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갈릴레이와 케플러의 신념… “누군가 믿어준다면, 실패한 게 아니야”

절대 진리에 반기를 든 ‘괴짜’ 갈릴레이와 케플러 이야기 뮤지컬 ‘시데레우스’… 샛길이라도 신념의 결과물 전해진다면 ‘충분’
등록 2026-08-06 22:00 수정 2026-08-11 14:02
google구글 선호 매체 등록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갈릴레이와 케플러가 금기시되던 지동설을 연구하며 우주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다. 주식회사 랑 제공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갈릴레이와 케플러가 금기시되던 지동설을 연구하며 우주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다. 주식회사 랑 제공


 

천동설이 진리처럼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에는 가장 뛰어난 과학자들조차 신의 섭리를 전제로 삼았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고 신의 피조물은 아름다워야 했다. 과학자들은 천동설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신의 피조물은 아름다울 것이므로 천동설 역시 아름답게 증명돼야 했다.

과학자들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고정한 다음 태양과 달을 비롯한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려 했다. 그들의 설명 속에서 천체는 일관된 규칙하에 완벽한 원을 그리며 움직일 것으로 상상됐다. 신의 피조물은 아름다워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원과 같이 균형이 무너진 모양은 애초에 배제됐다. 그 결과 천동설을 표현한 그림들은 아주 복잡하고 아름다운 모양이 됐다. 아름답기 위해 복잡해야 했다. 어떤 그림에서 천체의 움직임은 마치 꽃잎 같은 모양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어떤 천문학자들은 복잡한 계산을 수행할 정교한 금속 장치를 발명하는 쪽을 택했다.

반면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고 태양계의 중심은 태양이라는 지동설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지동설로 재구성된 우주에서 태양계의 천체는 완벽한 원이 아니라 타원 모양으로 공전 궤도를 그린다. 천동설이 복잡하고 아름답다면, 지동설은 단순하고 무난하다. 그러나 진실은 종종 복잡성과 아름다움과는 무관한 법이다. 결국 천동설의 시대는 저물고 지동설이 진실로 승인된 시대가 왔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1771) 제1판의 ‘천문학’ 항목에 실린 천동설을 주장하는 그림. 위키미디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1771) 제1판의 ‘천문학’ 항목에 실린 천동설을 주장하는 그림. 위키미디어


 

천동설이 진리처럼 여겨지던 시대

 

한국의 창작 뮤지컬 ‘시데레우스’는 바로 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뮤지컬의 주인공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요하네스 케플러, 과학혁명의 시대였던 16~17세기에 각각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지동설을 주장한 선구적 과학자들이다.

갈릴레이의 최후는 잘 알려져 있다.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결국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야 했다. 재판장을 나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후대에 창작된 이야기라고는 하나, 갈릴레이가 여전히 그렇게 믿었을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쨌거나 갈릴레이의 이야기는 뮤지컬로 만들어지기엔 아쉬운 측면이 크다. 끝끝내 신념을 지켜 승리한 이야기가 아니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장렬히 쓰러진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비장함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조건이라면 갈릴레이의 결말은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복잡하고 아름다운 천동설이 진실의 자리를 단순하고 무난한 지동설에 내주었듯이, 갈릴레이는 권력 앞에 신념을 한 수 접어야 했으나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매끄럽지 않아도 빛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시데레우스’의 이야기는 케플러가 자신의 저서 ‘우주의 신비’에 대한 의견을 구하기 위해 갈릴레이를 비롯한 수많은 명망가에게 편지를 부치며 시작된다. 이 책에는 천동설을 부정하는 내용이 담겼기에 수신자 대부분은 편지를 무시했다. 오직 갈릴레이만이 케플러에게 답장을 보냈다. ‘당신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는 내용이긴 했지만, 케플러는 답장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을 느낀다.

케플러는 끝도 없이 편지를 보냈고, 갈릴레이는 결국 케플러와 토론을 시작한다. 갈릴레이는 말한다. “시작부터 내 답은 명확해. 변하지 않아.” 신의 섭리에 따라 천동설은 불변의 진리라는 얘기다. 케플러도 신을 믿지만, 그는 신만큼이나 상상의 힘을 믿었다. 어릴 때부터 눈이 안 좋아 관찰을 잘하지 못했다는 케플러는 대신 주로 상상을 했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그는 끝내 천동설이라는 진리의 빈틈을 상상하기에 이른다.

 

뮤지컬 ‘시데레우스’의 한 장면. 주식회사 랑 제공

뮤지컬 ‘시데레우스’의 한 장면. 주식회사 랑 제공


편지 한 통에서 시작된 새로운 발견

 

갈릴레이는 조금씩 케플러의 주장에 마음을 열어간다. 둘의 접근 방식은 서로 달랐기에 오히려 좋았다. 케플러가 상상과 관찰을 통해 지동설을 검증했다면, 갈릴레이는 치밀한 계산을 통해 그렇게 했다. 마침내 갈릴레이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면 풀 수 없는 문제들, 하지만 지구가 태양을 돈다면 생겨나는 해답들”을 받아들였다. 둘은 함께 발전된 망원경을 만들어냈고, 그것으로 지동설을 증명할 수 있는 천체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들이 관찰한 달은 신의 피조물답지 않게 굴곡진 모양이었다. 우주가 완벽한 모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 굳건한 진리를 내려놓자 드넓은 가능성이 열렸다.

