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대 퀴어 소녀의 성장담을 그린 영화 ‘여름의 카메라’ 포스터. 싸이더스 제공
청춘의 사랑은 ‘찰칵’ 하는 필름 카메라의 셔터 소리에서 시작됐다. 기다림 끝에 필름을 인화해 사진을 건네는 게 고백이 됐다. 10대의 첫사랑은 ‘여름’의 짙푸른 녹음처럼 싱그럽고 찬란했지만, 또한 변덕스러웠다. 언젠가 돌이켜보면 이 사랑도 시간이 꾹꾹 눌려 담긴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하지만 반가운 추억이 될까. 소녀는 그렇게 한 뼘 더 자랐다.
영화 ‘여름의 카메라’는 고등학생 ‘여름’의 첫사랑 이야기이자 성장담이다. 퀴어 코드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여느 청춘의 사랑이 그렇듯 풋풋하고 향기롭다. 러닝타임 내내 강렬한 초록빛을 뿜어내는 스크린을 보며 ‘나에게도 저렇게 펄떡이는 푸른 시절이 있었나’ 싶어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첫 장편영화 개봉을 앞둔 ‘성스러운’(39) 감독을 2026년 6월22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마주했다.

장편 데뷔작 ‘여름의 카메라'의 성스러운 감독이 2026년 6월22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 신문사에서 한겨레21과 인터뷰하기에 앞서 카메라를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함께 사진 찍는 걸 즐겼던 ‘여름’(김시아)은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 카메라를 놓게 된다. 그토록 좋아했던 카메라를 놓은 것은 상실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부 에이스 ‘연우’(유가은)를 보고 첫눈에 반한 여름은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는다. 여름은 연우에게 사진을 주기 위해 필름을 현상하고, 그 속에서 아빠가 고등학교 때 찍은 오래된 사진을 통해 숨겨진 비밀을 보게 된다.
영화에서 여름과 첫사랑 연우, 여름과 돌아가신 아빠를 잇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오래된 필름 카메라다. 디지털 시대를 넘어 인공지능(AI)이 대세가 된 시대에 감독은 왜 아날로그 카메라를 선택했을까? “20대 초반에 필카로 사진을 찍었고, 한때는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다”는 성스러운 감독은 “기억은 지나가지만, 사진은 그 기억을 소유한다. 빛이 그 안에서 멈춘다”며 “소중한 누군가를 담는 행위 자체가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빠는 사랑에 대한 상처가 깊어 판도라의 상자처럼 필름을 현상하지 않고 닫아둔 것으로 상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너를 보면 셔터 소리가 들려’라는 영화의 메인 카피처럼, 여름의 사랑은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표현된다.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과 계절적 배경은 모두 ‘여름’이다. 감독은 애도의 플롯을 품고 있으면서도 한 편의 청춘영화인 이 작품을 구상하며 작열하는 태양의 뜨거움, 날씨의 가변성, 싱그럽고 풋풋한 초록빛이 첫사랑과 똑 닮았다고 생각했단다. 그는 “10대, 고교생, 달아오른 첫사랑을 계절적으로 구현하고 싶었다”며 “실제로 촬영은 9월에 주로 했는데, 감독은 촬영에 목매느라 잘 느끼지 못했지만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여름의 카메라’는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감독은 개인적 경험을 통해 시나리오의 플롯을 구상하게 됐단다. “20대 때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상실을 겪었어요.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구나. 취업 전선에 뛰어들 때를 고려해 대학에서 분자생물과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이후 영화학교에 입학하게 됐고 상실이 테마가 됐죠.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른 인연으로 이어져 다시 나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뭔가 ‘성스러운’ 깨달음이 창작으로 이어진 듯한 느낌이라고 농을 던졌다. 예명인 줄 알았더니 놀랍게도 실명이란다. “외가 쪽 집안의 첫아이라 특별한 이름을 주고 싶으셨대요. 종교랑은 상관없고요. 어릴 때 이름 때문에 놀림도 많이 받았는데, 자라서는 사람들이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이름이라 좋더라고요. 하하하.”

