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반년이 흘렀다.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는 여전히 전쟁터다. 숱한 목숨이 가뭇없이 스러졌다. 제주의 4·3, 광주의 5·18이 가자의 오늘이다. 선거에서 승리한 이슬람 무장 정치세력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한 2007년 6월 시작된 이스라엘의 봉쇄로 가자지구는 외부와 철저히 차단됐다. 17년여 가자는 고립된 섬이었다. 무지가 증오를 낳고, 증오가 배제를 낳았다. 배제된 땅, 배제된 사람들을 향한 무한 폭력은 쉽게 정당화됐다. 2024년 4월의 가자는 1943년 4월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다.
2024년 4월1일 오전 8시께(현지시각), 이집트와 국경을 맞댄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에서 인도지원단체 ‘월드센트럴키친’(WCK) 구호팀 소속 활동가들을 태운 차량 3대가 북상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지중해를 낀 가자지구 중부 데이르알발라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4월3일 구호팀 가족의 말을 따 “출발할 때 모두 결혼식에라도 가는 것처럼 마냥 들떠 있었다”고 전했다. 최근 이스라엘군의 공세가 집중된 데이르알발라에 도착한 구호팀은 서둘러 창고에 짐을 부렸다. 무려 100t에 이르는 식량이 굶주린 주민들의 서러운 배를 채워줄 게다.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졌다. 일을 마친 구호팀은 이스라엘군에 사전 통보·조율한 해안도로를 따라 라파로 복귀하기로 했다.
밤 10시43분께, 데이르알발라 외곽 라시드 거리에서 이스라엘군이 차량 행렬을 공격하고 있다는 현지발 속보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목격자의 말을 따 “밤 11시부터 11시30분 사이 몇 차례 폭격이 이어졌다”고 전했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의 보도를 종합하면, 폭격에는 이스라엘군이 운용 중인 ‘엘비트 헤르메스 450’ 무인기가 동원됐다. 목표물은 WCK 구호팀이 탄 차량 3대였다. 폭격 당시 행렬의 맨 앞차와 맨 뒤차 사이의 간격은 2.8㎞였다. 미사일 3발이 차량 3대를 차례로 명중했다.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폴란드, 미국·캐나다(이중국적), 팔레스타인 출신 WCK 구호팀 활동가 7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최연소 희생자는 구호팀에서 통역 겸 운전기사로 일한 스물다섯 살 팔레스타인 청년 사이프 아부 타라였다.
“의도치 않게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했다. 전쟁터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구호팀 폭격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헤르지 할레비 육군참모총장은 “심각한 실수다. 전쟁터에서 한밤중 매우 복잡한 환경에서 목표물을 오인해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반년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던 각국에서 격한 비난이 터져나왔다.
<로이터> 통신 등 외신보도를 종합하면, 앤서니 앨버니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는 네타냐후 총리와 한 전화통화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분노한다”고 말했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소셜미디어 ‘엑스’(옛 트위터)에 “하마스의 공격 뒤 폴란드 국민은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적인 연대를 표시했다. 오늘 그 연대가 어려운 시험대에 올랐다. 구호팀 공격과 이어진 네타냐후 총리의 반응은 당연한 분노를 불렀다”고 적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격분하며 매우 비통한 심정”이라며 “이스라엘군이 민간인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다. 신속하고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해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도, 리시 수낵 영국 총리도 “경악”과 “분노”를 표했다.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2024년 2월29일 새벽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 외곽의 나불 지역에서 구호품 배급을 기다리던 주민들을 겨냥한 총격으로 적어도 112명이 숨지고 760여 명이 다쳤다. 이른바 ‘밀가루 학살’이다. 3월15일 밤 데이르알발라 주거단지에 대한 공습으로 어린이와 임신부를 포함한 일가족 36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3월25일 가자지구 북부 베이트 라히아 해안에서 공중투하된 구호품을 거두기 위해 무작정 바다로 뛰어든 굶주린 주민 12명이 물에 빠져 숨졌다.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권고의견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도 이스라엘은 따르지 않고 있다. 3월28일 <알자지라>가 입수해 전한 영상을 보면, 가자지구 북부 해안가에서 백기를 흔들며 귀가하던 팔레스타인 청년 2명이 차례로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쓰러졌다. 이내 군사용 대형 불도저가 나타나 청년 2명의 주검을 모래밭에 묻어버렸다. 더 무엇이 필요한가?
