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말라’ 욕망 아닌데, 치료는 없었다… 방치된 섭식장애 환자들

스웨덴 스톡홀름 섭식장애 센터 내부. Yanan Li 제공
섭식장애 치료·지원 시스템이 부재한 한국과 달리 오스트레일리아·스웨덴·일본 등은 국가가 섭식장애를 심각한 질환으로 여기고 치료를 책임지는 구조를 갖췄다. 영국 국가보건서비스(NHS) 병원 관계자인 스티븐 왓킨스가 2025년 오스트레일리아·스웨덴 등 국가의 섭식장애 치료 체계를 탐방하고 쓴 보고서를 정리하고, 일본 야마자키 다다히로 국립정신·신경의료연구센터 (NCNP) 스트레스연구실장 겸 섭식장애전국지원센터(CEDRI) 센터장과 한 서면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세 나라의 섭식장애 치료 시스템에 대해 알아봤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섭식장애를 책임지는 나라다. 2009년부터 섭식장애 대응체계 전반을 지원하는 국가 전략조직인 엔이디시(NEDC·National Eating Disorders Collaboration)를 두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정부가 보건·노령부를 통해 1년에 약 100만달러(약 15억원) 예산을 지원한다. NEDC에선 섭식장애를 경험한 전문가와 섭식장애 가족, 임상가, 연구자, 정책 관계자 등이 국가적으로 일관된 섭식장애 정책과 서비스 기준을 마련하고 지역사회 의료 서비스를 지원하며 의료진 교육을 진행한다.
2023년 NEDC가 발표한 섭식장애 국가 전략(2023~2033)에는 110만 명의 섭식장애 환자를 위한 장기 실천 계획이 담겼다. ‘섭식장애는 모두의 일’이란 기치 아래 예방→식별→초기 대응→치료→심리·사회적 회복 지원→인력개발 등 6단계 치료를 목표로 한다. 섭식장애를 전문의뿐만 아니라 1차 의료, 학교, 지역사회 등 전체 의료 체계가 대응하는 질환으로 본다는 점도 특징이다.
섭식장애 치료를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2019년부터 한국의 국민건강보험 성격의 메디케어(Medicare)를 통해 섭식장애 환자의 경우 12개월간 최대 40회 심리치료와 20회 영양상담에 보험급여를 적용해준다. 섭식장애를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질환으로 보고 국가가 건강보험에 넣어 치료를 지원하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정부는 공공 ‘섭식장애 레지덴셜 센터’를 각 광역 단위에 하나씩 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25년 기준 네 곳이 문을 열었고 나머지 지역도 순차적으로 개소를 앞두고 있다. 센터는 가정과 유사한 환경에서 24시간 다학제 팀이 상주하며 집중 재활이 필요한 환자를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섭식장애 문제를 다루는 비영리단체인 버터플라이재단이 섭식장애 환자의 조기 발굴·상담을 위해 전국 상담전화도 운영한다. 아침 8시부터 자정까지 연중무휴로 진행되며, 연간 2만여 명이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섭식장애 비영리단체인 버터플라이재단이 섭식장애 환자의 조기 발굴·상담을 위해 전국 상담전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면. 버터플라이재단 유튜브 갈무리
스웨덴 또한 섭식장애 치료 인프라가 잘 갖춰진 국가 중 하나다. 스웨덴은 국가 책임 아래 공공의료를 제공하고 섭식장애 진료지침을 정한다. 2024년 스웨덴 보건복지청은 국가 섭식장애 진료지침을 발표했다. 환자와 가족, 임상가, 정책 담당자 등 전문가 250명이 2년6개월에 걸쳐 머리를 모은 결과다.
지침엔 치료 접근성 개선과 의료진의 지식·역량 향상, 개인 맞춤형 치료 등 세 가지 목표가 담겼다. 거식증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폭식증, 폭식장애, 회피·제한적 음식섭취장애(ARFID)까지 공식적으로 치료 대상에 포함해 더욱 넓은 영역의 섭식장애 환자를 지원한다.
스웨덴은 섭식장애 유형·정도에 따라 다양한 치료 방법을 제안한다. 특히 스톡홀름주에서 운영하는 공공시설인 스톡홀름 섭식장애센터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섭식장애 전문 클리닉으로 꼽힌다. 연간 약 3천 명을 치료한다. 의사와 간호사는 물론 간호인력, 사회복지사, 심리치료사, 물리치료사, 영양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력으로 구성돼 있다.
눈에 띄는 특징은 ‘낮 병원’(Day care)이다. 입원 병상보다 2배가량 많은 병상을 운영한다. 이곳에서 16살 이상 섭식장애 환자는 낮에 치료와 식사 지원을 받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간다. 외래보단 높은 강도의 치료가 필요하지만 입원까지 할 필요는 없거나, 입원 이후 회복 단계에 있는 환자가 주로 이용한다. 환자들은 이곳에서 보통 12~16주 정도 치료한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섭식장애 치료도 단계별로 세분돼 있다. 1단계는 부모가 식사 회복 과정에 적극 참여하는 ‘일반 외래 가족기반치료’, 2단계는 여러 가족이 참여하는 ‘낮 병원’(부모·형제자매 참여, 치료 중 학업 지원 포함), 3단계는 부모와 자녀의 동반 입원이다. 3단계는 체중 회복 외에 가족이 퇴원 후에도 식사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함께 치료받는 데 방점을 둔다.
