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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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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형의 이름으로

비난받은 가족을 뒀다는 것,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  
등록 2018-04-17 10:12 수정 2020-05-03 04:28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아버지를 험담하면 듣기 싫었다. 아버지가 두고두고 욕먹을 짓을 했어도, 어머니가 아버지를 깎아내리는 소리는 듣기 괴로웠다. 명절에 할머니가 친척들 앞에서 어머니의 잘못을 트집 잡으면 참지 못하고 대들었다. 내가 듣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게 싫었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를 애 취급해서 그러는 걸 알면서도 싸울 듯 덤벼들곤 했다. 다 자라서도 어머니가 문득 너는 네 아빠를 닮았다고 하면 긴장했다. 아버지를 닮아 다행이라고 덧붙여도 미심쩍었다. 나를 아버지에 빗대어 나무라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허영과 가식으로 점철된 예술가

 욕과 비난의 말들은 오래 남는다. 가족 사이에 오갔던 비난과 욕들도 잘 잊히지 않는데, 집 밖에서 누가 가족을 욕하는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사이에 오간 말들이나 우리 중 누군가를 두고 한 말들이 여전히 내게 유효하게 작용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결국 나에 대한 비난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은 서배스천 나이트가 심장마비로 죽은 뒤, 그의 삶을 ‘탐사’하는 동생 V의 기록이다. 그들은 이복형제다. 부모는 일찍 죽어서 피붙이라 할 만한 가족은 서로뿐이다. 형제는 다정했지만 정작 함께 있으면 어색했다. 대화를 잇기 위해 할 말을 찾다보면 침묵이 길어지고, 작별 인사를 할 때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로 건넸지만 정작 연락을 주고받진 않았다. 자주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다. 형은 영국에서 그는 파리에서 살았던 탓도 있고, 어머니가 다르다는 사실이 불편했을 수도 있고, 여섯 살은 꽤 많은 터울이라 공유하는 기억의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V는 언제나 형을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했다. 유명 작가인 형의 책을 빠짐없이 읽으며 그가 여전히 천재라는 사실에 늘 감탄했다. 어머니가 다르다는 사실에 상처받기보단 아버지가 같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어쩌면 V는 형을 좋아했다기보다 그가 자신의 형이라는 사실을 훨씬 흡족해했을지 모른다.

“어찌되었건 네 마음에 드는 주제를 찾아서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그게 지겨워질 때까지 말이야.”

V는 어머니의 장례식 때, 형이 한 말을 두고두고 기억했다. 유일한 피붙이가 건넨 말이었으니까. V는 형이 죽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에 드는 주제가 서배스천 나이트, 즉 형이라는 걸 깨달았다. 형의 조언은 삶을 글쓰기에 비유한 것일 뿐, 글을 쓰며 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V는 형의 전기(傳記)를 쓰기로 결심했는데, 글을 써본 적도 없고 형을 알고 지냈다기보다 읽은 것에 불과해서 쓸 수 있는 말이 턱없이 모자랐다.

공교롭게도 형의 비서 굿맨씨가 먼저 전기를 완성했다. 은 모두의 찬사를 받으며 화제에 올랐다. 책에 따르면 서배스천은 허영심이 강해서 아침에 목욕할 때마다 프랑스 향수 반병을 붓고, 자신의 책에 대한 기사를 값비싼 앨범에 붙여 보관했다. 완벽한 가식쟁이여서 진실을 밝히는 선언문이나 부당함을 규탄하는 일에 동참해달라는 요구는 항상 단칼에 거절했다. 굿맨씨에게 서배스천은 실패한 인간, 실패한 예술가였다. 절대로 위대한 작가라고 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수치는 남겨진 그의 몫

V는 책의 내용을 믿지 않았다. 굿맨씨가 돈에 눈이 멀어 지어낸 이야기라고, 진짜 서배스천의 이야기는 자기 손에 달렸다고 확신했다. 그가 알고 있는 형은 거리에서 만난 거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동시대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에 냉담하기는커녕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재난도 현재의 불행과 같은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형에게 덧씌워진 오명을 벗겨내기 위해서라도 V는 한시바삐 전기를 완성해야 했다. 그러려면 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그의 연인.  

서배스천의 연인이던 헬레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서배스천은 헬레네에게 천박하고 허영심이 많다고 독설을 퍼부었으며, 자기감정과 생각에만 빠져버린 나머지 현대의 책은 전부 쓰레기고 현대의 젊은이들은 죄다 바보라고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자신을 치켜세웠다. 헬레네의 친구들을 못마땅해하면서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느닷없이 찾아와 매달렸다. 헬레네가 보기에 서배스천은 지적 우위를 내세우며 여자를 구속하는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V는 형의 전기를 쓰는 일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대로 썼다가는 굿맨씨의 전기와 다를 바 없는 책이 될 게 뻔했다. 그보다 못한 책일 확률도 컸다. 돌이켜보면 오래전 V의 어머니가 서배스천에 대해 했던 말이 가장 사실에 가까웠다.

“항상 서배스천을 모르겠다고 느꼈지. 학교에서는 좋은 성적을 받고,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고, 청결한 습관이 있고, 폐가 그리 튼튼하지 않은데도 꼭 아침 찬물로 목욕을 한다는 건 알고 있지. 그런 건 다 알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떤 아이인지는 모르겠더구나. 언제까지나 그 애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거라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어.”

V는 형이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데 실패했다. 형을 알고자 했던 게 아니라 자신이 아는 바가 맞는지 확인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형의 삶을 추적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삶을 흉내 낸 것에 그치고 말았다. 흉내 낼 만큼 잘 알지도 못했으니, 흉내조차 못 냈다. 피붙이라서 잘 안다고 믿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몰랐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형이라는 주제를 밀어붙여야만 했다. 그는 형의 말을 잘 듣는 동생이었다. 결국 V는 서배스천 나이트의 이름으로 살기로 한다. 그가 알아낸 서배스천 나이트가 아니라 그가 읽었던 서배스천 나이트의 삶을. 진짜 서배스천 나이트의 인생은 수수께끼로 남겨둔 채 스스로 지겨워질 때까지. 훗날 그 삶이 어느 책에 실린 이야기처럼 허구로 느껴질 수도 있음을 과연 그가 알겠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난을 참긴 어려웠을 테니까. 수치는 남겨진 그의 몫이었을 테니까.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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