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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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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친구의 불행을 외면한 어린 날에 대한 사과 <안녕, 내일 또 만나>
등록 2018-07-17 17:20 수정 2020-05-03 04:28

과거를 떠올리는 일은 늘 괴롭다. 그땐 정말로 바닥을 쳤다 싶은 시절을 떨쳐내기는 만만치 않다. 삶의 호시절을 그려보아도 썩 즐겁지가 않다. 지금의 처지를 제2의 전성기라고 믿고 싶지 않은 탓이다. 삶의 호재를 즉시 알아챌 만큼 강렬하고 명백한 호시절을 누리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지나고 보니 그래도 그때가 좋았었다, 뒤늦게 인지하는 사람이 실은 태반이다. 작가의 말처럼 처음에는 서로 상반된 감정들이 너무 많이 얽혀 있어서, 우리는 삶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니 기억은 언제나 재구성되고 거짓말의 기운이 감돌 수밖에.

나만 그런 건 아니지 싶은데, 나는 아직도 내 삶의 전성기가 도래하지 않은 것만 같다. 그렇다고 추후에 그런 날이 올 거라는 확신도 기대도 없다. 행운과 행복을 바라며 살기보다는 불운과 불행을 피하며 살고 싶은 게 솔직한 내 마음이다. 어쩌면 좀 따분할지도 모를 삶을 나는 바랐다.

는 윌리엄 맥스웰이 일흔두 살에 쓴 책이다. 작가는 이 책을 가리켜 일종의 회상록이자 ‘내 잘못을 우회적으로 사과하려는 헛된 시도’라고 썼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작가의 경험담이 투영된 글이기도 하고, 뒤늦게 전하는 사과의 편지이기도 하다.

불행한 내가 불행한 너를 만나서

작가는 11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삼형제의 가운데였다. 형은 어릴 때 마차 바퀴에 깔려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의족을 끼고 살았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크게 개의치 않을 만큼 조숙한 형이었다. 그러다보니 나이 차가 꽤 나는 동생과는 좀처럼 말을 섞지 않았다. 형에게 동생은 아직 애였다. 반면 아버지에게 둘째 아들은 다 큰 놈이었다. 인형을 끌어안고 자거나 ‘계집애처럼’ 집 안에 틀어박혀 놀거나 아이처럼 안기려 들면 아버지는 엄하게 말했다. “그런 행동을 하기엔 넌 너무 나이 들었어.”

그 시대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쓸 만한 놈’으로 자라나는 거였다. 그러려면 애가 밖으로 좀 나돌아야 안심이 됐다. 게다가 아버지는 보험사에 다니는 비즈니스맨이었다. 일주일의 절반 넘게 집에 있지 않았다.

태어나자 엄마를 잃은 남동생은 종일 유아침대에 누워 잠만 잤다. 집안일을 돌보는 사람이 수차례 바뀌었으나 형제는 그중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은 어린 아들이 말 붙일 데라곤 집 안 어디에도 없었다.

설상가상 아버지는 재혼을 선언했다. 어머니의 보석을 내다팔고 옷장을 비웠다. 나중엔 아예 이사를 결정했다. 새어머니의 취향을 존중한 벽돌집을 짓는 동안, 그는 내내 생각했다. 아버지가 더 이상 나를 애지중지하지 않는다고. 아버지가 그리는 행복한 미래에는 삼 형제가 포함돼 있지 않다고.

어린 그는 공사 중인 집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들보와 기둥, 뼈대만 간신히 갖춘 집, 벽도 없고 문도 없고 천장도 없는 집에서 그는 한동네에 사는 친구를 만났다. 클래터스, 친구의 이름이었다. 둘은 날마다 공사 중인 집에서 만났다. 목뼈가 부러질 위험을 무릅쓰고 공사 중인 집의 골조 위를 걸었다. 그뿐이었다. 둘은 서로의 처지를 이야기하지 않고도 친해졌다. 왜냐면 그들은 서로가 아니라도 친구가 또 있다는 식으로 굴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그들은 서로를 몰랐다. 온종일 혼자 놀고 있는 진짜 이유를.

클래터스의 아버지는 이웃을 살해하고 자살했다. 클래터스는 이사했고 두 사람은 멀어졌다. 둘이 다시 만난 건 작가가 대도시의 고등학교로 전학한 뒤였다. 학교 복도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를 아는 체하지 않고 지나갔다. 작가는 클래터스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자신을 두고두고 떠올렸다. 그때의 행동을 해명한다면 할 수 있는 변명은 오직 하나였다. 나는 어른이 아니었다는 것.

가 늦은 사과를 담은 편지라면 이 책의 수신인은 바로 클래터스다. 이 사과가 헛된 이유는 그때로부터 60년이나 지나서 거리에서 마주친다 해도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고, 어른들의 끔찍한 선택으로 빚어진 일들 때문에 저마다 불행에 빠진 두 어린아이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알았을 리 만무하고, 이젠 그들 모두 노인이라서 서로를 모른 체했던 자신들의 행동과 불행이 곧 약점이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이해한 탓이다.

절대로 불행해지지 않는 존재

작가에게 어른이란 상대의 불행을 진짜로 모르는 체하기 위해선, 그의 이름을 부를 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클래터스, 그 이름을 부르고 예전처럼 서로의 불운한 처지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위태로운 놀이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다. 따지자면 불행은 내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이다. 내가 저지른 잘못은 불행이라 하지 않고 죄라고 한다. 그런데도 죄 아닌 불행이 나의 부끄러움일 때가 내게도 있었다. 당연히 남 탓을 하고 세상 탓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불운과 불행을 피하려 아등바등했던 나는 지금껏 사춘기를 앓았던 건 아닐까 싶다.

내가 저지른 잘못만이 나의 수치이자 약점이 될 때, 나는 나를 어른이라 인정한다. 우리가 자신을 어른인 때와 어른 아닌 때로 나눌 수 있다면 아마도 그 순간일 것이다. 어른의 불행은 내가 저지르는 것이지, 함부로 나를 찾아올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니까.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으로는 절대로 불행해지지 않는 존재, 그게 어른 아니겠는가. 오늘 어떠한 불행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래, 나는 오늘도 호시절이다.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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