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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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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내 칫솔 내 곁에

정치인 박용진의 칫솔
등록 2011-12-01 15:38 수정 2022-12-15 15:54

1997년 대선이 처참하게 끝난 이후 모두가 진보정당 건설을 외면했다. 권영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만이 진보정당 건설에 앞장설 각오를 밝히고 있었다. 겨우 15명 안팎의 사람들만 그의 주변에 남았다. 사람은 없고 할 일은 많은 탓에 나에게는 언론부장, 조직부장, 학생사업단장, 청년실업운동본부 상황실장, 기획부장, 대표 수행비서 등 온갖 직책이 맡겨졌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고 진보정당 건설을 호소했다. 총학생회 생활방에서 자기도 하고, 낡은 하숙방, 남의 집 문간방에서 자기도 했다. 숙박비가 없어 여관에서 자는 경우는 드물었다. 당연히 칫솔은 내 고단한 진보정당 건설 여정을 묵묵히 증거하며 출장 가방 안에 늘 있어야 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을 하면서 진보정당의 첫 원내 대변인으로 시작한 대변인 노릇을 2007년 12월 대선 때까지 수행했다. 나를 임명할 때의 지도부는 이른바 평등파 지도부였는데, 중간에 자주파 지도부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평등파인 내가 대변인 직을 사임하겠다고 하자 언론사업의 공백을 우려한 자주파 쪽에서 계속 역할을 맡아달라고 했다. 고민 끝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대신 대변인 책상에 있던 다른 물품을 모두 치웠다. 언제든 책상 위에 쌓인 논평 자료나 회의 자료 정도만 정리하면 떠날 수 있도록 신변정리를 해둔 것이다. 대신 책상 속 칫솔 하나는 남겨두었다. 낡은 칫솔 하나가 내가 현재 대변인실에 거소를 두고 있음을 증거했던 것이다. 나름의 각오를 표현하고 있었다.

1994년 서울지하철 총파업, 1998년 정리해고 반대 노동자대회, 2001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민중대회 등으로 세 번의 징역생활을 했다. 징역살이 징하게 하면 남들 다 빠지는 군대도 고스란히 다녀왔다. 현역으로 복무했고 특명이 늦게 떨어져 5일이나 더 군복을 입고 있었다. 칫솔이 단지 이를 닦는 데 쓰는 것이 아님을 감옥과 군대에서 배웠다. 칫솔을 갈아 다양한 용품으로 쓰는 빵잡이들의 작업능력은 놀라운 수준이었고 빨래, 군화 닦기, 침상 청소 등에서 칫솔은 늘 쓰이는 물품이었다. 사람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전문적으로 청소하기도 하지만 가장 지저분한 화장실 변기도 그 칫솔질로 청소한다. 사람도 칫솔도 어떤 일에 쓰이느냐에 따라 팔자가 달라진다. 나의 20대와 30대 초반은 화장실 청소를 맡았던 칫솔처럼 고단하되 묵묵해야 했다.

내 이를 돌봐주는 서울 연신내 함박웃음치과 모 원장은 늘 내 치아의 건강 상태를 칭찬한다. 안 봐도 안다면서 칫솔질을 꾸준히 한 덕이라고 한다. 맞다. 언제나 손 닿는 곳에 칫솔이 나를 기다린다.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나는 누군가에게든 어느 목적에게든 칫솔만큼이나 유용하게 잘 쓰이고 있는지 되묻는다. 혹 시원치 않은 칫솔처럼 잇몸이나 아프게 하고 칫솔모가 빠지듯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글을 쓰기 전엔 나의 머스트 해브이면서 머스트 해브였는지도 몰랐던 칫솔에게 미안하다. 쏘리~ 숱한 날을 함께한 나의 칫솔들이여.

혁신과통합 중앙상임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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