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손가방이 하나 있다. 검정색이다. 구식이지만 흔한 가방이다. 10여 년 전 성균관대로 출강할 때 아내가 기념으로 사주었다. 내 소박한 꿈의 하나가 단재 신채호 선생을 닮는 것이었다. 주필에 이어, 단재가 박사가 된 성균관대에서 강의 요청을 받고 기뻐하자 아내가 선물한 것이다.
이 가방은 나의 분신이다. 외출을 할 때나 어쩌다 해외를 가게 되면 필수 지참품이다. 지난 7월 조선의용대가 일제와 처절하게 싸웠던 중국 타이항산을 답사할 때도, 지난해 신흥무관학교 100돌 현지 답사에도 동행했다. 심지어 주례를 서려고 예식장에 갈 때도, 장례식에 참석할 때도 함께한다. 언젠가 베트남 호찌민 공항에서 여권을 돌려받지 않고 나와서 애를 태웠으면서도 이 가방만은 놓치지 않았다. 남들이 생각하면 무슨 보물단지라도 들었는가 하겠지만 사실은 별것 없다.
용도는 다양하다. 우선 읽을거리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버스나 전철을 탈 때 읽을 책이나 신문을 넣고 다닌다. 안경이 들어 있고, 메모지와 필기구가 자리잡는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는 냉동한 작은 물병도 들어간다.
이런 것들은 주머니에 넣어도 될 텐데 굳이 가방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헌책방 순례다. 행사나 약속이 끝나면 비가 오나 더위로 푹푹 찌나 헌책방을 찾는다. 물질만능의 세태에 따라 고서점·헌책방 수가 크게 줄었지만 아직도 서울 곳곳에는 책방이 적지 않다. 나이깨나 먹은 처지에 마치 대단한 공부나 하는 양 손에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러나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면 누가 알겠는가,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내 가방은 지난 십수 년 동안 자신의 작은 뱃속에 어림이지만 1만여 권의 책을 품었지 싶다.
이명박 정부 들어 사회활동이 거의 차단되자 내 가방의 ‘노역’은 더 심화됐다. 헌책방을 찾는 날이 많아진 까닭이다. 운수 좋은 날은 배불뚝이가 되고, 그렇지 않은 날은 홀쭉이 신세를 면치 못한다. 가방의 배가 부르면 주인의 기분이 좋아진다. 내 오른쪽 어깨가 축 처진 날은 운수 좋은 날이다.
지난해 한국출판협회가 준 ‘올해의 모범장서가상’을 받았는데, 절반의 공은 이 가방의 노고가 아닐까 싶다. 주인 잘못 만난 인연으로 허구한 날 뱃속에 곰팡이 핀 헌책이나 넣고 다녔으니 푸념을 할 만도 한데 여전히 달관의 모습이다. 연륜이 붙자 손잡이가 벗겨지고 약간은 퇴색됐지만 아직도 멀쩡하다. ‘고색창연’까지는 아니더라도 활용 가치는 충분하다. 이렇게 말하면 ‘분신’이 서운해할지 모른다. “정이 너무 많이 들어서 쉽게 헤어지기 어렵다”가 정답이겠다.
연초에 아들 녀석이 아비의 낡은 가방이 보기에 민망했던지, 생일 선물로 더 크고 멋진 가방을 사왔다. 하지만 아들아 어쩌겠느냐, 내 서재의 공신이고 내 메마른 영혼의 마중물 역할을 해온 분신을 어찌 버릴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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