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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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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한 응징, 씁쓸한 뒷맛

학생을 교육 아닌 교정 대상으로 여기고 체벌 정당화… 군사주의적 세계관과 여성 도구화도 ‘유감’
등록 2026-06-18 19:07 수정 2026-06-21 09:24
드라마 ‘참교육’은 “선 넘는 학생, 교사, 학부모로 인해 무너진 대한민국의 교권과 교육 현장을 지키기 위해” 신설된 교육부 산하 교권보호국이 문제 학교에 감독관을 파견해 ‘참교육’을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참교육’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참교육’은 “선 넘는 학생, 교사, 학부모로 인해 무너진 대한민국의 교권과 교육 현장을 지키기 위해” 신설된 교육부 산하 교권보호국이 문제 학교에 감독관을 파견해 ‘참교육’을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참교육’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참교육’(넷플릭스)은 “선 넘는 학생, 교사, 학부모로 인해 무너진 대한민국의 교권과 교육 현장을 지키기 위해” 신설된 교육부 산하 교권보호국(교권국)이 문제 학교에 감독관을 파견해 ‘참교육’을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이 드라마는 사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액션극에 가깝지만, 다양한 감상이 보태지며 드라마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학폭, 조폭, 사이버 교권 침해, 시험지 유출, 악성 민원, 촉법소년, 마약과 도박, 에이디에이치디(ADHD) 약물 남용까지. ‘참교육’이 재현한 학교는 비슷한 다른 드라마들보다 소재가 다양하다. 그만큼 학교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복잡하고 심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는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현실을 재현함과 동시에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상황은 복잡하지만, 문제 해결은 빠르고 확실하다. 우리가 ‘참교육’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대리만족을 얻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참교육’은 학교에서 발생하는 문제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다. 문제적인 대상을 분명히 하고 시원하게 응징한다.

 

무너진 공교육에 ‘교권보호국’ 판타지
드라마 ‘참교육’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참교육’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단지 시원하기만 한 건 아니다. 드라마는 원작 웹툰을 향한 여러 반대 의견을 학습한 인공지능(AI)처럼 드라마 곳곳에 반론을 배치했다. ‘학생 인권’을 언급하는 이들을 향해서는 “지금 대한민국 교육은 실패”했다고 일갈하며 “교권보호국은 체벌, 아니 체벌 할아비라도 동원해서 아이들의 학습권을 지킬” 것이라고 선언한다. 너무 폭력적이라는 의견에는 “폭력은 학생 수준을 넘어섰는데 교사들에게 분필이나 들고 싸우란 겁니까?”라고 되묻는다. ‘사적 복수’라는 비판에는 “법이 못하는 걸 누군가는 나서서 복수라도 해줘야죠”라고 응수한다. 교권국의 한계를 인정하며 교사의 역할도 존중하는 모양새도 취한다. “저희만으로 학교를 바꾸는 건 그냥 일시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움직여야 되는 건 현장 선생님들이신 거죠. (…) 그러니 선생님도 선생님이길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영리한 선택이다.

그러나 드라마의 공들인 반론과는 별개로, 드라마의 선택에 우려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신이 한 행동을 고스란히 돌려받음으로써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깨닫게 하는 것,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 그게 바로 교권국이 추구하는 진짜 교육”이라는 교육감독관 나화진(김무열)의 말처럼, ‘참교육’은 교권국의 행위를 ‘진짜 교육’이라 주장한다. 정말 그게 교육일까? ‘참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그 방식이 그들의 주장과 달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현재 통용되는 ‘참교육’이라는 단어의 용례 자체가 그렇다.)

비록 문제를 일으킨 학생으로 한정하지만, 드라마는 학생을 교육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교정해야 할 범죄형 인물 혹은 응징 대상으로 여긴다. “쓰레기 같은 학교”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학교는 “학생 하나가 죽어 나가도 경찰과 사바사바해서 대충 덮어버리”거나 “학원보다 의지하기 힘든 곳”이고, 그런 곳에서 교사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학생과 학교에 대한 이런 인식은 교권국이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학교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괴물은 괴물로 잡아야” 하지 않겠냐며.

