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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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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생략하고 싶다면

10여 년 전 이혼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글, 미야모토 데루의 <금수>
등록 2017-12-01 04:12 수정 2020-05-03 04:28

미야모토 데루가 쓴 의 첫 문장은 ‘전략’이다. 앞 내용은 대강 생략한다는 말이다. 인생에 대해 말하자면 굳이 과거의 일을 꺼낼 필요가 있겠느냐는 반문일 수도 있겠다. 으로 유명한 미야모토의 는 10여 년 전 이혼한 두 사람이 우연히 재회한 뒤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5년 동안 연애하고 2년 남짓 결혼생활을 했던 두 사람, 그들이 뒤늦게 주고받은 편지는 이미 아는 이야기를 다시 묻고 답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이게 다 전남편, 당신 탓이야!

그가 어떤 일을 벌였는지는 알지만, 왜 그랬는지를 모르기에 시작된 대화. 행복한 기억보다 불행했던 일이 더 강렬하리라는 것은 뻔하다. 먼저 편지를 보낸 쪽은 호시지마 아키였다. 호시지마는 여자의 결혼 전 이름이다. 자오산 정상의 호수에 가려고 그녀는 몸이 불편한 아들과 케이블카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맞은쪽에 앉은 사람은 전남편 아리마, 그의 수척하고 쓸쓸한 옆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오래전 그날을 떠올렸다.

남편은 결혼생활 중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 남편이 자는 동안 여자는 동반자살을 시도했다. 남편은 간신히 살아났으나 여자는 즉사했다. 응급실에서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된 호시지마는 남편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렸다. 겨우 살아난 남편은 ‘그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은 아니라며 먼저 이혼을 요구했다. 호시지마는 엄연히 피해자였으므로 이혼의 결정적 이유가 된 사건에 대해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선 절대 알 수 없는 사건의 전말, 그들은 왜 동반자살까지 하려 했을까.

이혼은 많은 이야기를 묻어버렸다. 그 때문이었다. 호시지마는 이혼을 결심한 뒤, 뭔가 불행한 일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을 떨치지 못했다. 불행이 헤어진 두 사람을 호시탐탐 노리는 듯했다. 불행해지리라는 예감이 현실이 되어 덮쳐오는 것을 감당해야 할 날들이 이어졌다. 호시지마가 고작 25살 때의 일이다.

‘금수’(禽獸)라는 단어를 들으면, 나는 짐승이 떠오른다. 날짐승과 길짐승 모두를 일컫는 말, 행실이 아주 더럽고 나쁜 사람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 아리마의 삶은 가히 금수에 견줄 만했다. 그가 내 친구의 남편이었다면, 금수보다 못한 놈이라고 서슴없이 욕을 해댔을 테니까. 이혼 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남자는 수차례 회사를 옮겨다니고 섣부르게 사업을 벌였다 접기를 반복했다.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었지만 사랑한 적은 없다. 자신을 먹여살리는 여자에게 너 같은 건 싫다고 윽박지르면서 막상 헤어지긴 싫어했다. 지난 10년의 세월을 한 단어로 말하자면, ‘전락’하고 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호시지마의 삶 역시 행복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전남편을 잊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재혼한 그는 곧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반신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다. 또래 아이보다 지적 발달도 늦어서 말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 불행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재혼한 남편도 바람을 피웠고 호시지마 몰래 다른 자식을 키웠다.

“나는 아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모든 게 전남편의 탓 같았다.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혼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혼하지 않았다면 재혼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재혼하지 않았다면 아이도 낳지 않았을 것이므로. 호시지마는 속으로 외치고 외쳤다. 이게 다 아리마, 당신 탓이다!

호시지마는 불행이 이끄는 쪽으로 자신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편지를 보낸 건 그래서였다. 불행의 전말을 소상히 알지 못해 오늘까지 속으로 묻고 물었다. 당최 이해할 수 없었기에, 불행이 닥칠 때마다 그날의 탓으로 돌렸다. 호시지마는 끈질기게 편지를 보냈다. 끝이 좋지 않았던 사랑을 완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래전 닥친 불행을 그때 그 시간에 고스란히 남겨두기 위해서.

10여 년 전 그 사건에서 차근차근 파생돼온 지금까지의 일. 하지만 미래 역시 정해진 것일까? 아들은 엄마 아빠라는 말을 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 그 뒤 아이는 보리·쌀·달걀을 느리지만 비교적 정확하게 말하고, 스스로 단추를 풀고 잠글 수도 있게 되었다. 앉지도 못했는데, 목발을 짚고 걸을 수도 있다. 10년 뒤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호시지마는 지금,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는 아들에게서 과거의 결과로서 오늘이 아닌, 미래의 근거로서 오늘을 보았다.

이젠 알기에, 생각지 않는다

내 삶을 매 순간 지켜보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다. 내가 나를 보고 있다는 엄중한 사실을 기억한다면, 누구도 자신의 전락을 두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교와 무관하게 나는 종종 성경을 읽는다. 이사야 43장에 이런 문장이 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제 호시지마는 그 일이 자신에게 닥친 연유를 모르지 않는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아는 바에 대해서만 ‘생략’할 수 있기에, 그 시절을 과감히 ‘전략’할 수도 있다. 금수(錦繡), 이 책의 제목은 이런 뜻이다. 수를 놓은 직물, 아름다운 단풍이나 꽃을 비유하는 말, 훌륭한 문장을 비유하는 말. 아마 살아가는 일은 금수의 세 가지 뜻을 차근차근 통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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