”고 말했다.

위헌법률심판제청 안 되면 헌법소원

2004년에 제대한 최재완씨는 삼중고에 시달렸다. 전경으로 근무했던 그는 시위대와의 물리적 충돌, 부대 안의 가혹 행위,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다. 당시 진보정당 당원이었던 그는 “전경만 아니면 된다”는 심정으로 입대했다. 하지만 그는 세 번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먼저 훈련소를 마치고 전경으로 차출되던 순간, 그래도 그는 행정일을 하겠지 위안했다. 하지만 다시 기동대로 배치되는 순간이 닥쳤다. 그리고 첫 출동에서 시위대와 맞서는 순간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그는 시위대의 주장에 공감하며 시위대를 막아야 하는 혼란에 시달렸다. 그는 “막상 옆의 전경 동료가 맞거나 하면 반사적인 반응이 나와 욕도 하곤 했다”며 “그렇게 폭력의 시간이 지나면 또 내가 왜 그랬나 자책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전주의 노동자 집회를 잊지 못한다. 이날 그는 시위대에 끌려갔다. 장비를 빼앗기고 구타를 당했다. 그는 “맞으면서도 차마 같은 편이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결국 그는 한쪽 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서 복귀했다.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돌아오니 이번엔 부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누군가 다치면 제대로 진압을 못했다며 부대 분위기가 험악해진다”며 “그렇게 다쳐서 몸이 아프고, 분위기가 험악해 마음이 아팠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부대와 시위대 사이에 끼어서 마음이 찢어졌다. 그는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전·의경이 아니라 그들을 움직이는 시스템이 문제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리고 “아직도 마음이 아파서 차마 ‘폭력경찰 물러가라’는 구호를 쉽사리 외치지 못한다”고 한숨을 쉬었다.

용기는 용기를 낳았다. 이길준 의경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전·의경 제대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전·의경 출신 진보신당 당원들은 8월2일 이길준씨가 조사를 받는 서울 중랑경찰서 앞에서 전·의경제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7월31일, 마침내 농성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농성을 함께했던 이들은 이길준씨가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의 심정은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한마디에 담겼다. 이길준씨는 기자회견에 앞서 과 한 인터뷰에서 “농성을 하면서 어려울 때마다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일이 중요했다”며 “농성을 통해서 선택을 굳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당당하게 법적 처벌을 받는 것도 저항의 한 방법”이라며 “이것은 또 다른 저항의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성당 마당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덕우 변호사(진보신당 공동대표)는 기자회견에서 “이길준씨에 대한 재판이 열리면 전투경찰제설치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만약 위헌법률심판제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헌법소원을 낼 계획이다. 지금껏 재판을 자청하는 전·의경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진행되지 못했던 헌법소원이 이길준씨의 결단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전·의경제도 폐지를 위한 연대’ 한홍구 공동대표는 “지금이 80년대도 아닌데 시대가 낳은 불효자가 아직도 나와야 하는 현실에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길준은 정당하다!” 4박5일 그를 지켰던 촛불들의 외침이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길준 의경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며 중랑경찰서 앞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현직 의경들과의 대화

“나도 진압하다 도망치고 싶었어”