‘참교육’ 식의 교육은 현실의 문제만 드러낸 게 아니다. 민주주의와 공존하기 어려운 세계관을 제도의 영역으로 소환했다. 이에 관해서는 교권국 인적 구성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교육감독관 나화진과 임한림(진기주)은 육군특수전사령부 특수임무대대 출신이고, 교육행정직 사무관 봉근대(표지훈)는 카이스트를 조기 졸업한 프로그램·해킹 전문가다. 교권국의 수장인 교육부 장관은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다. 이 인적 구성 아래서 학교는 단순한 교육의 장이 아닌 감시와 통제, 응징의 공간이 된다. 그래서 ‘교권보호국 특별 지시 사항’에는 “지도 방식에 어떠한 제한도 없음. 감독관 지시에 무조건 따름. 명령 불복종시 어떤 불이익도 책임지지 않음” 등이 명시된다. 이건 교육기관의 운영 원칙이 아니라 군사정권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방적 명령에 가깝다.

 

감시와 통제, 응징의 공간 전락한 학교
드라마 ‘참교육’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참교육’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학교가 더는 교육의 장으로 이해되지 않고 강력한 힘으로 진압해야 할 공간으로 규정될 때 교육적 시도는 일어나지 않는다. 드라마는 극단적으로 문제적인 상황과 처벌받아 마땅한 ‘빌런’을 내세워 교권국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정당성을 만들어 초법적 권한을 부여한다. 동시에 다양한 반론과 토론,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을 삭제한다. 충분히 제기될 법한 상식적 반론은 국가정보원장 출신의 차기 대권주자 황기태(김종수)의 견제성 공격과 정치 공작으로 처리된다. 그런 반격에 대한 반론은 매회 어김없이 교육부 장관의 일방적 훈화로 선포된다. 학교가 망가졌음을 인식하는 것과, 그래서 강력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드라마는 이 두 상황을 원인과 결과로 배치해 군사주의적(militarism) 세계관을 정당화하는 방패로 삼는다.

군사주의적 세계관은 위계와 명령을 절대화한다. ‘참교육’에 반복되는 교권국 지시 사항이 대표적이다. 또한 이분법적 구도를 강화한다. 드라마는 적군과 아군을 가르듯, 피해자와 가해자, 좋은 교사와 나쁜 교사, 선량한 교권국과 교활한 정치집단, 인권과 교권, 괴물과 비괴물로 대치시킨다. 이 이분법적 세계에서 누가 괴물인지 정하는 것은 교권국이다. 그 판단의 주체와 정당성은 드라마 안에서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다. 군사주의적 세계관에서 물리적 힘은 언어이자 능력이다. 나화진과 임한림이 압도적 피지컬을 가진 군인 출신으로 설정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로 해서 듣는 놈들은 말로, 때려서 듣는 놈들은 때려서라도” 응징할 수 있는 게 ‘참교육’의 핵심 능력이기 때문이다. 속도와 효율도 능력이다. 군사작전이 빠른 결정과 즉각 집행을 요구하듯, 교권국 앞에서 민주주의적 절차와 토론, 합의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촉법소년 제도 문제를 언급하며 “70년 동안 탁상공론만 했다”고 말하는 게 대표적이다. 그 탁상공론 안에 있는 사회적 맥락은 무시된 채 무능의 증거로 사용된다.

