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남 제공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게 치과에서 쓰는 마취용 주사다. 스테인리스 쟁반에 놓인 팔뚝만 한 마취주사기의 기다란 바늘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치과의사들의 각별한 관심을 받아온 데서 비롯된 일종의 트라우마다. 몇 주 전 어금니 하나를 포기할 때 얘기다. 심호흡을 하고 진땀을 흘리며 치과의자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강렬한 피아노 연주가 나오는 게 아닌가. 원래 치과병원에선 나지막하고 은은한, 이른바 ‘치과 전용 음악’이 나오는데, 이날은 너무나 뜻밖에도 영화 의 OST 마이클 니먼의 연주가 들렸다. 영화 자체가 인간 영혼의 아주 깊은 부분을 마구 들쑤시는데다 피아노 연주곡들이 처절하고 격렬해 경우에 따라서는 듣기 힘들 정도로 과격한데, 이날은 달랐다. 그 곡들이 귓속에 쏙쏙 들어오는 게 아닌가! 문득 가슴 아팠던 일이 떠오르고 피아노 음률이 마치 묘약같이 스며들었다. ‘아, 음악치료라는 게 이런 거구나’ ‘아플 때는 아픈 음악이, 슬플 때는 슬픈 음악이, 우울할 때는 우울한 음악이 약이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집에 낡은 피아노가 한 대 있다. 아마 1985년쯤이었을 텐데 가난한 유학생 시절, 그때 5살 된 큰딸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었다. 책 한 권 두께의 일간지 일요일판 광고 섹션을 몇 주간 보며 괜찮은 중고 피아노를 찾았다. 드디어 괜찮은 게 하나 나왔다. 직업 연주가가 10여 년 쓰던 건데 해외로 이주하며 팔려고 내놨다는 거다. 그런데 팔겠다는 사람의 집이 내가 사는 곳에서 한 70마일 떨어진 시골이었다. 운반이 난감했다. 미국 친구가 내 사정을 알고 자신의 픽업트럭을 갖고 다른 친구 몇 명과 함께 그걸 싣고 왔다. 역시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한 것이다. 1천여달러 준 것 같은데, 당시 네 식구가 한 달에 800달러 정도로 살았으니 엄청난 투자였다. 아무튼 그 피아노를 산 뒤로 미국에서만도 5번을 이사했고, 1995년 15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이후로는 국내에서만 7번을 이사했다. 그때마다 피아노는 늘 나와 함께했다. 내가 가족들과 떨어져 살게 되었을 때도 피아노만큼은 반드시 데리고 다녔다.
며칠 전, 탁월한 음악 해설가인 한 친구가 태풍을 보내고 나서 음악 선물을 보내왔다. 쇼팽의 (야상곡) G단조 OP.37-1. 이 곡은 많이 들어서 익숙한 편인데, 그 친구는 음표와 음표 사이의 여백을 가장 잘 표현한다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연주이니 들어보라고 했다. 음표와 음표 사이의 빈 공간을 음 아닌 음으로 채워넣는 루빈스타인의 연주를 들으며 드는 생각, 귀(耳)가 제대로면, 성즉시공 공즉시성(聲卽是空 空卽是聲)이다! 내 낡은 피아노는 쳐다보기만 해도 좋다!
이병남 LG인화원장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탄핵 재판 선고 다음주로 넘어가나
광화문 앞 15만명 “새봄에는 새나라로” 윤석열 파면 촉구
민주 “윤석열 파면에 집중”…심우정 검찰총장 탄핵 유보
[단독] 배우자 상속세 폐지 땐, 0.1% ‘초부자’만 혜택 본다
대검 “구속기간 산정 ‘날’ 단위 유지…구속 취소시 즉각석방” 지시
도올, 윤석열 파면 시국선언…“헌 역사의 똥통에서 뒹굴 이유 없다”
수방사, 작년 총선직후 헌재 도면 확보…윤 “비상대권” 언급 시기
휘성 비보에 예일대 의대 교수 “한국엔 이곳 터무니없이 부족”
전세계 홀린 16살 발레리노 박윤재 “‘좋은 다리’란 칭찬이 제일 기뻐”
삭발·단식·밤샘…“윤석열 파면” 시민들 총력 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