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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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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향한 연민, 여성 앞에선 뒷걸음치는 ‘모자무싸’

박해영 작가의 신작 ‘모자무싸’
형제애로 똘똘 뭉친 남성 공동체… 가부장제에 의해 비판 대상 되는 ‘엄마들’
등록 2026-05-07 22:07 수정 2026-05-10 17:41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JTBC)는 20년째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 중인 황동만(구교환)과 영화사 기획피디 변은아(고윤정)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스틸컷 출처. 스튜디오 피닉스, SLL, 스튜디오 플로우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JTBC)는 20년째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 중인 황동만(구교환)과 영화사 기획피디 변은아(고윤정)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스틸컷 출처. 스튜디오 피닉스, SLL, 스튜디오 플로우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가 시작되면 어디선가 논쟁의 장이 함께 열린다. 이번에도 그렇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JTBC, 이하 ‘모자무싸’)가 방영되는 날이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정반대의 감상들이 올라온다. 고백하자면, ‘나의 아저씨’(tvN)를 ‘인생 드라마’로 꼽는 사람과 나 사이에 건너기 힘든 강이 있다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취향과 정서의 다름 때문이다. 또 하나 고백하자면, 나는 박해영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 시트콤 작가일 때부터 좋아했고, 새 작품이 나올 때면 설레기까지 한다. 동시에 복잡한 감정이 생긴다. 그의 작품이 남성적 응시와 판타지를 반영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저씨’를 비롯해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 중 하나다. 누군가의 ‘인생 드라마’를 여러 편 만들어냄과 동시에 단호한 불호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는 논쟁적 작가다.

 

양가감정이 생기는 이유

 

‘모자무싸’는 20년째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 중인 황동만(구교환)과 영화사 기획피디 변은아(고윤정)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잘나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만 못 나가 시기와 질투로 미쳐버린 인간이 있다”는 제작진의 소개처럼, 동만은 영화인들로 구성된 ‘8인회’ 중 유일하게 데뷔하지 못한 인물로 주변에 민폐를 끼치며 위악을 일삼는다. 그런 동만과 얽히게 되는 은아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을 했고, 직장에서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고립돼 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을 보여준다. 동만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어 하는 ‘길티’(guilty)한 감정인 지속적인 실패감, 인정에 대한 허기, 질투에 돌아버린 악플러 심리, 교통사고를 신나 하며 지켜보는 파괴적 본능을 날것으로 드러낸다. 은아는 우리가 가진 근원적 불안과 냉소,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갈망을 표현한다.

8인회 멤버들 또한 각자의 ‘무가치함’과 싸운다. 동만과 가장 거세게 갈등하는 영화감독 박경세(오정세)는 다섯 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불안과 열등감을 가졌다는 면에서 동만과 ‘동족’에 가깝다. 그의 아내이자 영화사 대표인 고혜진(강말금)은 경세와 동만을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그들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어쩌면 혜진이 싸우고 있는 무가치함이란, 이 두 남성을 ‘어른’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노력 자체 아닐까. 동만의 형 황진만(박해준) 역시 꿈과 삶이 무너진 폐허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박해영 작가는 세상의 기준에 밀려 외면받는 인간들을 이해하게 하는 탁월한 힘을 가졌다. 하지만 작가의 연민은 젠더 앞에서 자주 뒷걸음질하는데, 극 중 은아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있으며 직장에서도 고립돼 있다.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컷. 출처 스튜디오 피닉스, SLL, 스튜디오 플로우

박해영 작가는 세상의 기준에 밀려 외면받는 인간들을 이해하게 하는 탁월한 힘을 가졌다. 하지만 작가의 연민은 젠더 앞에서 자주 뒷걸음질하는데, 극 중 은아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있으며 직장에서도 고립돼 있다.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컷. 출처 스튜디오 피닉스, SLL, 스튜디오 플로우


‘찌질이’를 이해하게 하는 힘

 

박해영 작가는 세상의 기준에 밀려 외면받는 인간들을 이해하게 하는 탁월한 힘을 가졌다. 그 힘의 원천은 보편성에 있다. “처음엔 내 일기장을 들킨 것 같았으나, 끝까지 읽어보니 남의 일기장을 훔쳐본 듯한 지독하게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배우 구교환의 말처럼, 보편성을 가졌기에 박해영 작가의 작품들 속 인물들은 ‘나’와 동일시하기 쉽다. ‘나의 아저씨’를 본 중년 남성들이 난데없이 자신을 안쓰럽고 무해한 아저씨라 여기거나, ‘나의 해방일지’(JTBC)의 “계란 흰자” 발언이 수많은 경기도민의 심금을 울리며 단박에 ‘산포시 삼 남매’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했던 것처럼.

