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폐허를 응시하라.’
2023년 10월16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최대 도시 가자시티 중심가다. 한낮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건물이 무너졌다. 콘크리트 먼지 더미를 채 털어내지 못한 주민들이 울고 있다. 앰뷸런스조차 사치다. 째지고 부서진 몸을 이끌고, 서로를 보듬으며 알시파 병원으로 향한다. 아이가 가슴을 부여잡고 운다. 얼굴에 피 칠갑을 한 엄마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운다. 머리를 부여잡은 여성, 먼지를 뒤집어쓴 남성도 운다.
10월18일 이스라엘 최대 도시 텔아비브에 도착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신뢰를 새삼 다짐했다. 물도 식량도 의약품도 전기도 끊긴 채 최악의 인도적 재난에 처한 210만 가자지구 주민을 위해, 이집트 국경 라파 검문소를 통해 인도적 지원 물품을 보내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트럭 20대 분량, 가자지구 인구 10만 명당 물과 식량과 의약품과 연료가 트럭 1대꼴이다.
그러니 저 폐허를 응시하라. 저 눈빛을 주시하라. 저 울음을 기억하라. 인류는, 고작 이만큼 진화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딛고 설립된 유엔은 1947년 11월 총회 결의 제181호를 채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부터 영국이 위임통치를 해온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과 아랍인 국가를 각각 따로 수립하고, 3대 종교(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의 공동 성지 예루살렘을 국제지구로 지정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분할안이다. 1948년 5월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제1차 중동전쟁이 불을 뿜었다. ‘나크바’, 곧 대재앙이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아랍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자기 땅에서 쫓겨났다. 가책이라도 느낀 걸까? 유엔은 1949년 12월 결의 제302호를 채택해, 난민으로 떠도는 아랍인 75만여 명을 지원하기 위해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를 출범했다. 이듬해 본격 가동에 들어간 UNRWA는 73년째 요르단·레바논·시리아 등 주변국과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약 580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교육·의료·복지 등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UNRWA는 가자지구 일대에서 183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학교에 다니는 팔레스타인 학생은 모두 28만6645명에 이른다. UNRWA가 운영하는 22개 진료소에선 연간 누적환자 340만 명을 돌보고 있다. UNRWA에는 의도치 않은 구실도 생겼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때려댈 때마다, UNRWA는 자기 땅에 갇힌 채 빠져나갈 곳 없는 가자 주민의 ‘소도’가 된다. 하지만 안전이 100% 보장되진 않는다. 눈먼 포탄이 곧잘 ‘소도’를 침범하는 탓이다.
2023년 10월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테러와 이스라엘의 봉쇄·폭격이 개시된 뒤 열흘 동안 가자지구 일대에서 UNRWA가 운영하는 시설 33곳이 공습 피해를 입었다. 10월17일에도 가자지구 중부 알마가지 난민캠프에 있는 UNRWA 학교가 폭격을 당했다. 당시 이 학교에는 피란민 4천여 명이 몰려 있었다. 이날 공습으로 피란민 8명이 숨지고, UNRWA 직원 3명을 포함해 40명이 다쳤다.
“지금 우린 전례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세상의 어떤 말로도 우리가 마주한 상황을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 시설에 팔레스타인 피란민 1만5천여 명이 몰려 있다. 정든 집을 떠나, 음식과 마실 물조차 없이. 당뇨환자, 어린이, 장애인, 갓난아기까지. 어린이 일부는 천연두에 걸린 상태다. 센터는 이렇게 많은 사람을 돌볼 수 없다. 음식도, 화장실도, 물도, 전기도 부족하다. 이제 곧 전기가 완전히 끊길 거다. 피란민을 돌볼 수 없다. 이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어떻게 충족해줄지 알지 못한다. 제발 가자를 구해달라. 간청한다, 가자를 구해달라. 죽어가고 있다, 죽어가고 있다, 가자가 죽어가고 있다.(울부짖음)여기 어린이가, 노인이, 성인이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음식도, 마실 물도 줄 수 없다. 여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누군가 이들에게 음식과 마실 물을 줄 수 있을지 애타게 찾고 있다. 그들은 빈손으로 이곳에 왔다. 하지만 빈털터리가 아니다. 돈이 있지만, 필요한 것을 살 수 없다. 인슐린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인슐린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재난이다, 재난, 재난적 상황이다.”―UNRWA가 10월14일 공개한 라우야 할라스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 교육센터 국장의 육성10월13일 이른 아침, 밤새 비처럼 퍼붓던 폭격이 잠시 잦아들었다. 가자지구 최대 도시 가자시티의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을 흰 종이가 뒤덮었다. 이스라엘군이 뿌린 전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자시티에 거주하는 민간인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남쪽으로 대피하라. 당신들을 인간방패로 활용하는 하마스 테러조직을 멀리하라.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전쟁을 선포했고, 가자시티에서 곧 전면적인 군사작전이 펼쳐질 것이다. 향후 허락이 있을 때만 가자시티로 돌아올 수 있다.”
