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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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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더, 더 원했다

‘성공한’ 알코올중독자의 결핍과 중독, 욕망에 관한 이야기 <굿 하우스>
등록 2018-05-29 15:08 수정 2020-05-03 04:28

의 주인공 힐다는 남다른 영적 감각을 지녔다. 타인의 과거 행적과 심리 상태를 알아맞히는 신묘한 능력, 이를테면 상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이 뭔지 쉽게 알아챈다. 그저 두 눈을 응시하는 것만으로, 슬쩍 쳐다보는 것만으로, 단번에.

힐다의 멀지 않은 조상 중에 마녀가 있고, 그의 고모는 심령술사였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은밀한 비밀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을 보았다. 타인의 삶을 예견하거나, 저주와 축복 받은 사람을 명징하게 구분했다.

동네의 유일한 부동산 중개자인 힐다의 신통한 능력 중 하나는, 누구 집이든 한번 들어가보면 그 집 사람들의 진실을 안다는 것이다. 침실에서 부부의 금실을 짐작하고, 화장실에서 가정불화의 기미를 느끼고, 부엌에서 우울의 징조를 읽는다. 굳이 집 안에 들어갈 필요도 없다. 길가에서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게다가 그는 토박이라서 동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훤히 꿰뚫고 있다.

알코올중독자라는 낙인

독심술의 트릭은 명확하다. 사람들은 자기가 특별하다는 말을, 자기의 미래에 밝고 행복한 운명이 기다린다는 말을 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힐다가 보기에 간단하고 분명한 진실은, 인간이 어떤 행동과 생각을 하고 어떤 두려움과 욕망을 품는지에는 변수가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지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혀보라고 제안하지만, 사실 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자신의 집값이 얼마나 오를지일 확률이 컸다. 힐다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어떤 기억을 자주 떠올리는지 알아맞히는 사람은 동네에 없다.

“나만 혼자다. 내 자식들은 다 컸고 애인 없이 지낸 건 하도 오래되어 햇수조차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외로워하는 건 그들이고, 나는 그들을 딱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힐다는 혼자 산다. 남편과는 이혼했다. 두 딸과는 떨어져 산다. 그의 대화 상대는 개 두 마리다. 얼마 전엔 알코올중독자센터에 다녀왔다. 딸들이 힐다의 인생에 ‘개입’한 결과였다. 딸들은 힐다의 직장 동료와 사위를 부른 자리에서 힐다가 엉망으로 취해서 저지른 짓을 낱낱이 고했다.

알코올중독자라니, 좀 취한 채로 돌아다닌 것뿐인데. 달에 한눈이 팔려 사소한 접촉 사고를 냈을 뿐인데. 하필 그가 들이받은 차가 경찰차였을 뿐인데. 눈물을 글썽이는 가족과 지인들에 둘러싸인 힐다는 어떤 항변도 못했다. 이런 나를 알코올중독이라 하다니, “이거 매우 흥미로운 관점인데”라는 말밖에는.

힐다는 한낮에 술을 마신 적도 없고, 혼자 술을 마신 적도 없다. 두 딸을 훌륭하게 키웠다. 술 때문에 자기 삶을 통제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억울했다. 동네에는 힐다보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그런데도 알코올중독자라는 낙인이 힐다에게만 찍혀서, 그가 와인잔을 잡기만 해도 모두 화들짝 놀라며 잔을 뺏어가려고 덤볐다. 힐다는 숨길 게 많다. 불행의 흔적을, 우울의 기미를, 고독의 그림자를, 지독한 술 냄새를, 잘나가는 부동산 중개인이지만 은행에 집을 빼앗길 자신의 처지를 집 안에 남겨둘 순 없는 노릇이니까. 누구라도 그의 집을 한번 둘러봐서는 절대 알 수 없도록 철저히 숨겨야 했다. 그는 컴컴한 지하실에 와인 한 상자를 숨겨두고 아무도 모르게 꺼내 먹었다. 큰 계약을 따냈거나 유난히 외로운 날이면 아예 지하실에 처박혀 마셨다. 스스로 축하하고 위로했다. 자기 자신조차 지하실에 숨겨버린 줄도 몰랐다.

이젠 “더, 더”라고 외칠 수 없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던 때가 그리워요. 그 순간에는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거든요.”

힐다는 항상 “더, 더”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술을 떳떳하게 마시지 못하니 애주가를 보면 기분이 좋았다. 노래 한 곡을 다 부르고 나서 더 부르자고 외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행복했다. 그것이 힐다가 가진 가장 신통한 능력이었다.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을 알아보는 눈.

그는 구두 없이 자란 구두수선공의 자식을, 텅 빈 냉장고를 기웃거리며 자란 슈퍼마켓 주인의 딸을 알아본다. 자신의 결핍을 잊을 수 없고, 슬프게도 그런 자신을 수치스러워하며 살면서 “더, 더”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알아본다. 하지만 이제 힐다는 사람들 앞에서 “더, 더”라고 외칠 수 없다. 혼자 마실 때도 너무 많이 마신 건 아닌지 자신을 의심한다. 누군가를 더욱 사랑하기엔 글렀을지도 모르겠다.

힐다의 능력은 사람을 사랑하는 데 유용했지만 돌아오는 사랑은 미미했다. 적어도 그가 느끼기엔 그랬다. 왜냐면 그에게 절대로 없는 능력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눈치채는 능력 말이다. 정신을 잃은 채 지하실에 누운 그를 깨우는 딸의 마음, 창밖에 시선을 빼앗긴 채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를 지켜보는 친구의 마음, 술 냄새를 풍기며 고객 앞에 마주 앉은 그를 걱정하는 동료의 마음을 짐작하는 능력이 힐다에겐 없었다.

응시 없이 이뤄지는 직시는 없다. 그가 자신을 오래 바라보았더라면, 슬쩍 쳐다보기만 했더라도 달랐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의 능력을 믿는다. 그러니 밝고 행복한 운명이 힐다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날이 곧 올 거다. 분명 온다.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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