‘다르 알시파’라 한다. 아랍어로 ‘치유의 집’이란 뜻이다.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에 자리한 알시파병원은 가자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1946년 영국 보호령 시절 문을 열었고, 각각 이집트와 이스라엘 점령기를 거치며 확장을 거듭했다. 이스라엘 매체 <와이넷>의 2023년 11월7일 보도를 종합하면, 1980년대 이스라엘 정부 주도로 대규모 증축이 이뤄졌는데,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단다. 2023년 10월7일 개전 직후부터 이스라엘군은 알시파병원 지하에 하마스의 테러본부가 있다고 주장했고, 곧 병원 소개령을 내렸다. 세계보건기구(WHO) 쪽은 “치료 중인 환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격”이라고 반발했다. 이스라엘군은 11월15일 끝내 병원으로 들이닥쳤다.
한바탕 폭풍이 휩쓴 뒤에도 병원은 무사하지 못했다. 2024년 3월18일 이스라엘군이 다시 병원을 장악했다. 이번엔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병동마다 불길이 치솟았고 산발적인 총성이 이어졌다. 2주간 병원을 봉쇄했던 이스라엘군은 4월1일 ‘작전 종료’를 선언하고 물러갔다. 이스라엘 군 당국은 “작전 기간 동안 하마스 테러범 200여 명을 사살하고, 현금 300만달러 이상을 압수했으며, 각종 기밀정보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현지 의료진은 “하마스 무장대원은 병원에 없다”고 반박했다. 테위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소셜미디어 ‘엑스’에 이렇게 썼다.
“이스라엘군이 봉쇄한 2주 동안 입원 중이던 환자 21명이 목숨을 잃었다. 어린이 4명과 중환자 28명을 포함한 환자 107명이 아무런 의료지원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 환자 15명당 물 1병이 배급됐다. 비위생적인 환경과 물 부족 탓에 감염병이 번지고 있다. 식량 부족은 당뇨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으며….”
반년 전, 전쟁은 올리브 수확철과 함께 시작됐다. 평균 수령이 300~600년에 이르는 올리브 나무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자기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상징한다. 팔레스타인 농업부는 2022년 현재 가자지구 일대 4400여㏊에 올리브 나무가 자라고 있고, 한 해 올리브 3만5천t가량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2023년 올리브 농사는 흉작이었다.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2023년 11월6일 가자지구 주민의 말을 따 “올리브 농사는 으레 한 해 풍작이면 한 해 흉작이다. 전쟁만 아니었으면 올해는 1만t 정도 수확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1년 내내 올리브 수확철을 기다렸지만, 이스라엘군은 올리브 나무를 겨냥해 미사일을 쏘고 포탄을 퍼부었다”고 전했다. 올리브 수확철은 전쟁과 함께 끝났다.
전쟁 반년, 무차별 폭격이 퍼부어진 가자지구의 흙과 물과 공기가 오염됐다. 굶주린 이들은 나뭇잎으로 빈속을 채우고 있다. 개전 이후 끊긴 건 물과 식량 공급뿐이 아니다. 전기도, 연료도 차단됐다. 추위를 피하는 데도, 음식을 만드는 데도 땔감이 사용됐다. 세계식량계획(WFP)이 개전 두 달도 안 된 2023년 12월 낸 보고서에서 “가자지구 남부로 피란을 온 주민 약 70%가 땔감을, 13%가 각종 쓰레기를 연료로 쓰고 있다”고 전했다. 네덜란드 탐사보도 전문매체 <벨링캣>은 2024년 3월15일 위성사진 분석을 통해 “지난겨울 불과 두세 달 만에 피란민이 몰린 가자지구 일대의 공원과 공동묘지, 대학 교정 등지에서 다량의 나무가 베어졌다”고 전했다.
주민은 생존을 위해 나무를 베었지만, 이스라엘군은 군사작전을 내세워 과수원과 농경지를 무차별 파괴했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2023년 12월18일 펴낸 보고서에서 가자지구 북동부 베이트하눈 지역의 위성사진 분석 내용과 함께 “10월27일 지상전 개시 이후 이스라엘군은 불도저 등 중장비를 동원해 과수원, 온실, 농경지 등을 조직적으로 파괴했다”고 고발했다. 실제 이 단체가 공개한 10월15일 찍은 위성사진에서 초록으로 빛났던 농경지는 11월24일 촬영분에선 누런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아흐메드 벤쳄시 HRW 중동·북아프리카 담당 공보국장은 <벨링캣>과 한 인터뷰에서 “국제법은 교전 당사자가 민간인의 생존에 필수적인 대상을 공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 식량, 의료시설, 마실 물 관련 시설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스라엘군이 파괴한 농경지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나무가 사라졌다. 집도, 땅도 파괴됐다. 피란민은 전쟁이 끝나도 돌아갈 곳이 없다. 가자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돼가고 있다. 전쟁이 멈출 때까지 살아낼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살아갈 수 있을까?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이 집계한 최신 사상자 통계를 보면, 2023년 10월7일부터 2024년 4월3일까지 가자지구 주민 3만2975명이 숨지고 7만5577명이 다쳤다. 오늘도 어김없이 폭격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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