이스라엘 군 당국의 자료를 보면, 전날인 10월12일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에서 “하마스의 테러터널과 군사기지, 테러 연루 고위 인사가 군사용으로 사용하는 거주지, 무기 저장소와 통신시설” 등을 겨냥해 모두 750차례 폭격을 가했다. 전투기까지 동원한 폭격 대상에는 “하마스가 테러 목적으로 사용하는 다층 건물에 자리한 군사 자산 12곳”도 포함됐다. 그곳에도 민간인이 살았을 터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 이스라엘의 경고 이후 가자시티를 포함한 가자지구 북부 지역의 인구 약 110만 명 가운데 절반가량이 중남부로 피란길에 나섰다. 임산부와 영유아, 장애인과 노약자, 위중증 환자 등은 떠나지 못했다. 이스라엘군은 피란처로 지목한 가자지구 남부에서도 무차별 공습을 이어갔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이 내놓은 최신 상황 보고서를 보면, 10월17일 하루에만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와 최남단 라파에서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각각 40명과 28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남쪽이 안전하다고 했다. 아이들 걱정 때문에 집에 머무를 수 없어, 이곳 칸유니스로 왔다. 그런데 와서야 알게 됐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죽음이 우리를 따라왔다.” 가자시티 주민 아파프 와흐단은 10월17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라지다 아부 마라사의 가족은 다시 가자시티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신문에 “가자시티로 몰아가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을 안다. 생활도 어려워지고. 그래도 가자시티 밖에서 고통당하는 것보다 나을 듯하다”고 말했다. 피란을 떠난 이들이 다시 ‘불구덩이’로 돌아가고 있다. 사위가 온통 불타고 있다.
약 210만 명 인구 가운데 170만 명 정도가 등록된 난민이다. 인구의 63%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태로 원조에 의지해 살아간다. 81.5%가 빈곤층이다. 평균 실업률은 46.6%, 15~29살 청년층 실업률은 62.3%다. 인구의 95%는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없어, 따로 공급받아야 한다. 전기는 하루 평균 11시간 제한 송전된다. 10월7일 이전에도 가자지구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OCHA가 10월18일 펴낸 최신 상황 보고서를 보면, 10월7일부터 17일까지 가자지구에서 3478명이 목숨을 잃었고 1만2500명이 부상을 당했다. 2014년 7월8일부터 50여 일 동안 이어졌던 이스라엘군의 ‘프로텍티브 에지’ 작전 당시 사망자 수(2203명)를 훌쩍 넘어섰다. 이스라엘 쪽도 1300명이 숨지고 4562명이 다쳤다. 이스라엘군의 공세로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내부 난민(IDPs)은 줄잡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100만 명, 이 가운데 51만3907명이 UNRWA가 운영하는 시설에서 몸을 피하고 있다.
“10월7일 사태 발발 이후 가자지구에서 어린이 1천 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15분마다 팔레스타인 어린이 1명이 죽어가고 있다.” 인권단체 국제아동보호(DCI) 팔레스타인 지부는 10월16일 자료를 내어 이렇게 밝혔다. 가자지구 인구의 절반 정도가 어린이다. 가자지구에서 어린이 1천 명 가운데 1명꼴로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쪽 자료를 보면, 10월5일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모두 9806명이다. 이 가운데 어린이는 560명이다. 전쟁이 1년8개월째 접어든 우크라이나에서 사망한 어린이보다 교전 발생 열흘도 안 된 가자지구에서 사망한 어린이가 더 많다는 얘기다. 참혹하달밖에.
