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전사, 빠리의 택시운전사, 작가, 언론인, 진보신당 대표, 장발장은행장, 자유인, 아웃사이더….
홍세화의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호칭들이다. 밤하늘 별을 보는 듯하다. 그 모든 호칭을 통약할 수 있는 별자리 같은 호칭은 없는 걸까.
사회적으로 깊은 존경을 받는 사람을 흔히 ‘선생’이라 부른다. 하지만 사회의 통념적인 분류 체계 사이를 탈주해온 홍세화를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뭉뚝하다.
일단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홍세화 선생.
2024년 4월18일, 그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암 진단을 받은 건 2023년 2월 초였다. 징후는 몇 달 전부터 뚜렷했다. 앞서 선생은 같은 해 1월13일 <한겨레> ‘홍세화 칼럼’에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라는 글을 남기고 길고 길었던 연재를 마쳤다. 1996년 6월 프랑스 현지에서 연재를 시작한 ‘내가 본 프랑스·프랑스인’부터 꼽으면 무려 26년6개월 만이었다. 한국 사회의 질적 전화를 위한 곡진한 호소를 담은 ‘큰 글’이었다. 연재를 마치는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선생의 1년 남짓한 투병 시간은 대부분 무성영화처럼 고요하게 흘렀다. 한때 증세가 호전돼 가족이 사는 프랑스에 두 차례 다녀오기도 했다. 결혼 50주년을 맞아 두 번째 원행을 다녀온 2023년 10월 말부터 증세가 악화했다. 집에서 혼자 고통을 견디는 선생을 뒤늦게 지인들이 병원으로 옮겼다. 항암치료에 들어가면서도 지인들과 날짜를 특정하지 않은 만남의 약속을 잡았다. 그러나 병세는 가팔라졌고, 항암치료마저 중단해야 했다. 선생의 마지막 시간은 가족을 애타게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터이다. 22년 전 자발적인 2차 디아스포라를 결행했던 그는 귀국한 가족을 만나고 이틀이 지나지 않아 눈을 감았다.
밤하늘 별자리를 그리듯이 그의 생을 되짚어본다. 그에게 붙일 수 있는 온전한 호칭을 찾는 건 아직 섣부른 듯하다. 그 빈자리를 선생을 향한 <한겨레21>의 깊은 애도로 대신한다.
홍세화 선생이 2002년 1월 영구 귀국하고 얼마 뒤 저녁 자리에서의 일이다. 20여 년 만에 다시 시작한 한국살이에서 가장 힘든 게 뭐냐고 여쭸다. 책상다리하고 앉는 것이라고 했다. 일행은 크게 웃었다. 선생은 뒤따라 옅게 웃었다. 일행의 큰 웃음은 뜻밖의 사소함(다리 관절과 근육의 불편함)에 대한 반응이었다. 선생의 옅은 웃음은 무슨 뜻을 품었던 걸까.
선생은 자주 ‘몸 자리’에 관해 말하고는 했다. “내 삶이란 내 몸 자리의 궤적이다.” 이렇게도 말했다. “사람의 모든 삶의 궤적은 처지에 의해 수동적으로 ‘놓이는’ 몸 자리와 의지에 의해 스스로 ‘놓는’ 몸 자리의 연속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렇게 선생은 하릴없는 유물론자였다. 그의 새로운 ‘몸 자리’는 아득히 먼 데 있을 것이라고 쓰려다, 문득 유물론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자각이 들어 멈춘다.
귀국 직전 프랑스인 친구가 “기어이 돌아가려는가?”라고 묻자 “땅이 내 몸을 마구 부른다네!”라고 답했을 때도 몸과 자리(땅)가 고갱이 구실을 했는데, 이 말을 앞의 진술에 적용하면 선생의 한국행은 스스로 몸 자리를 ‘놓는’ 것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한국에서 맞닥뜨린 책상다리의 불편함도 몸 자리의 사태였다.
선생이 위중하다는 긴박한 소식을 듣고 22년 전 사소했던 기억이 떠오른 건, 그가 영구 귀국 뒤 한국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살았는지를 되짚다가 일어난 연상작용의 결과다. 그사이 한국의 음식점과 술집은 거의 다 좌식에서 입식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선생도 사람 만나 대화하기가 한결 편했을 터이다. 그러나 선생과 한국 사회의 관계는 한순간도 그렇지 못했다. 그때 선생의 설핏했던 웃음에는 당신이 스스로 옮겨다 놓은 ‘큰 몸 자리’가 결코 편해지지 않을 거라는 전망도 섞여 있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랬다. 선생은 한국 사회와 내내 긴장했다. 보수 진영과의 대결은 선명해서 차라리 편안했다. 선생은 넓게는 이른바 민주세력을, 좁게는 진보 진영까지도 거침없이 비판했는데, 이에 따른 불편함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선생은 2024년 4월14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평생 긴장 속에 살아온 삶과 지금의 병마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의 ‘긴장론’을 떠올려보면, 그저 회한에 그치는 얘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긴(緊, 줄어듦)과 장(張, 늘어남)은 대칭적 균형이다. 언중은 “긴장”이라 말하고 ‘긴’으로만 이해한다. 우뚝한 존재들의 삶에서 곧잘 이상과 실천이 단절되고, 이상도 실천도 둘 다 부러지는 이유다. 긴장은 강고함과 일관성, 그리고 지속성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 요체다. 이상을 내려놓지 않은 웅숭깊은 사유자이면서 당면한 과제를 실천해온 단호한 행동가로서 선생의 삶이야말로 긴-장의 관계를 오롯이 보여줬다.
그의 긴장론은 누구보다 진보 진영이 긴-장의 균형을 놓쳤다고 판단될 때 날카로운 잣대가 됐다. 그리고 그 잣대를 고스란히 자신에게도 갖다 댔다.