여성을 도구화하는 것도 그런 세계관의 특징이다. ‘참교육’을 방해하는 빌런 국회의원 류광필(고 송영규)을 제압하기 위해 금품 수수와 성추행 의혹을 흩뿌리고, 인플루언서 학생 한예리(박서윤)는 ‘거짓 미투’로 교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실제 사건의 복잡한 맥락은 지워진 채, 남성의 억울함을 정당화하기 위한 악의 화신으로 소환된다. 교생으로 위장 잠입한 임한림과 여학생들이 ‘가슴’으로 기싸움한다는 내용은 전개상 불필요함에도 굳이 넣어 자극적으로 활용되고, 동급생을 괴롭힌 가해자 이치호(김재선)는 피해자 장성구(이우제)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기 위해 성구의 휴대전화 번호로 자기 여동생에게 음란물을 보낸다. 임한림이 특수부대 출신으로 출중한 무력을 갖췄지만, 귀여운 여성성과 히스테리적 면모를 보여준다는 설정이나, 봉근대와의 러브라인으로 안착하는 것도 여성 재현의 한계를 보여준다. 원작의 논란을 의식한 듯 인종차별과 성차별 장면을 공들여 순화했다고는 하지만, 여성을 향한 남성 중심적 시선만큼은 끝내 거두지 못했다.

 

‘빌런’들에 대한 폭력적 해결은 한계
드라마 ‘참교육’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참교육’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는 곳곳에 희망의 증거를 심어두기는 했다. 경찰청과 사이버 교권 침해 업무 협약을 맺는 장면을 통해 이것이 단지 교육부만의 과제가 아님을 환기하고, 현실에서는 막을 수 없었던 악성 민원 피해 교사의 죽음을 막는다. 그리고 교육부 장관은 진심으로 대국민 사과를 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싶은 장면들일 것이다. 10화에서 교권국의 직무가 정지된 후 교사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장면도 감동적이다. 이 장면이 감동적인 이유는 드라마가 줄곧 회의적으로 여긴 교육의 가능성이 그 순간 잠깐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이 가능성을 교권국 부재라는 예외 상태에서만 허용한다. 교권국이 돌아오면서 그 가능성은 다시 닫힌다.

드라마가 재현한 교육 현장의 문제는 반복되고 있고, 그 반복은 사회 체제에 대한 불신과 절망을 강화한다. ‘참교육’이 사적 복수의 문법을 공적 기관의 외피로 감싼 것도 그 불신의 산물이다. 법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절망이 역설적으로 더 강력한 공권력에 대한 욕망을 만들어낸 것이다. 압도적 힘을 통한 감시와 통제, 응징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드라마는 그 욕망에 응하면서 폭력을 체계화했고, 또 다른 딜레마를 만들었다.

홍종찬 감독은 “답안이 아닌 질문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지만, 드라마는 답안을 유출했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하는 응보적 정의 말이다. 그러나 그 답안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진짜 질문은 뒤로 밀린다. 시원한 사이다 드라마를 두고 텁텁한 마음이 남는 이유는, 학교를 망치는 진짜 빌런은 드러내지도 못한 채 눈앞의 극단적 빌런을 힘으로 응징하는 걸 ‘참교육’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민원 만능주의, 능력주의, 여성과 약자 혐오, 계급사회를 공고히 하는 구조는 성찰하지 않은 채 빌런을 해치우는 걸 ‘참교육’이라고 명명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힘을 앞세워 문제적 학생과 교사, 양육자를 응징하는 교권국을 만들면 되는 걸까?

 

‘참교육’의 진짜 의미를 묻다
드라마 ‘참교육’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참교육’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놀랍게도 드라마 공개 이후 일각에서는 ‘교권보호국’ 설치를 논의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경기도교육감 당선자에게는 특수부대 출신 교사들이 ‘나화진’이 되고 싶다는 연락을 했다고도 한다. 드라마 속 군사주의적 세계관이 현실과 그리 멀지 않다. 이렇게 응보적 정의에 환호하고 청소년 극우화가 우려되는 사회에서, 실제로 교권국이 생긴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참교육’이라는 이름은 원래 권위주의적 교육에 맞선 저항의 언어로 태어났다. 이 드라마는 그 이름을 달고 저항의 대상이었던 세계관으로 학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다. 그래서 ‘참교육’은 위험한 드라마다. 교육과 가장 먼 방식으로 교육의 본질과 가능성을 참칭하기 때문에. 이런 시도에 ‘참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까?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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