영국 성공회 예루살렘 교구가 운영하는 알아흘리아랍 병원은 가자지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성공회 선교회가 1882년 가자시티 제이툰 지역에 문을 연 이 유서 깊은 병원은 80병상 규모로 연간 누적 내원환자 수가 4만5천여 명에 이른다. 10월14일 알아흘리 아랍병원 암병동 쪽으로 로켓 두 발이 날아들었다. 의료진 4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병원 주변엔 피란민 6천여 명이 밀집해 있었다. 로켓 피격 뒤 피란민은 1천여 명으로 줄었다.
이튿날 병원 쪽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알자지라>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이스라엘 군 당국은 “어제 우리가 보낸 경고 잘 받았느냐. 속히 병원을 비워라”라고 통보했다. 이스라엘 쪽은 10월16일 가자지구 일대 20여 개 병원마다 ‘소개령’을 내렸다. 하루 뒤인 10월17일 저녁 알아흘리 아랍병원이 폭격당해 화염에 휩싸였다. 471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병원 부지에 대피해 있던 여성과 어린이였다. 세계보건기구(WHO) 집계 결과, 10월7일부터 10월17일까지 가자지구에서 의료시설 57곳이 폭격 피해를 입었다.
팔레스타인 보건부 쪽은 희생자들의 주검을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열어, 이스라엘 폭격으로 인한 참극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쪽은 팔레스타인 무장저항세력 이슬람지하드가 쏜 포탄으로 인한 사고라고 주장했다. 10월18일 이스라엘에 도착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에게 “당신들이 아니라 다른 쪽의 소행으로 안다”며 이스라엘 쪽 주장에 힘을 실었다. 성공회 예루살렘 교구 쪽은 성명을 내어 ‘학살’을 비판하고, “가자는 안전한 곳을 모두 빼앗겼다”고 침통해했다.
네타냐후 총리의 외교정책 보좌관을 지낸 대니 아얄론 전 이스라엘 외교차관은 10월13일 <알자지라>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하마스는 지금 이중의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그 하나고, 가자지구의 불쌍한 팔레스타인 주민을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인간방패로 삼은 게 다른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는 ‘하마스의 잘못’을 이유로 가자지구를 봉쇄하고 폭격을 퍼붓는 것은 국제법이 금지한 ‘집단처벌’이란 지적에 이렇게 답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스라엘 군 당국은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 진입해 하마스를 제거할 수 있도록 피란을 가라고 말이다. 사태가 일단락된 뒤 돌아오면 된다. 이게 어떻게 전쟁범죄인가? 10월7일 하마스의 공격 개시 이후 24시간 안에 목숨을 잃은 유대인 규모는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 이후 최대다.”
아얄론 전 차관은 “가자지구 주민들한테 대체 어디로 대피하란 말이냐”는 질문엔 또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해변으로 가서 물에 빠져 죽으라고 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집트 영토인) 시나이반도 사막지역에 거의 무한정한 공간이 있다. 가자 주민들이 그곳으로 가면 이스라엘과 국제사회가 ‘텐트 도시’를 건설해줄 거다. 식량과 물도 공급해주고. 몇 년 전 아사드 정권의 살육을 피해 국경을 넘어 터키로 간 시리아 난민처럼 말이다.”
세계보건기구 쪽은 의약품은 소진되고 전력조차 끊긴 가자지구 병원이 “갈수록 무덤처럼 변해가고 있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런데 아얄론 전 차관은 가자지구 최대 규모인 알시파 병원을 지목해 “하마스의 참호”라고 주장했다. 그는 증거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외신 기자단을 이끌고 알시파 병원으로 가서, 하마스가 만든 지하터널과 참호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마스가 정말 팔레스타인 주민을 살리고 싶다면, 즉각 무기를 내려놓고 나오면 된다. 즉각적이고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한다. 그럼 아무 일이 없을 거다. 모든 게 즉시 원상복구될 거다. 그들이 알시파 병원에 머무는 한, 학교나 유치원을 참호 삼아 전투를 지속하는 한, 온 우주에서 그들을 보호할 법률은 없다. 하마스에 달렸다.”
‘전시에서 민간인 보호에 관한 1949년 8월12일치 제네바 협약’(제4협약) 제33조는 “피보호자는 그 자신이 행하지 않은 위반 행위로 처벌돼선 안 된다. 집단처벌과 모든 협박 또는 공갈에 의한 조치는 금지된다. 약탈은 금지된다. 피보호자와 그들의 재산에 대한 보복은 금지된다”고 규정한다. 집단처벌은 전쟁범죄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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