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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 낀 사회는 누구의 눈물을 외면하나

사랑-질병-죽음의 3부작 첫 작품 ‘장갑 없이 눈물을 닦지 마세요 1’
등록 2026-05-07 20:55 수정 2026-05-13 14:03


2018년 6월7일 스웨덴 대법원은 사람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 사실을 알리지 않고 콘돔 없이 성관계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꾸준한 치료로 바이러스가 ‘미검출’ 상태였고 전파 위험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근거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항레트로바이러스치료제(ART)가 보급되며 HIV는 죽음을 뜻하는 병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이 됐다. 공포와 차별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멀어졌다.

그런데 요나스 가르델은 소설 ‘장갑 없이 눈물을 닦지 마세요 1’(윤지산 옮김, 마르코폴로 펴냄)에서 바로 그 “조금씩 멀어지는 과정”이 얼마나 많은 죽음과 침묵 위에 세워졌는지를 집요하게 묻는다.

“환자의 눈물을 닦아줄 때는 반드시 장갑을 껴야 해.”

“하지만 그 사람은 너무 슬퍼 보였어요.”

1980년대 스톡홀름에선 노란 방호복을 입은 간호사들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 인간답게 돌봄 받을 권리는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에이즈 공포’ 속에서 병실에 홀로 남겨지고 가족에게조차 외면당했던 사람들의 삶 위에서 어렵게 만들어졌다.

1982년 라스무스와 베니아민, 파울, 레이네 같은 젊은 남성들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살아보기 시작했다. 클럽과 카페, 겨울 거리에서 서로를 발견하며 이름을 숨기지 않고 손을 잡는 일 자체가 혁명이었다. 동성애가 1979년까지만 해도 “질병”으로 분류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에이즈’가 도착했다. 병원은 환자를 두려워했고, 언론은 ‘동성애자의 병’이라는 이름으로 공포를 유통했다. 가족은 침묵했고 사회는 죽음을 도덕의 문제로 바꾸었다. 많은 청춘이 쓰러져갔지만 티브이(TV) 속 죽음을 바라보던 누군가는 “부도덕하게 살았잖아. 그 결과지”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1982년 스웨덴’과 얼마나 다를까. 지금도 HIV 감염인은 감염 사실을 숨긴 채 살아간다. 병원 진료 거부까지 걱정한다. 코로나19 시기에 봤던 특정 집단과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향한 혐오 역시 낯설지 않다.

이 소설은 ‘사랑-질병-죽음’으로 이어지는 3부작의 첫 작품이다. 2012년 출간 당시 스웨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소설은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자유와 존엄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억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기억을 잃는 순간, 사회는 언제든 다시 누군가에게 장갑 낀 손만 내밀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228쪽. 1만6700원.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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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속의 우리 나무

박상진 지음, 눌와 펴냄, 2만4천원

조선시대 회화 속 나무를 따라 우리 식생과 문화의 흔적을 읽어내는 책이다. 나무학자인 박상진은 김홍도·정선·신윤복 등의 그림 속 배롱나무, 구상나무, 동백나무, 소나무 등을 식물학과 역사, 미술사의 시선으로 함께 해석한다. 특히 한라산 백록담 일대 옛 그림 속 구상나무 숲을 통해 오늘날 기후위기로 변해가는 제주 숲의 시간까지 포개어 보여준다.

 


만들어진 뿌리

소피 베시 지음, 주명철 옮김, 여문책 펴냄, 1만5천원

‘유대-기독교 문명’이란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사실 서구의 정치적 필요 속에 만들어진 ‘가짜 족보’다. 저자는 서구 문명이 스스로를 ‘유일한 문명’으로 세우기 위해 동방과 이슬람, 유대인의 복합적 역사를 어떻게 지워왔는지 추적한다. 그리스 문명을 ‘순수한 유럽의 기원’처럼 재구성한 과정부터 오늘날 이스라엘과 서구 정치의 결합까지 논의는 이어진다.

 


공장이 사라지고 남은 얼굴들

희음 지음, 재단법인 뚜벅이 기획, 오월의봄 펴냄, 1만8500원

일본 덴소 자본이 세운 자동차 와이퍼 생산공장 한국와이퍼 노동자들의 기록이다. 2022년 청산 통보 이후 노동자들은 400여 일 동안 싸웠다. 공장을 점거하고, 일본 원정 투쟁에 나서고, 노동자 공익재단 ‘뚜벅이’를 세워 새로운 연대의 관계망을 만들어갔다. 노동자의 시간은 공장 폐쇄와 함께 폐기되지 않는다. “서로를 덮어주던 그늘은 방향만 바꿀 뿐 사라지지 않았다.”

 

 


권위

안드레아 롱 추 지음, 허원 옮김, 동녘 펴냄, 2만5천원

트랜스젠더 작가이자 비평가인 저자는 오늘날 예술과 비평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그는 “결국 비평가는 언제나 사회 비평가”라고 말한다. 비평을 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작품을 다시 세계와 연결하는 작업으로 정의한다. 오늘날 혐오와 반동, 피로한 정치의 언어 속에서 비평의 역할을 다시 묻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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