갈릴레이와 케플러는 그들이 발견한 것을 책으로 만들자고 마음을 모은다. 책 제목은 ‘시데레우스 눈치우스’, ‘별들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뮤지컬의 제목이 바로 여기서 왔다. 그리고 바로 이 책이 갈릴레이의 인생이 꼬이는 시작점이 된다. 둘의 연구가 세상에 공표되면서, 이탈리아인 갈릴레이가 교황청의 감시망에 포착된 것이다. 신의 뜻을 거스르고 신에게 도전하는 지동설은 곧장 이단으로 찍혔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이 한 명 더 있다. 갈릴레이의 딸이자 수녀인 비르지니아다. 갈릴레이와 케플러가 신을 믿되 과학의 편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비르지니아는 과학을 이해하되 신의 편으로 기울어진 인물이다. 신의 뜻을 섬기며 약자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수녀가 된 비르지니아에게, 지동설을 주장하는 아버지의 존재는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미래에도 얼룩처럼 여겨진다. 비르지니아는 교황청과 시민들의 의심과 분노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아버지를 말리지만 그럴수록 갈릴레이는 연구에 더 깊이 빠져든다.

 

신념의 빈틈에서 나온 지동설 주장

 

결국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그는 책임을 홀로 지기 위해 케플러의 존재를 지우려 한다. 그러면서 딸에게 그와 나눈 편지들, 그와 함께 쓴 책을 불태워달라고 요청하는데, 비르지니아는 도대체 그것들이 무엇이기에 태워달라는 건지 궁금해 하나씩 읽어간다. 바로 이 장면에서 이 작품에 비르지니아가 등장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비르지니아는 기록을 읽어가며, 또 아버지의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하며 지동설을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재판에서 아버지를 위해 탄원서를 제출한다. “자연현상에 신의 법칙이 깃들어 있듯, 우주도 신의 법칙이 깃들어 있습니다.”

갈릴레이는 다시는 지동설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뒤 풀려났고, 딸이 자신을 위해 탄원서를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체 왜 그랬느냐고 묻는 갈릴레이에게 비르지니아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버지의 책을 읽었어요. 그뿐이에요.” 진실을 봤으니 그것을 믿겠다는 것. 신의 뜻을 봤기에 신을 믿기로 했듯이. 비르지니아는 지동설을 믿게 됐고 여전히 신을 따른다.

절망과 번뇌 속에 무너지던 갈릴레이의 마음을 다잡게 한 것은 딸의 저 말이었다. 그 말이 그에겐 해답이었다. 이 작품에서 갈릴레이는 그가 한 것으로 오해된 가장 유명한 말,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저 말은 갈릴레이가 끝까지 신념을 지켰음을 드러내기에 지금까지 사실인 양 전해지고 있다. ‘시데레우스’ 속 갈릴레이는 다만 이렇게 노래한다.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면, 별의 소식을 받아줬다면, 난 실패한 게 아니야. 난 아직 살아 있어.”

교황청이 그 권위로 갈릴레이를 주저앉힐 수는 있었어도, 갈릴레이와 케플러가 세상에 흩뿌린 진실들까지 모두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갈릴레이는 ‘신념을 지킨 사람’으로 남는 대신 ‘신념을 퍼뜨린 사람’으로 남기를 택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 자신은 권위 앞에 굴복한 인간으로 역사 속에 기록되더라도, 그가 정말 이루려 했던 목적, 즉 ‘별들의 소식을 전하는 것’을 이루었다면 됐다는 것이다. “나 이제 눈을 감고 빗장을 걸어 저 하늘 우주를 어둠에 가뒀지만, 새어 나오는 빛, 새겨져버린 별, 지울 수 없는 답, 감출 수 없는 이야기. 나는 별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


이분법 시대에 정말로 중요한 것

 

‘시데레우스’ 속 갈릴레이의 선택은 천동설과 지동설의 관계와 닮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동설은 성경에는 오류가 없고 신의 피조물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신념의 산물이다. 그 신념을 내려놓을 수 없었기에 복잡한 체계를 상상해야 했다. 놀랍도록 아름다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진실과 다른 체계다. 지동설은 그 신념을 내려놓은 빈틈에서 터져나왔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그 궤적이 꼭 완벽한 형태의 원은 아니어도 된다는 단순한 가정. 갈릴레이의 선택 또한 신념을 고수할 것과 신념을 저버릴 것의 샛길로 향해 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신념의 결과물이 전해지기만 한다면 충분하다는 것, 그 길이 비록 일직선은 아닐지라도.

지금은 샛길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처럼 보인다. 10점과 0점, 승리 아니면 패배, 신념 아니면 비겁함, 정직함 아니면 거짓말, 폐지 아니면 존치…. 그 가운데에 존재하는 무수한 선택지는 선명하지 않고 관심을 끌 만한 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마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시데레우스’는 이 숨 막히는 이분법의 시대에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아름답기 위해 애쓰지 않기에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됐다.

 

강남규 ‘토론의 즐거움’ 멤버·‘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