2011년 10월 한겨레신문사를 별안간 그만두고 진보신당 당대표에 출마할 때도, 선생은 진보정당의 얼굴 격인 노회찬·심상정 의원의 탈당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때 발표한 장문의 출사표 제목은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였다. 그는 “결국 상처만 입게 될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명망가 진보 정치인들이 버리고 떠난 당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
선생은 한겨레신문사에 재직할 때도 가장 강력한 내부 비판자였다. 2002년 1월 귀국해 입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민주노동당 당적 보유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사내 공청회에 이어 구성원 당적 보유에 대한 사원 찬반투표까지 진행됐다. 결과는 ‘당적 보유 금지’가 다수였다. 선생은 몸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늘 <한겨레> 구독신청서를 품고 다니며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많은 구독신청을 받았다. 그의 재직 기간 9년은 내내 긴-장이었다.
선생의 긴장론은 ‘톨레랑스’(용인)와도 조응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1995년)를 통해 한국 사회에 널리 알린 톨레랑스는 지식 생태계에 커다란 유행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식 생태계와 진보 진영의 문해력은 톨레랑스에 톨레랑스하지 못했다. 톨레랑스 안에는 필연적으로 ‘비판’이 내재해 있으나, 한국 사회는 그 비판에 앵톨레랑스(불용인)했다. 귀국 이후 선생의 삶은 한국 사회의 앵톨레랑스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졌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선생의 이런 삶의 궤적을 거슬러 오르면 어릴 적 가계의 내력과 만나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다. 일제강점기 도쿄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며 표트르 크로폿킨의 <청년에게 고함>과 <상호부조론>을 일본어로 읽었다. 그는 다음 대 항렬자인 화(和) 앞에 세(世)를 붙여 맏이인 선생 이름을 지었다. ‘세계평화’라는 뜻이다. 둘째 이름은 ‘민족평화’를 뜻하는 민화(民和)로 지었다.
아나키스트 아버지는 자신의 감각과 의지로 자식 이름을 빚으며, 그것이 미리 당도한 미래이길 바랐을 터이다. 그러나 현실이 된 미래는 오히려 정반대이거나 크게 어긋나기 일쑤였다. 둘째 민화는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첫돌 전에 죽었다. 맏이는 요행히 살아남았으나, “세계평화는 방황하다 끝내 이렇게 온 빠리의 길을” 누벼야 했다.(<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다만 그는 프랑스에서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적힌 여권을 받아, 난민이면서 동시에 세계시민이 됐다.
선생은 어려서 외할아버지에게 들은 ‘개똥 세 개’ 우화를 종종 언급했다.
서당 선생이 학동 삼 형제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 첫째는 정승이라 했고, 둘째는 장군이라 했다. 얼굴 가득 웃음 짓던 서당 선생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뀐 건 셋째의 대답을 듣고서였다. “장래 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 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는 개똥의 용처를 이렇게 밝혔다. “글 읽기는 싫어하면서 정승 되기를 바라는 큰형 입에 하나, 겁쟁이면서 장군 되기를 바라는 작은형 입에도 하나.”
어린 손자에게 우화를 들려주던 외할아버지가 이 대목에서 문제를 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누구 몫이겠니?” 세화가 대답했다. “그거야 서당 선생에게 먹으라고 했겠지요. 두 형의 엉터리 같은 말을 듣고 좋아했으니까요.” 외할아버지는 소크라테스처럼 잇대어 물었다. “너라면 그 말을 서당 선생한테 할 수 있겠니?” 세화는 망설임 없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외할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네가 앞으로 그 말을 못하게 되면 마지막 개똥은 네 차지라는 걸 잊지 마라, 세화야.”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과 외할아버지와의 문답은 선생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거대한 만유인력으로 작용했다. 이름은 고개 들어 먼 데를 바라보게 했고, 개똥 문답은 당면한 선택 앞에서 결심의 지침이 됐다. 선생은 “세 번째 개똥을 하나라도 덜 먹겠노라고 일상적인 고문 행위와 억울한 죽음이 있는 사회에 맞서 나름 저항했다”며 그것은 자신의 생애 내내 “버거우면서 기꺼운 짐”이었다고 했다. 그의 긴장론은 이름과 개똥 문답, 짐의 버거움과 기꺼움의 관계에도 조응한다. 선생의 생을 관통한 이상주의자와 실천가의 면모는 그 자장 안에서 이뤄진 변증법이기도 했다.
2012년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2% 미만 득표율로 등록 취소된 뒤, 선생은 공부의 자리로 나아간다. 진보 진영의 위기가 다분히 공부 부족에서 비롯됐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해서 꾸린 학습공동체 이름이 ‘가장자리’에 이어 ‘소박한 자유인’인 것은 아버지의 작명만큼이나 의지적이다. 프랑스에서 난민의 삶이 아웃사이더의 자리였다면 귀국 뒤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은 한국에서의 삶은 가장자리였다.
‘소박한 자유인’은 선생이 평생 간직하고 지향해온 이상이 총체화한 표현 같다. 선생에게 자유란 존재의 존엄과 고결한 삶의 토대를 뜻했다. 그러려면 무제한에다 만용적이고 타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여서는 안 된다. 소박한 자유에 대한 지향은 자연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기도 하다. 그는 자유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이면서 아나키스트이자 사회주의자였다. 존재의 존엄을 지키는 자유는 사회정의(공화주의), 자주성과 연대성(아나키즘), 그리고 분배정의(사회주의)와 함께해야 이룰 수 있다고 선생은 믿어왔고, 이를 실현할 구체적 길을 탐문하고 실천해왔다.
그 마지막 실천의 몸 자리는 제22대 총선 사전투표소였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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