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부터 아침형 인간이 됐다. 근로조건 계약을 변경해달라고 회사에 요청한 것이 받아들여져서다. 여기서 말하는 아침형 인간이라 함은, 남들은 퇴근 뒤 집에서 보내는 저녁 시간을 나는 오전에 보낸다는 뜻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눈을 비비며 라디오를 켠 뒤 10년 된 네스프레소(캡슐을 넣어 내리는 에스프레소 머신)에 전원을 넣어 깨운다. 현관문을 열어 신문을 집어들고 탁자에 놓은 뒤 사과 반쪽을 깎는다. 그사이 달궈진 에스프레소와 끓는 물로 아메리카노를 만든 뒤 사과와 냠냠하며 신문을 본다. 세상 밖 사정을 둘러보며 정신이 들면 그제야 아침밥을 준비해 먹는다.
그러고 나서는 커피분쇄기를 꺼내 원두를 갈기 시작한다. 팔이 아프다. 커피포트에 전원을 넣어 물을 끓인다. 이 틈에 팔은 원기를 되찾는다. 다시 원두를 갈기 시작해서 커피 내릴 준비를 마친다. 향기로운 커피가 준비되면 음악을 들으며 생각을 시작한다. 생각이 곧 나의 일이기도 하고 휴식이기도 하다. 커피분쇄기는 꽤 오랫 동안 나에게 버림받아 있었다. 12년 전 집들이 선물로 받고 처음엔 정성껏 썼으나 출퇴근에 바빠 쓸 틈이 별로 없었고, 무엇보다 원두를 가는 것이 팔도 아프고 귀찮았다. 커피분쇄기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락했다.
그 뒤 미국 시애틀로 출장을 갔다. 스타벅스 1호점에서 카페라테를 산 뒤 근처 시장을 구경했다. 영화 에서 탕웨이와 현빈이 데이트했던 그곳 말이다. 그 부근 어디선가 네스프레소를 발견했고, 질렀다. ‘난 이제 아침마다 카페라테를 직접 만들어 먹을 테다!’ 스타벅스에서 커피가루를 산 뒤 호텔방으로 돌아와 일행이던 배우 문소리, 영화감독 박진표 등을 초대해 가슴 벅찬 시음회를 시작했다. 기계를 켠 뒤 커피를 내려 두근두근 맛을 봤는데, 이렇게 놀랍게 맛이 없을 수가! 매뉴얼을 들여다보다가 깨달았다. 이건 캡슐형 에스프레소 머신. 첫 번째 교훈, 기계를 사면 매뉴얼을 잘 살펴봐야 한다. 설사 영어로 돼 있더라도.
네스프레소 누리집에 회원 가입해 캡슐을 주문했다. 배송비와 관세까지 캡슐 1개당 400원 정도였고 가장 작은 우유 하나를 사면 카페라테 2잔을 만드니 남는 장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 롯데백화점에 네스프레소 한국 매장이 생기더니 한국 소비자의 인터넷 주문을 막아버렸다. 한국 매장에서의 가격은 개당 900원 안팎, 소심한 소비자는 네스프레소의 전원을 다시는 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다가 아침형 인간이 됐고, 네스프레소와 커피분쇄기를 다시 꺼내 이들을 사랑해주기 시작했다. 두 번째 교훈, 헤어졌다 다시 시작하는 연애 연장전은 대체로 실패하지만 말없는 놈과의 연장전은 성공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이들을 다시, 계속 사랑할 것 같다.
이성욱 한겨레출판 기획위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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