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컷. 소니픽처스코리아 제공
*이 글은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주요 장면과 결과에 대한 정보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집회에서 “나는 선의의 순환을 원한다”는 문구가 적힌 깃발을 봤다. 웹소설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에 나오는 문장이라고 한다. 선의가 또 다른 선의로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이 소설은 겁 많고 유약하지만 타인을 돕기 위해 용기를 낼 줄 아는 주인공이, 해저 기지가 물에 잠기는 재난 속에서 ‘선의의 순환’을 믿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원한다’는 서술어가 신선하게 들렸다. ‘선의는 순환한다’가 아니라 ‘선의가 순환하기를 원한다’는 표현은 다시 말해 그것이 일종의 실천의 영역에 있음을 의미한다. 선의는 순환하지 않을 수 있고, 어쩌면 많은 경우 그렇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순환되기를 원한다는, 혹은 순환돼야만 한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악하다’는 말을 설명하는 데는 별 복잡한 부연이 필요 없다. 듣는 사람도 당연한 말을 왜 하냐며 듣고 흘릴 정도다. 그런데 ‘사람은 본래 선하다’는 말은 인간종의 역사를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거나 온갖 실증적 사례를 긁어모아야 비로소 약간이나마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 난망함을 견디지 못해 차라리 선의를 계산의 영역으로 해석하는 설명도 있다. “순수한 호의는 돼지고기까지” 같은 말이라든지.
난망함을 덜어내자고 ‘본래’라는 말을 빼도 마찬가지다. 생존이 걸린 재난 상황에서 인간이 선한 행동을 자발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의심한다. 그러니 악의는 언제나 진리의 영역을 점령하지만, 선의는 영원히 의지와 실천의 영역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하지만 어떤 작품은, 정확히는 그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는 선의를 믿음의 영역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다. ‘나는 선의의 순환을 믿는다.’ ‘원한다’는 말과 같은 듯 다른 이 말은, 선의는 인간에게 이미 내재됐으며, 그것은 또한 당연하게도 순환하리라는 강한 확신의 표현이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속 로키의 모습. 영화 티저 영상 갈무리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이 이야기를 하기에 꼭 들어맞는 작품이다. 미국의 에스에프(SF) 소설가 앤디 위어의 원작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는 시종일관 낙관주의와 선의에 대한 긍정이 묻어나온다. 한 인간이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 11.9광년 떨어진 항성계에서 홀로 분투하는, 지독하게 고독하고 불가능으로 가득한 이야기인데도 그렇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기억을 잃은 채 우주선 안에서 깨어난 과학자 라일랜드 그레이스가 단편적으로 되살아나는 기억으로 자신의 처지를 파악해나가며 시작된다. 그가 여기 온 이유는 ‘아스트로파지’ 때문이다.
어느 날 태양계에 나타난 이 미지의 생물체는 태양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습성이 있다. 그 습성으로 인해 태양은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지구는 수십 년 안에 빙하기를 맞고 인류는 멸망한다. 전세계의 공동 연구 끝에 인류는 주변 항성 중 유일하게 에너지를 잃지 않는 ‘타우세티’에 단서가 있다고 판단했고, 그레이스를 비롯한 세 사람을 그곳에 보내기로 했다. 귀환 연료까지 실을 방법이 없었기에 사실상 ‘자살 임무’였다.
함께 온 두 대원은 혼수상태에서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홀로 남겨진 그레이스는 막막한 상황에서 뜻밖의 존재를 발견한다. 또 다른 우주선, 또 다른 지성체. 온몸이 바위 모양인 외계인이 신이 난 몸짓으로 그레이스에게 다가온다. 그레이스도 이내 긴장을 풀고, 둘은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언어를 맞춰간다. 그레이스는 그에게 ‘로키’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로키의 항성계 역시 아스트로파지로부터 위협받고 있었다. 그도 같은 목적으로 타우세티에 왔는데, 동료를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 과학자인 그레이스와 엔지니어인 로키는 서로의 지식과 기술을 나누며 협력하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둘은 서로에게 위로가 돼주며 깊은 우정을 쌓아간다. 위기에 빠진 그레이스를 로키가 죽음을 각오하며 살려내고, 다시 죽어가는 로키를 그레이스가 살려내는 장면도 위태롭지만 아름답게 그려진다.