‘여름의 카메라’는 아빠의 죽음 뒤 카메라를 손에서 놓았던 고등학생 여름이 축구부 에이스 연우를 만나 다시 사진을 찍으며 첫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싸이더스 제공
영화 속 여름은 여성인 연우를 좋아한다. 자신을 ‘레즈비언’이라고 명명한다. 놀라운 것은 절친 민정(이은솔)의 반응이다. ‘그럴 줄 알았어. 넌 남자는 안 찍잖아’라며 여름의 성적 정체성을 쿨하게 인정한다. 젠지 세대의 감성인 걸까? “요즘 세대는 퀴어 프렌들리한 친구가 더 많아지긴 한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제 주변에 퀴어 친구가 많은데, 제가 만드는 세상(영화)에서는 이들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소수자인 그들의 세상이 좀더 밝고 안전하고 자연스럽길 바라는 마음이 컸어요.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슬픔은 덜어줄 수 있다는 말처럼.”
연우를 만나고 여름은 아빠가 숲에 갈 때 썼던, 늘 메고 다니던 무거운 등산 가방의 무게를 덜어낸다. 치유의 시작점이다. 감독은 “캐릭터를 상정할 때 늘 키(Key)가 되는 소품을 생각하는데, 여름이 진 상실의 무게를 아빠의 배낭으로 표현했다”며 “배낭의 무게를 덜어내는 건 설레고 행복한 연우와의 추억이 많아지면서 상처가 아물어간다는 걸 드러낸다”고 말했다.
여름이 아빠의 옛 인연인 ‘마루’(곽민규)를 만나고, 둘이 비밀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여름과 마루는 같은 사람을 사랑했다는 공통점이 있죠. 어쩌면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마음만 먹으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기 쉬웠을 수도 있고요. 또 무엇보다 퀴어 선배니까….” 여름이 마루를 찾아갈 때 터널을 지난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굴을 통과하는 것처럼. 마루에게 가는 길은 여름에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아빠의 과거, 아빠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영화엔 아빠 지훈과 마루의 사연이 구체적으로 담기진 않는다. 다만 관객이 짐작할 뿐이다. “아빠는 고독한 사람이지 않았을까요? 노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겁니다. 그래서 영화 속 지훈은 도로의 중앙선이라는 메타포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그러나 그가 찍는 사진은 대부분 굳건한 나무예요. 실제 모습과 살고 싶은 모습을 이미지화했어요.” 여름이 용기를 내어 아빠의 사고 장소에 가는 장면은 그래서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였다. 오랜 시간 공들여 촬영한 장면이기도 하다. “서울영상위원회를 통해 상암의 한 도로를 새벽 시간대에 빌렸어요. 여름이 걸어가면서 천천히 아빠의 모습처럼 돼가는 장면인데, 5시간이 넘게 찍었다니까요.”

배우 김시아는 ‘여름의 카메라’에서 고등학생 여름 역할을 맡아 놀랍도록 섬세한 연기력을 선보인다. 싸이더스 제공
첫사랑은 슬프다는 말처럼, 여름과 연우의 사귐도 갑자기 끝난다. 달뜬 사랑이 “우리 헤어져”라는 말 한마디로 식는다. “첫사랑은 서툰데다 10대 땐 이기적이기도 해요. 무엇보다 ‘나’가 중요한 나이죠. 상대를 헤아리기엔 미숙하고 대화가 무서우면 회피하기도 하죠. 사실 저는 이 영화를 여름이 다 자라서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로 상정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헤어짐의 이유 따윈 잊히죠. 그런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기로 했어요. 여름의 기억 속에도 ‘헤어짐의 진짜 이유’는 휘발됐을 거 같았거든요.”
영화에는 아빠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 맨 마지막, 그 시절 여름과 같은 소년 시절의 아빠가 웃고 있지만 슬픈 표정으로 딱 한 번 화면을 채운다. “죽음을 다룰 때 죽은 자가 얼굴을 갖지 않았으면 했어요.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영화를 봤을 때, 자기 이야기를 대입했으면 했거든요. 맨 마지막 얼굴이 나오는 장면은 매우 고민했는데, 마치 평행우주처럼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랑하는 이를 지켜보며 응원하는 누군가가 여름에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넣었습니다.”
여름은 그렇게 성장통을 겪으며 훌쩍 자란다. 그 후 여름은 어떻게 살았을까? 마루와의 관계는 이어졌을까? “사진을 취미로 하는, 건강한 레즈비언으로 자랐을 거 같아요. 마루와는 더는 안 만났을 것 같고요. 삶의 한 페이지, 그 단락이 끝난 거니까.” 감독과 서로의 상상을 풀어내니 ‘빛보다 빠르게 달려 시간을 멈춰’ 어른이 된 여름의 모습을 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여름 역할을 맡은 18살 배우 김시아는 작품 전체를 끌고 가며 감독이 구현한 세계와 관객 사이를 빈틈없이 연결한다. ‘미쓰백’(2018), ‘백두산’(2019) ‘우리집’ ‘클로젯’(2020), ‘길복순’(2023) 등 독립영화는 물론 상업영화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드라마를 아우르며 성인보다 더 단단한 연기를 선보여온 김시아는 이 영화에서도 빛이 난다. 성스러운 감독은 “데뷔작인 ‘미쓰백’ 때부터 김시아 배우의 팬이었다.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매력적 캐릭터인 여름 역할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며 “캐스팅하면서 영화보다는 너를 잘 찍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클로즈업과 롱테이크를 많이 써서 배우 김시아를 충실하게 담아냈다”고 말하며 웃었다.
첫 장편영화인 ‘여름의 카메라’가 세계 35개 영화제에 초청되고, 전주국제영화제 감독상과 시애틀국제영화제 웨이브 메이커상 등을 받으며 주목받은 성스러운 감독. 차기작은 어떤 내용으로 구상 중일까? 놀랍게도 태극기 부대 할머니 얘기란다. “극우집회에 나와 태극기를 흔드는 할머니가 퀴어 선언을 한 손자를 받아들여가는 과정을 담은 얘기를 찍어볼까 해요. 노인은 성장할 수 없다, 나이 든 극우는 바뀌지 않는다고들 하잖아요.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준비 중입니다. 하하하.” 극우 할머니가 태극기 대신 무지개 깃발을 높이 드는 이야기라니, 벌써부터 기대 만발이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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