동일시의 주된 감정은 연민이 아닐까. 만약 감정 워치를 차고 ‘모자무싸’를 본다면, 그 워치는 빨간색으로 변하며 ‘연민’이란 단어를 띄워줄 것만 같다. 보기 불편하긴 하지만, 동만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퍼펙트하게 가난”하고, “걸어다니는 시체” 같다는 말을 들으며, 성공한 친구들 사이에서 멸시를 당해 “잘나서 나를 증명할 수 없을 때는 망가져 나를 증명한다”고 위악을 부리는 존재를 어떻게 연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동만의 얼굴이 곧 내 얼굴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면서 ‘가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는가. 드라마를 보는 순간만큼은 내 손에, 그리고 누군가에게 500원짜리 동전을 쥐여주고 싶은 심정이 된다. 동만과 은아가 감정을 ‘크로스’하며 서로를 안아주듯, 인간이 인간을 연민하며 한편이 되어주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보편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보편이 모두에게 타당한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박해영 작가의 연민은 젠더 앞에서 자주 뒷걸음질한다. 그의 작품에서 남성들에게는 이해와 연민의 단서가 촘촘히 주어지고, 그들을 품는 형제애와 남성 공동체가 존재한다. ‘모자무싸’에도 동만을 불편해하지만 8인회라는 공동체와 동만·진만의 형제애가 있다. 서로를 지긋지긋해하면서도 필요로 하는 남성 동성 사회는 해체되지 않는다.

 

남성에게만 있는 형제애와 공동체

 

여성은 다르게 배치된다. ‘또 오해영’(tvN)의 오해영(서현진),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이지은),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김지원), 그리고 ‘모자무싸’의 변은아까지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홀로 고립돼 있다. 예를 들면, 그의 작품들에는 직장에서 주인공 여성을 뒷담화하며 고립시키는 장면이 반복되는데 ‘모자무싸’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런 재현이 반복될 때, 고립의 원인은 구조가 아니라 여성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지게 된다. 남성 동성 사회는 애틋하게 존재하는 반면, 여성들의 연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그 부재의 자리에 종종 또 다른 여성이 가해자로 놓인다. 이 드라마에서는 ‘엄마’다.

물론 어릴 때 엄마에게서 유기된 경험이 은아를 고립된 존재로 만들었다는 건 이해된다. 그러나 엄마에게 버림받은 인물이 마냥 우울하거나 냉소로 가득하다는 것 또한 편견 아닐까. 그것이 전적으로 엄마의 부재 때문이라는 단정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은아의 말처럼 “이응, 어, 미음, 미음, 아”라는 단어가 과장돼 있다면, 박해영 작가의 작품 속 엄마는 그 반대 방향으로 왜곡돼 있다. 그의 작품들에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탈락한 아들을 한없이 가엽게 여기거나(‘나의 아저씨’), 밥 짓다 죽어서야 비로소 해방되거나(‘나의 해방일지’), 아이를 유기하고 난 후 배우로 성공하거나 이혼 후 딸을 입양 보내는(‘모자무싸’) 엄마들이 주로 등장한다. 이들은 가부장제의 기대와 필요에 의해 대상화되고, 때로는 피해를 입은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은아는 자신을 버린 엄마를 증오한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역할에 대한 기대는 놓지 않는다. 어떤 인간이 되고 싶냐는 진만의 질문에 은아는 이렇게 답한다. “힘 있는 엄마요. 저는 힘 있는 엄마가 될 거예요. 돈 있고 빽 있어서 힘 있는 거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중심에 서 있는,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도 안심하게 해주는 그런 엄마. 그런 여자가 될 거예요.”