결국 둘은 아스트로파지를 억제할 방법을 찾아내어 각자의 행성을 살리기 위해 헤어지는데, 그레이스는 지구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이 찾아낸 방법이 로키를 해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대로 지구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지구로 돌아갈 연료를 포기하고 로키를 살리러 갈 것인가. 이 갈림길에서 그레이스는 후자를 택했다. 그레이스는 로키에게 향해 그를 다시 한번 살려냈다. 그리고 남은 생을 로키의 행성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하며 이야기가 끝난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컷. 소니픽처스코리아 제공
영화 속에서 중요한 반전이 하나 있다. 그레이스가 자살 임무의 대원으로 선발된 경위다. 기억을 잃은 그레이스는 자신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 이 임무에 자원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뒤늦게 찾아낸 기억은 전혀 달랐다. 원래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던 과학자가 사고로 죽고 더 이상 발사를 지체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레이스는 끝까지 임무를 거부했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이유로 강제로 혼수상태에 빠져 우주에 오게 된 것이었다. 이 기억을 되살려낸 그레이스는 배신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결국 그레이스는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만큼 고귀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겁쟁이였고, 소시민에 더 가까운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지의 존재인 로키와 우정을 쌓았다. 그리고 로키를 살려내기 위해 지구 귀환을 기꺼이 포기했다. 지구의 인류는 그레이스를 배신했지만, 로키는 그레이스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로키가 그레이스에게 내민 우정은 그레이스의 우정으로 순환돼 로키를 살렸다.
작중에서 그레이스가 임무에 자원한 대원에게 “어떻게 이런 용기를 내느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그 대원은 “희생할 만큼 소중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가족도 연인도 없는 그레이스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제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로키라는 소중한 존재를 얻었기에, 그레이스는 뒤늦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원작자 앤디 위어는 이동진 평론가와 한 인터뷰에서 영화 속 낙관주의가 “이상적 사회관”이 투영된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한다. “나는 인류를 높게 평가한다. 인간을 그런 식으로 묘사하는 게 허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은 함께 모여 서로를 돕는다. 그리고 그것이 본질적으로 인류로서 우리의 모습이다. 그저 현재 우리 모습에 대한 나의 믿음일 뿐이다.”
위기의 순간에 서로 도울 것이라는 믿음. 우리가 어느 순간 잃어버린, 마치 불가능하거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기고 있는 그 믿음. 앤디 위어는 그 믿음을 이리저리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그 단호한 태도가 어째선지 위안이 된다.

악뮤의 신곡 ‘소문의 낙원’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영상 갈무리
이런 낙관을 ‘악뮤’의 최근 노래들에서도 발견한다. 2025년 이찬혁이 발표한 ‘멸종위기사랑’은 제목에서나 노랫말에서나 한때 사랑이 있었던 인류가 점점 그것을 잃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사이사이에 숨은 노랫말이나 가스펠을 차용한 형식을 함께 보면 도리어 어떤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이찬혁은 “내일이면 인류가 잃어버릴 멸종위기사랑”을 말하지만, ‘내일이면 잃어버린다’는 바꿔 말하면 한때 우리에겐 사랑이 많았고(“한 사람당 하나의 사랑이 있었대”), 적어도 오늘까지는 분명히 사랑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후렴이 지나가고 코러스와 함께 부르는 브리지 파트의 가사는 더욱 명확하다. “누가 여전히 사랑을 위해 노래 부를 거야?/ 사람들/ 어떻게든 되찾아야지”(Who’s still gonna sing for the love?/ People/ Revive it somehow) 사랑을 믿는 이찬혁은 그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의심치 않는다.
7년 만에 컴백한 악뮤의 신곡 ‘소문의 낙원’에도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잔뜩 묻어 있다. “따뜻한 수프와 고기”가 있고 “당신의 불치병은 존재할 수 없”는 낙원은 소문으로만 전해지지만, 이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하는 이들은 “모두 그곳을 찾아 떠나왔”다. 그들이 다다랐다는 것은 낙원이 더 이상 소문만으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낙원은 “겁쟁이는 절대 모를 세상”이다. 그 존재를 믿고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온 자들만이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용기 있는 사람들만이 낙원에서 평화를 찾는다.
선(善)이 가장 노골적인 냉소의 대상이 된 시대에 여전히 그 가치를 믿는다고 말하는 영화와 노래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받는다. 선의를, 우정을, 사랑을 믿는다. 믿지 않으면 어쩔 텐가. 그것들이 지금도 가치 있게 존재한다고 믿는 세상이 그 반대편의 세상보다 더 아름답고 밝다면 그것을 믿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겁쟁이는 절대 모를” 그 세상을 나는 기꺼이 믿어보기로 한다. 단호하게 선의와 우정과 사랑을 믿어보기로 한다. “어떻게든” 그것들을 되찾기 위해 애써보려고 한다. 그래, 이것은 그저 ‘믿음’이다. 믿지 않으면 안 되고, 믿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 믿는 것이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컷. 소니픽처스코리아 제공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제목이 된 ‘헤일메리’는 미식축구에서 경기 종료 직전 패배 위기에 몰린 팀이 최후의 수단으로 던지는 도박성 롱패스를 뜻한다. 영화 속 헤일메리는 성간 여행이면서 동시에 미지의 존재와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전쟁의 포화가 온 지구에 울리고 사회 곳곳에서 절망의 신음이 들리는 2026년, 우리의 헤일메리도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강남규 ‘토론의 즐거움’ 멤버·‘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컷. 소니픽처스코리아 제공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그레이스와 로키가 교감하는 모습. 티저 영상 갈무리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원작 책 표지.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속 한 장면. 티저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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