10년 이상 투병해온 중증·만성 섭식장애(SEED) 환자를 위한 전담 클리닉도 있다. 환자가 스스로 선택해 치료받는 시스템인데, 매년 두세 명의 환자를 완치하는 성과를 내고 있다. 재발이 반복되거나 기존 치료에 두 차례 이상 실패한 환자를 위한 국가고도전문서비스(NHV)도 마련돼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 섭식장애 센터 내부. Yanan Li 제공
일본은 2015년부터 NCNP에 설치된 지원센터를 허브로, 전국 10개 지역 ‘섭식장애 지원 거점병원’을 지정해 치료와 지원을 뒷받침하고 있다. NCNP는 후생노동성 산하 국립고도전문의료연구센터다. 지원센터는 환자를 직접 진료하지 않고, 거점병원이 안정적으로 기능하도록 인력을 지원하고 진료·상담의 질과 기준을 맞추는 컨트롤타워 구실을 한다. 거점병원은 외래 상담·진료를 수행하고, 필요한 경우 다른 의료기관으로 환자를 연계한다.
지원센터는 “전문 섭식장애 치료와 지원체계가 필요하다”는 섭식장애 환자 당사자들의 요구에서 비롯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는 섭식장애가 생명과 직결되는 신체 합병증이 나타남에도 신체와 정신 사이 치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됐다. 전문인력과 진료시설 부족, 지역 격차, 데이터 부족, 환자·가족의 고립 등도 복합적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문제 제기 이후 2005년 섭식장애 진료체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고 2010년 일본섭식장애학회(현 일본섭식증학회) 주도로 2만4403명의 서명을 모았다. 이후 2014년 섭식장애치료지원센터 설치운영 사업이 시작됐고 지원센터가 설치됐다.
지원센터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마찬가지로 섭식장애 초기 대응을 위한 상담전화 서비스, ‘상담 핫라인’을 운영한다. 거점병원이 없는 지역에 거주하는 가족, 학교 관계자, 의료복지 전문가 등을 대상으로 한다. 지역 간 의료 격차를 상담 서비스로 메우는 셈이다. 2025년 기준 2798건의 상담이 접수됐다.
야마자키 센터장은 한겨레21과 한 서면 인터뷰에서 섭식장애의 원인과 증상을 다각도에서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섭식장애는 사회적인 마름 지향, 다이어트, 학교·직장·대인관계 스트레스, 불안, 우울, 완벽주의 등 생물학적·심리학적·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관여한다”며 “본인이나 가족, 에스엔에스(SNS) 중 어느 하나를 ‘원인’으로 지목해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감각 과민, 음식에 대한 관심 부족, 구토 공포로 음식을 먹지 못하는 회피적·제한적 음식섭취장애처럼 모든 섭식장애 환자에게 마름에 대한 욕망이 있지는 않다”며 “체중뿐 아니라 식사 행동과 신체 상태, 발달 특성, 정신 증상, 생활 환경을 포괄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짚었다.

야마자키 다다히로 일본 섭식장애전국지원센터(CEDRI) 센터장. 본인 제공
일본의 지원센터가 섭식장애 진료의 기본 원칙을 ‘다직종 협진’에 두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입원 단계에서 신체과와 정신과, 심료내과(심신의 스트레스 질환을 함께 보는 내과), 소아과 등이 협진하고, 심각한 저영양 상태의 환자는 신체 관리를 우선하면서도 동시에 심리치료와 가족 지원을 시작한다. 신체가 안정된 이후에는 외래 추적관찰과 심리치료를 통해 학교·직장 복귀를 돕고, 재발을 막는 데까지 치료 범위를 확장한다. 야마자키 센터장은 “심신을 분리하지 않는 다학제 진료를 우선하고 체중 회복, 심리치료, 가족 개입을 기계적으로 배분하지 않는다”며 “연령과 섭식장애 유형, 중증도, 본인·가족 상황에 따라 개별화된 진료를 제공하고 당사자의 존엄과 의사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입원에 대해서도 그는 “특히 소아·사춘기 시기에는 입원 그 자체보다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회복을 지원하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며 “섭식장애는 조기 발견과 조기 개입은 물론, 심리치료와 가족 지원을 조합한 적절한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는 질환”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일본 모델에도 한계는 있다. 그는 “여전히 전문의가 부족해 거점병원이 없는 지역이 많다”며 “지역 간 의료 격차를 줄이기 위해 일반인·전문인력을 대상으로 정보 사이트를 운영하고, 상담 사례를 집계·분석해 안내서와 매뉴얼을 만들었으며, 의료 종사자를 위한 연수를 지속하는 등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야마자키 센터장은 한국에 무엇보다 섭식장애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제안했다. 그는 “국가 체계가 충분히 정비되지 않은 단계에서는 섭식장애 환자와 가족, 회복자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어떤 치료·지원을 원하는지 목소리를 모아 사회적 요구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원센터 설립 당시를 보듯 당사자 목소리는 제도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의료진·연구자·정부를 움직여 제도 구축으로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힘”이라고 말했다.
권지담 기자 gon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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