▣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7월 어느 날, 촛불집회로 고생했다고 2박3일 ‘특별 외박’을 나온 현직 의경 8명의 술자리에 함께했다. 20~27살까지의 나이 분포를 지닌 이들은 대학 재학 중 입대했다. 이들은 서울의 한 경찰서에 복무하면서 최근 두 달간 촛불집회에서 때로는 후방을 지켰고, 때로는 시민들과 마주 서서 대치했다. 세종로 차도에 있는 시민들을 인도로 밀어내는 ‘쪼개기’를 하기도 했다. 사복과 함께 오랜만에 찾아온 자유를 느끼면서 술잔이 오고 갔다. 이야기는 이길준 이경에 대한 내용으로 옮아갔다.
A: 중랑서에서 한 명이 복귀를 안 했다며? 근데 그 친구 입대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이경이라며. 생활도 잘 모르고. 또 우리가 그렇게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을 한 건 아니잖아. 시민들 절대 때리지 말라고 명령도 내려오고.
B: 때릴 거면 절대 안 보이는 데서 때리라는 명령도 같이 내려오지. 언론 타면 안 된다고.
C: 사실 자기가 지원해서 온 거 아닙니까? 시위 진압하는 거 모르지도 않았을 텐데. 그냥 육군 가지 말입니다.
D: 난 몰랐어. 사실 조금 편하려고 왔지. 근데 처음 시위 진압 나갔을 때 나도 놀랐어. 이런 것도 하네. 얼마 전 촛불시위 전에 반FTA 시위 진압할 때는 도망가고 싶었고. 시위꾼들 말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할아버지들이 삽·곡괭이 들고 와서 서 계시는데, 표정에 고단·가난이 다 묻어 있더라고. 밀어내고 몰아내려니 마음이 아팠어. 그래도 달리 안 할 방법이 없으니까.
C: 거리 시위는 불법 아닙니까? 사람들이 차도로 나와 있으니까 ‘쪼개기’ 하는 거죠.
B: 중랑서가 빡빡한가? 마포도 옛날에 되게 심했다고 하잖아. 워낙 중대마다 지휘관이나 기율대원(중대에서 품행을 담당하는 고참)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니까. 우리도 저번 기율 때는 머리박기 같은 거 있었잖아. 그 친구 중대가 현장에서 진압을 심하게 했을 수도 있고. 지휘관이 터치 많이 해서 스트레스가 쌓여 있을 수도 있고.
E: 솔직히 시민들이 우리 신경을 살살 긁잖아요. 서 있는데 ‘뭐 니네라고 하고 싶어서 하겠냐’는 둥, ‘뭘 째려보냐’는 둥 자꾸 반말하고, 욕도 하고. 자꾸 그러면 열도 좀 받죠.
D: 왜곡도 해. 사람들이 ‘밀지 마’ ‘밀지 마’ 소리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저희는 안 밉니다’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갑자기 그 시민이 “의경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들도 밀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민다’고 말했다”며 ‘의경 동정론’을 퍼는 거야. 난 그냥 밀지 않는다고 말한 거였는데…. 당황했어.
A: 촛불집회에 건강하지 않은 시민도 많아. 자기가 외치는 말이 뭔 말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전경버스 끌어내고 돌 던지고. 나는 학교 다닐때 ‘진보’에 대한 존경이 있었는데, 이번 촛불집회 겪으면서 그런 게 사라졌어. 다들 대책도 없고, 자유발언을 하는데 좀 이상한 사람들도 많고 막무가내야.
B: 난 ‘유모차 아줌마’들 나왔을 때 너무 힘들었어. 우리도 아이들 상대로 진압할 생각이 전혀 없잖아. 차벽을 세우고 뭐 이런 건 임무인데, 아줌마가 유모차 세우고 서 있으면 ‘어쩌라고’ 이런 생각이 들어. 아줌마가 먼저 애를 볼모로 데리고 길에 나온 거잖아.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D: 어쨌든 의경은 사실 경찰 편하라고 있는 거잖아. 경찰 대신 바닥 청소하고, 온갖 잡일을 다 하지. 집회 때도 우리가 앞에서 방패받이 하지. 직업경찰들은 뒤에 있지. 의경 없앤다 그러면 경찰들이 절대 가만 안 있을 것 같아.



[인권 OTL-30개의 시선]

① 쓰린 새벽의 아이들

② 아이들의 끔찍한 SOS

③ 시퍼런 가위와 금속탐지기, 무서운 학교

④ 내가 10대 레즈비언이다, 어쩔래?

⑤ 인간답게 죽고싶다

⑥“난 네가 병원에서 한 일을 알고있다”

⑦ 장애인에게 ‘퇴소 협박’하는 복지시설?

⑧ 전·의경은 ‘현대판 노예’인가

⑨ 국가유공자 가족 몰살 사건

⑩ 교도소 밖, 갈 곳이 없다

⑪ 지옥철과 만원버스, 깨지 않는 악몽

⑫ MB정부, 대체복무제로 반기문 발등 찍다

⑬ 여성 노동자는 앉고 싶다

⑭ 밥이 인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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