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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스틴 감옥’에서 탈출한 소녀는 지금

성폭력과 성착취에 맞섰던 ‘지워진 소녀’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의 ‘노바디스 걸’
등록 2026-03-05 21:17 수정 2026-03-08 14:54


전세계 고위층 인사들이 제프리 엡스틴을 통해 10대 소녀들을 성착취했다는 사실이 ‘엡스틴 문건’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고 있다. 2025년 10월 ‘엡스틴 파일 투명성법’이 통과되면서 미국 연방 법무부는 2천여 개의 동영상, 18만여 개의 이미지를 포함해 300만 장 이상의 문건을 공개했다. 이 여파로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동생 앤드루 마운트배튼 윈저는 왕자 칭호를 박탈당했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공개 사과했다. 빌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등 미국 전현직 대통령에게도 의혹의 눈초리가 쏠리고 있다.

그렇다면 ‘엡스틴 감옥’에서 성착취를 당한 뒤 탈출한 소녀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엡스틴 성폭력 생존자’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의 ‘노바디스 걸’(김나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은 바로 그 ‘소녀’가 직접 써내려간 처절한 생존기이자 고발장이다. 주프레가 고발을 시작한 건 무려 15년 전인 2011년이다. 주프레는 딸을 낳은 뒤 세상을 바꾸기로 결심했고, 음해와 살해 위협 속에서도 투쟁을 이어나갔다. 결국 엡스틴은 성매매·인신매매 혐의로 체포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프레는 세상을 바꿨다. 그러나 상처로 점철된 삶은 치유하지 못했다. 오랜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2025년 4월 그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엡스틴 일당에게서 자신을 구해낸 남편에게조차 가정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안타까움을 더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다. “왜 쇠창살 없는 감옥에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주프레는 솔직하게 답한다. 유년 시절 아버지와 지인으로부터도 성폭력을 당했다. 어머니는 외면했다. 집은 안식처가 아니었고, 방황기였던 10대에 남성들은 자신을 성적 도구로만 대했다. 엡스틴과 그의 연인 길레인 맥스웰은 ‘마사지 학교’를 보내주고, 집을 빌릴 돈을 주고, 때로는 예절도 가르쳤다. 빈곤과 학대 속에 외로웠던 소녀들은 그들을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 느꼈다. 그러나 가짜 부성애·모성애 뒤에는 언제나 강압적 복종 요구와 성착취가 따랐다. 주프레는 “어쩌면 이 포식자가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속였다”고 고백한다.

주프레가 엡스틴의 억압 속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느꼈던 순간을 적은 대목은 비애를 남긴다. 엡스틴이 벌거벗고 돌아다니길 강요했을 때도 그의 개인 요리사만은 주프레의 몸을 보지 않고 눈을 맞춰주었다.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본 뒤 피자를 구워줬다. 엡스틴은 소녀들이 마른 몸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피자를 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이 출간돼야 한다는 주프레의 당부대로 책은 세상에 나왔다. 그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유다. 656쪽, 2만7천원.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언어는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가

비오리카 마리안 지음, 신견식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2만원

사람들은 ‘한 명을 죽일 것인가, 다섯 명을 죽게 둘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는 ‘트롤리 딜레마’에서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답할 때 더 공리주의적 선택을 한다. 우리는 매일 말하지만 ‘말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언어와 마음의 상호작용을 연구한 ‘심리언어학’ 권위자인 저자가 언어가 정체성·창의력·감정조절력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준다.

 


탐욕스러운 돌봄

신성아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1만8천원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일하던 중 아이가 아파 일을 그만둔 저자는 돌봄계의 파우스트처럼 온갖 돌봄학을 섭렵했지만 불안했다. 육아 현실은 늘 책과 달랐다. 경쟁에 능숙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는 건 쉽지 않다. 모든 부모는 부모이기 전에 시민이기에 ‘내 아이’라는 영토 너머의 사회적 사유를 제안하면서, 획일적 돌봄 양상에 의문을 던진다.

 


만약 세상에서 까마귀가 사라진다면

마쓰바라 하지메 지음, 정한뉘 옮김, 나무의마음 펴냄, 1만9천원

죽은 동물을 먹는 까마귀는 아시아에서 불길한 동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까마귀는 그저 자신의 크기와 능력에 맞는 먹이를 먹은 것뿐이다. 까마귀는 다른 새보다 큰 열매를 먹고 먼 거리로 씨앗을 옮겨준다. 메뚜기떼가 창궐했을 땐 메뚜기를 먹어치워 농작물 전멸을 막았다는 역사적 기록도 있다. ‘까마귀 덕후’ 일본 도쿄대학 교수의 탐조 기록.

 


비인간 권력

닉 다이어-위데포드 외 지음, 안호성 옮김, 갈무리 펴냄, 2만4천원

인공지능(AI)은 노동을 해방하는 기술일까. 세 저자는 AI가 확대하는 것이 노동의 자율성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자율화하는 자본이라고 분석한다. AI가 마르크시즘에 따른 모든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생산의 일반토대’가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자본을 위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AI가 인간을 한물간 존재로 만들 ‘필연적 운명’을 피할 논의의 시작점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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