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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처음에 산다

리베카 솔닛이 다시 쓴 자기 이야기 <멀고도 가까운>
등록 2018-03-29 11:35 수정 2020-05-03 04:28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당신이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혹은 그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늠해보는 것이다.” 첫 페이지에 실린 문장이다. 후기에는 “쉽지 않았던 시절에 오히려 내 삶이 더 풍성해졌던 과정에 대한 기록이고, 그럴 수 있게 도와주었던 사람들의 우정과 친절함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썼다는 문장도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늠하면서, 그녀 스스로 다시 쓴 이야기. 그를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거듭 써내려가는 이야기. 좀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딸이 어떻게 모두를 사랑하는 어른으로 자랐는지를 밝히는 이야기. 불행한 유년을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삶의 유한함을 두려움 없이 인정하기 위해서 그녀가 다시 쓴 자기 이야기. 즉 리베카 솔닛의 은 그녀가 ‘읽었던’ 이야기와 그녀가 ‘살았던’ 이야기다.

시작은 이러하다. 어느 날 살구 25kg이 리베카의 집에 도착했다. 오래전 어머니가 심은 살구나무에서 딴 살구들이었다. 리베카가 어렸을 땐 살구나무를 오르내리며 동생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다. 기억 속 살구나무는 그녀가 꽤 행복한 유년기를 살아온 듯 보이게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보상일까 임무일까

어머니는 딸을 싫어했다. 하지만 이제 그조차도 무색해졌는데, 어머니가 중증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한참 전부터 병원 신세를 졌으며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딸의 방문을 반가워하기까지 했다. 거동이 불편할 뿐 정신은 비교적 온전했던 시절, 어머니는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오로지 그녀에게만 전화를 걸었다. 왜 동생들에겐 전화하지 않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너는 딸이잖아. 온종일 집 안에만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

리베카는 작가라서 굳이 출퇴근을 할 필요가 없었다. 혼자 살아서 꼭 필요한 집안일 외엔 굳이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그러한 삶이 어머니의 눈에는 딸이 그저 집에서 빈둥거리는 꼴로 비쳤던 모양이다. 남동생은 입원한 어머니를 대신해 살구를 땄지만 그것을 처리하는 일은 누나에게 맡겼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어머니와 관련된 어려운 임무들은 오로지 그녀 몫이었다. 과연 이 살구가 보상일까, 임무일까. 그녀로선 당최 가늠하기 어려운 양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녀가 망설이고 궁리하는 사이, 살구는 빠르게 썩어갔다.

대부분의 어머니는 딸에게서 자신의 좋았던 시절을 발견한다. 리베카의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들과 달랐다. 어머니는 딸을 시기해서 툭하면 화를 냈다. 그러면서 딸이 자신을 냉대한다고 비난했다. “될 수도 있었을 것”을 아쉬워하며 너무 자주 “안 돼”라고 말했다.

리베카가 어머니를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한 예로 어머니의 머리칼은 갈색인데 리베카는 금발을 가졌다. “딸은 어머니를 줄어들게 하고 쪼개고 무언가를 떼어가지만 아들은 뭔가 덧붙여주고 늘려주는 존재”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대놓고 아들을 편애했다. 아들이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졌지만, 딸이 봐줄 만한 여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는 치를 떨었다. 어머니는 리베카가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싫어했다. 성별과 외모를 문제 삼았으므로 바꿀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의 분노와 증오를 고스란히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살구가 썩어가는 동안, 리베카는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의 파편들을 기억하고 찾아나섰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어머니가 일평생 버림받았다는 분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그러다가도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체 게바라의 이야기를 기억해내고 에스키모 여인이 추위 속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썼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다시 쓰면서, 그녀는 어머니와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해나갔다.

그러던 중 리베카의 몸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이런저런 검사가 이어졌다. 고작 하루 만에 어머니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려서 누군가의 보살핌이 절실했다. 다행히 친구들이 찾아와 그녀를 도왔다. 그녀를 씻기고 먹였다. 누구나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내가 어떤 존재를 낳았다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호의였다.

삶의 테마를 결정하는 것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리베카는 살구 앞으로 돌아왔다. 문드러진 것들을 내다버리고 멀쩡한 것들을 골라 잼을 만들고 술을 담근 뒤 문병 온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어머니의 살구는 이제 리베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리베카에겐 임무였을지도 모를 살구가 누군가에겐 달콤한 보상으로 전해졌다.

인생은 멋진 일이 생기고 난 직후에 돌아보면 운이 좋았던 일들의 연속이고, 끔찍한 일이 생긴 뒤에 돌아보면 고난의 연속이다. 리베카의 경우를 보건대, 멋진 일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우리 삶의 주제가 사랑으로 결정하는 것은 호의에 대한 호의일 뿐, 그 이상이 필요하지 않다. 삶의 테마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일 텐데, 내 이야기는 늘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이야기로 귀결될 때, 리베카 솔닛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갈 때, 이야기의 장르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의 처음에 산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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