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훈 제공
세상에 와인만큼 많은 얘깃거리를 품고 있는 게 또 있을까? 시큼 떨떠름한 오묘한 맛의 차이는 물론 빛깔이나 산지 또는 ‘빈티지’라 불리는 포도 수확 연도에 따라 나누다 보면 그 종은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인가, 와인에 따라붙는 찬사 또한 그것의 가짓수 못잖게 많고 비유도 한결같이 예술적이다. “한 병의 와인에는 세상의 어떤 책보다 더 많은 철학이 있다”(파스퇴르), “신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빅토르 위고), “맥주는 인간이 만들었고, 와인은 신이 만들었다”(마르틴 루터), “좋은 와인은 미소로 시작해서 미소로 끝난다”(윌리엄 소콜린) 등등. 이 중 나는 마지막에 소개한 글에 가장 마음이 간다. 바라보면 미소짓게 만드는 나의 와인 이야기를 풀어보면 이렇다.
1990년 와인의 나라인 프랑스 파리에서 무역관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였다. 가족과 함께 와인 명산지인 부르고뉴의 본 지역을 여행하다가 작은 벼룩시장과 조우했다. 이방인의 호기심으로 둘러보는데, 그곳에서 빚어낸 포도주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와인을 한 병 사려고 둘러보다가 ‘1986년산’에 눈길이 갔다. 4살짜리 딸아이를 데리고 갔던 만큼 그 애가 태어난 해를 기념하는 의미로 아내와 함께 그것을 집어들었다. 유명한 코토도르 지방의 것이지만 값은 몇 푼 안 되는 시골 와인이었다. 이렇게 사온 와인 한 병이 우리와 기나긴 인연을 맺게 될지는 당시로선 상상하지 못했다. 무역관 근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그놈은 다른 짐들에 섞여 배편으로 돌아왔다. 몇 년 뒤 다시 프랑스로 나갈 때, 그놈도 배편에 실렸다. 또다시 몇 년이 흐른 뒤 귀국할 때, 그놈도 다시 배편에 실려 돌아왔다. 우리 가족을 따라 그놈도 제 고향을 왕복했던 것이다. 그런데 놈의 유랑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다시 몇 년이 지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무역관으로 나갈 때 그놈도 배편으로 태평양을 건넜다!
함께한 지 십수 년. 그땐 놈도 이미 우리 가족이었다. 생물을 대하듯 함부로 여기지 않았다. 무사히 대양을 건너오라며 특별히 꼼꼼히 포장하던 기억이 새롭다. 다시 몇 년 뒤 귀국길에 함께 오른 놈은 우리 집 거실 한 자리를 차지하며 세월을 잊은 채 익어가고 있다. 나도, 딸도, 아내도 이따금 눈길을 주며 지나온 세월을 함께 음미한다.
와인이 익어가는 속도로 딸아이는 장성해서 실리콘밸리의 정보기술(IT) 전문가로 행세하고 있고, 그놈도 26살을 먹었다. 오래될수록 술맛이 깊어진다는데 과연 맛이 어떨까? 혹 변질되지는 않았을까? 아무튼 놈이 서른이 되기 전에 그 맛을 봤으면 좋겠다. 사위가 될 젊은이와 함께 말이다. 사랑하는 딸아, 어떻게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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