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자에 ‘부정적’이다. 싫어한단 표현과는 조금 다르다. 모자를 쓰는 행위는 뭔가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행동 같다. 모자가 괜히 탈모의 이유로 지목되는 것이 아니다. 머리는 공기와 통해 있어야 하며 고온보다는 저온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내 두상이 크고 옆짱구가 심하기 때문에 이렇게 모자를 폄하하는 게 절대 아니다. 물론 형편없이 안 어울린다. 그래서 난 모자를 안 산다. 유일하게 규칙적으로 썼던 모자는 59호짜리 전투모와 내피를 뺀 방탄모뿐(예비역은 알 것이다, 그게 얼마나 큰지를). 사진 속의 이 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일단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얼마나 허접한지! 물건을 사면 사은품으로 줄 것 같다. 그렇다! 이 모자는 사은품이었다.
때는 2006년. 전 직장인 MTV코리아에서 선배와 공동 연출한 프로그램의 프로모션용으로 제작된 모자다. 당시 프로그램은 인터뷰와 자료로 구성된 평이한 연예인 자료쇼였다. (제목은 선배가 지었는데, 요즘 말로 하면 ‘갑이다!’ 정도) 개인적으론 처음으로 의도적인 악마의 편집을 시도해, 5분 만에 약 600개의 협박성 글이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쾌거와 해당 인터뷰 주인공이 매니저와 직접 나를 방문해 항의하는 영광의 순간을 만들어준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3개월가량 프로그램을 제작하다 다른 팀으로 옮겼는데, 회사에서 다량으로 굴러다니는 이 모자를 발견해 그냥 하나 갖고 있었다. 머리를 며칠째 못 감은 지극히 평범했던 어느 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썼던 이 모자는 의외로 내게 어울렸다. 하계용 모자처럼 구멍이 뚫려 있어 머리는 숨을 쉴 수 있었고, 싸구려 스펀지 소재의 앞부분은 옆짱구를 적당히 가려주었다. 이후 해외 출장을 가도, 여자친구랑 놀러가도 무조건 이 모자를 썼다.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 여자친구는 다른 모자를 내게 씌워줬다가 기겁한 뒤 바로 이 모자로 바꿔 쓰라고 했다. 최근까지도 한 포털 사이트의 내 프로필엔 이 모자를 쓴 사진이 걸려 있었다. 물론 지금 사진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이 자리를 빌려, 이전 사진으로 바꿔주시면 안되느냐고 정중히 요청드린다.
개인적으로 물건에 애정을 갖거나 욕심을 부리는 행위는 한갓 덧없고 유치한 짓처럼 여겨진다. 난 읽지도 않은 법정 스님의 를 삶의 가치로 삼고,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사는 게 인생 목표다. (후자가 확실히 더 허세다.) 그러나 모든 인연은 소중하다. 물건과 사람 간에도 인연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6년 동안 숱하게 잃어버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 모자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며 내가 이렇게까지 이 모자에 애정이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란다. 공짜로 나눠준 사은품이었는데 몇 개 더 챙겨놓을 걸 아쉬움도 남는다. 어떤 이에게는 쓰레기지만, 누군가에게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라도 이 모자를 소유하신 분은(자체적으로 편집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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