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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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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가이거

치매 앓는 아버지의 사라진 삶 채우는 <유배 중인 나의 왕>
등록 2017-06-22 17:00 수정 2020-05-03 04:28

여기, 기쁨을 찾기보다 고통을 피하며 사는 게 더 유익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우선 그의 아들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보는 게 좋지 싶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어권 문학에서 주로 활동하는 작가 아르노 가이거. 그가 2011년 출간한 에는 이른바 ‘작가의 말’이 없다. 책 전체가 작가의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치매를 앓는 아버지에 대해 작가인 아들이 써내려간 10여 년간의 기록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삶의 한 부분을 채워나가면서, 동시에 자신은 결코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젊은 날을 기록으로 남겼다. 단연코 아버지에 대한 사랑만으로 시작한 글은 아니었다. 아르노의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였느냐면, 아들이 처음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이렇게 대꾸할 정도였다.

“코 후비던 손으로 시도 쓴다고?”

그의 이름은 아우구스트 가이거. 1926년 7월4일 오스트리아의 시골 마을 볼푸르트에서 태어났다. 농사짓는 부모 밑에서 10남매의 셋째로 자랐다. 그가 막 십 대에 들어섰을 때,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합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7살인 그 역시 군대에 징집되어 참전했다. 아버지, 형과 동생들도 같은 신세였다. 전쟁은 끝났으나, 그는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적군인 러시아 쪽으로 전력을 다해 달린 셈이다. 결국 포로로 잡힌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석방되었다.

19살,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와 면사무소 서기가 되었다. 매일 타자기를 투닥거리는 게 평생 그가 해온 일이다. 전쟁고아이자 열다섯 아래인 여교사와 결혼했으나 부부 사이는 원만하지 않았다. 강도 높은 행복 대신 자질구레한 고통마저 어떻게든 피해보려 애쓰는 그가 꿈꾸는 삶은 보통의 결혼생활이 가진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상의 규칙적인 흐름을 끊는 모든 행위, 이를테면 산책마저도 기피했으니까. 다시는 집을 그리워하며 살진 않으리라. 전쟁 중 그가 깨우친 건 집 밖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과거가 그를 버렸다

말하자면 그는 이런 사람이다. 두상이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해 어딘가 강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람. 외모와 달리 좀처럼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던 소심한 사람. 고향에 대한 애정이 넘쳐서 이웃들에겐 더없이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 집안에선 아내와 자식이 더 큰 세상을 꿈꿀까 두려워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사람. 우리가 익히 알고 겪은 ‘아버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

아버지란 모름지기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고 지켜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지금은 어떤 시절일까? 아내는 늘그막에 행복해질 가능성을 찾아 다른 도시로 떠났다. 그녀의 선택은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막 일흔이 된 아우구스트만이 그녀를 놓아주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과거에 헌신했다. 그러자 과거가 그를 버렸다. 치매가 그의 과거를 지워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옷을 뒤집어 입은 아버지, 냉동고에 양말을 보관하는 아버지, 전자레인지에 면도기를 넣어두고 온종일 찾는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아버지. 막 첫 책을 낸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덜떨어진 얼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유난히 어눌하고 별나다 싶은 행동이 사실은 치매의 징후였음을 알아차렸을 때, 아버지는 이미 중증환자였다. 공교롭게도 아들은 성공 가도를 달렸다. ‘코 후비던 손’으로 쓰는 글마다 호평을 받으면서 삶이 바빠졌다. 짬을 내어 아버지를 돌보고, 애인을 만났다. 애인의 불만은 커져가고 아버지는 대놓고 “넌 내게 한 번도 잘해준 적이 없어”라고 호통을 쳤다. 다행인 건 아버지가 아들인 그를 종종 동생으로 착각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어이없고 슬픈데 한편으로는 온당하게 여겨지는’ 이치는 이 시절의 주인공이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아들은 바쁜 와중에 아버지를 돌보러 주기적으로 고향을 찾는다. 아버지는 여전히 집에 있으면서 집을 그리워하고, 이웃들에게 그러했듯 식탁에 앉아 글을 쓰는 아들에게 다가가 다정한 말투로 부탁한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 도움이 필요하다고.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그러다가도 아버지는 간병인이나 자식들이 지나치게 도움을 주려 하면 당당하게 말한다. “아무것도 못할 만큼 내가 아주 멍청하진 않아.” 세상이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온 느낌이 드는 순간이라고, 아들은 썼다.

“기적은 없어, 하지만 징조는 보여”

아우구스트는 결국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의 삶에 대해 작가는 기록하지 않았다. 삶의 끝은 언제나 삶이다. 다만 주인공이 달라질 뿐. 병세가 악화될수록 과거는 지워지고, 한 시절이 심어준 아버지의 이성 역시 흐리마리 옅어졌다. 위험하기만 했던 세상도 잊혔다. 가난한 농사꾼의 부지런한 셋째아들 아우구스트 가이거의 천성만 남았다. 알고 보니 그는 다정하고 말재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예컨대 이런 말들. 어느 날 아들이 그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물었다. 그는 답했다.

“기적은 없어, 하지만 징조는 보여.”

대략 팔십여 년의 시간이 모두 휘발되고 그저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그의 말이기에, 그 말은 진정으로 옳게 여겨진다. 단 한 번의 기적 대신 헤아릴 수 없이 숱한 기적의 징조를 누리며 오늘을 살아가는 게 우리들 아니겠는가?

황현진 소설가*‘황현진의 사람을 읽다’는 소설가 황현진씨가 책 속에서 사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2주에 한 번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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