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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집단지성의 결정판

박은석의 ‘위키 오프라인’ 앱
등록 2013-01-11 11:06 수정 2020-05-03 04:27
944 머스트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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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전을 좋아한다. 사전(辭典)이건 사전(事典)이건, 특정 주제를 항목별로 색인한 종류의 책을 선호한다. 서가만 슬쩍 훑어봐도 수십 종의 사전이 책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백과사전의 대명사였던 브리태니커 영문판 전집은 당연하고, 철학사전, 신화사전, 세계문학사전, 미술용어사전, 사회과학사전, 할리우드배우사전, 20세기 문화인물사전, 문화비평용어사전, 세계만화대백과, 캐릭터인물사전에다, 심지어 앰브로스 비어스의 이나 미래생활사전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내가 이토록 사전을 좋아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지식 욕구와 실천 능력 사이의 괴리 때문이다. 요컨대 나처럼 호기심은 많으나 천성적으로 게으른 자에게 사전은, 배가 고파도 상을 차리기는 귀찮은 자에게 햇반이나 사발면이 그렇듯,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는 ‘마음의 인스턴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전에 대한 나의 태도는 물론, 매일같이 나폴레옹 법전을 읽으며 정치한 문장을 가다듬는 데 노력을 경주했다는 스탕달이나 백과사전을 통째로 읽어냄으로써 지식의 갈증을 채우고자 했던 A. J. 제이컵스와는 차원이 다른(구체적으로 말해서 ‘매우 유치한’) 수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제이미 올리버와 대학입시 삼수생이 컵밥의 가치를 반드시 공감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내겐 언제나 궁금증의 신속한 해결이야말로 최상의 미덕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의 사전신봉자 이력에 격변을 가져온 것이 바로, 이 글의 소재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위키피디아의 등장이었다. 문자 그대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2013년 1월 현재 영문판에만 410만 건 이상의 항목이 등재된 이 인터넷 사전은 게다가,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빠른’ 혹은 ‘신속한’을 의미하는 그 이름조차 나의 욕구에 부합했다. 한 가지만 빼고는 모든 게 완벽했다.

‘위키 오프라인’은 위키피디아의 바로 그,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유일한, 약점이라고 할 이동성의 문제를 해결해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다. 이 앱은 무엇보다, 와이파이건 LTE건 그 어떤 통신망도 연결되지 않은 오프라인 상태에서 위키피디아의 모든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의외로 단순하(지만 좀 과격하)다. 간단히 말해서 위키피디아의 모든 내용을 문서파일로 압축해서 스마트폰에 저장하는 방식인데, 영문판 용량만 4GB에 달한다. 내려받기에 족히 30여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21세기 집단지성의 결정판을 9.99달러에 사들이는데 그 정도 수고쯤은 대수가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오히려, 그걸 루돌프 사슴의 서식 지역이나 진저 린의 필모그래피 따위 시시콜콜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나 사용하고 있는 나의 활용 방식일 터다.

박은석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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