 

박해영 작가의 작품에는 남성을 향한 이해와 연민의 단서가 촘촘히 주어지고, 그들을 품는 형제애와 남성 공동체가 존재한다. ‘모자무싸’에도 동만을 불편해하지만 8인회라는 공동체와 동만·진만의 형제애가 있다.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컷. 출처 스튜디오 피닉스, SLL, 스튜디오 플로우

박해영 작가의 작품에는 남성을 향한 이해와 연민의 단서가 촘촘히 주어지고, 그들을 품는 형제애와 남성 공동체가 존재한다. ‘모자무싸’에도 동만을 불편해하지만 8인회라는 공동체와 동만·진만의 형제애가 있다.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컷. 출처 스튜디오 피닉스, SLL, 스튜디오 플로우


고립된 여성 앞에는 아저씨나 오빠가

 

은아가 처음으로 내비친 인간으로서의 바람이 ‘엄마'이고 ‘여자'라는 것. 이 서글픈 바람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여성의 상처 근원에 또 다른 여성이 놓이는 구조, 그 상처를 동만을 향한 사랑으로 치유하려는 지향 등은 결국 여성을 언제나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는 돌봄의 존재로 바라보는 가부장제의 시선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은아는 헤어진 연인에게서 무례한 연락을 받은 직후 이렇게 말한다.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어. 아주 지랄맞은 오빠.” 엄마도, 동료도, 공동체도 부재한 자리에 오빠가 들어선 것이다. 박해영 작가 작품들에서 고립된 여성이 빠져나올 방법은 결국 무해한 아저씨나 오빠의 이해와 추앙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그 여성을 위한 일일까, 남성의 판타지일까.

‘모자무싸’에서 진만과 혜진이 동만에게 반복하는 말이 있다. “여자 만나라.” 마치 그게 유일한 해결책인 것처럼 불안한 남성에게도, 고립된 여성에게도, 드라마가 제시하는 답은 결국 사랑이다. 작가는 사랑이 아닌 다른 단어를 사용하며 세속적 사랑과 차별성을 두려 하지만, 어른이 되지 못한 남성에게 하는 충고가 “여자 만나라”인 것은 어떻게 봐도 고루하다. 그 고루한 배치 속에서 여성은 동성 관계를 형성하거나 공동체를 만나지 못한다. 남성들과 연민 혹은 추앙을 공유하며 평안, 해방, 안온을 경험할 뿐이다.

이런 설정이 많은 이에게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너무도 익숙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평판과 폭력 등으로 여성을 피해자로 만들어 고립시키는 것, 구조적 문제를 여성끼리의 적대로 대체하는 것, 전형적인 아내나 엄마의 역할을 요구하거나 그 범주를 벗어나면 비난하는 것, 남성의 구제를 위해 여성의 사랑과 추앙이 동원되는 것 등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직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모자무싸’의 재현 역시 현실 반영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을 반영하는 것과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설계하는 것은 다르다. ‘모자무싸’는 후자에 가깝다.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컷. 출처 스튜디오 피닉스, SLL, 스튜디오 플로우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컷. 출처 스튜디오 피닉스, SLL, 스튜디오 플로우


‘모두가’ 단어가 보여준 한계

 

제목은 ‘모두가’라고 했지만, 드라마 안에서 연민을 받는 사람, 공동체를 가진 사람, 이해의 단서를 부여받은 사람은 균등하지 않다. ‘모두가’라는 단어가 오히려 그 한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앞서 취향과 정서의 다름이 낸 간극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단지 그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누구의 내면이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되는가, 누구에게 연민의 단서가 더 구체적으로 주어지는가, 누구에게 공동체와 사회적 연대가 허락되는가 등은 취향과 정서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다. 그 불균등함이 보편적 인간의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우리가 남성 중심적 시선과 남성 판타지에 이미 너무 익숙하기 때문 아닐까.

인간 사회가 복잡하듯, 전적으로 좋기만 한 드라마나 마냥 나쁘기만 한 드라마는 없다. 다만 어딘가에 갇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서사는 있다. ‘모자무싸’가 ‘나의 해방일지’ 다음 드라마가 아니라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 사이 어딘가에 갇힌 드라마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그럴 때 필요한 말은 이것 아닐까. “갇혔을 때 돌파하세요.”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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