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당대표 후보(왼쪽)가 2026년 8월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서울시 공무관 정책 간담회에서 최민희 최고위원 후보와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에 침투한 일베 문화를 박살 내겠습니다!”
2026년 8월1일 최민희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후보가 민주당 8·17 전당대회 충남 순회경선을 마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이다. 그는 정청래 당대표 후보 등을 향한 야유와 조롱을 “일베”라고 규정했다. 정작 본인도 서미화 최고위원 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마찬가지로 조롱의 몸짓을 보이고, 시각장애인인 서 후보와의 악수를 의도적으로 건너뛴 사실은 역설적이다. 상대의 소수자성을 조롱하며 낄낄거리는 행위야말로 “일베 문화”의 가장 큰 해악 아니겠는가.
이후 양 진영은 서로에게 “전두환 독재 언어” “(당신의 언사야말로) 일베 문화” 등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격한 감정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3차 전당대회 연설에선 김민석·정청래 당대표 후보 둘 다 상대편을 향해 “윤리위원회 제소”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당대회 뒤 윤리위가 열릴지와는 무관하게, 이런 제스처는 협상 실패, 판단의 외주화 그리고 정치적 무능을 보여준다.
이 와중에 두 후보의 정치적 비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철학 경쟁도 정책 경쟁도 아니고, 하물며 노선 다툼조차 아니다. 누가 더 큰 팬덤을 가졌는지, 누가 더 ‘까와 빠’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하는지, 누가 더 빠르게 상대 진영을 비윤리적 군체로 낙인찍을 수 있는지를 두고 이전투구가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절체절명의 과제처럼 보였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조차 전당대회를 위해 완급을 조절해온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의힘은 말할 것도 없고(아니, 언급도 하기 싫고) 민주당마저 하향 평준화되는 현실을 보고 있으면, 정치인 사이에서조차 유례없는 격정과 전례 없는 공허가 겹친 시대에 들어섰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하이퍼정치’가 가속되는 것이다.
벨기에의 정치학자 안톤 예거는 최근 출간된 ‘하이퍼정치: 정치적 결실 없는 극단적 정치화’(Hyperpolitics: Extreme Politicization Without Political Consequences)에서 지금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하이퍼정치’(초정치·과잉정치)라고 규정했다.
하이퍼정치란 사람들은 극도로 정치화됐는데, 그것이 사회 변화로는 이어지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 시대엔 대중이 “미디어가 불타올랐다가 식어버리는 사이클을 좇아 수동성과 능동성을 오가지만, 실제로 사회 내 전반적인 권력 격차는 결코 줄이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다. 예거는 이를 실증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두 개의 축을 세운다. 하나는 정치적 결집도를 보여주는 ‘정치화의 축’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결속도를 보여주는 ‘제도화의 축’이다. 그리고 두 축의 조합을 바탕으로 지난 100여 년에 걸친 서구 정치사를 네 단계로 나눈다.
그 첫 단계는 ‘대중정치’(Mass Politics)의 시대다. 1914년부터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까지 이어진 이 시대에는 정치화와 제도화의 정도가 모두 높았다. 정당에 가입하고 노조에 소속되는 것이 곧 정치를 하는 일이었던 시기, 당원 수가 수백만 명에 이르는 대중 정당, 노조, 오프라인 결사체가 단단하게 결합해 유의미한 정치적 결과를 만들어냈다.
1989년 냉전 종식 이후 2008년 금융위기까지는 ‘탈정치’(Post-politics) 시대였다. 대중의 정치 참여도는 물론 조직화 비율 역시 낮아진 시대, 정치는 전문가와 기술관료의 몫이 됐다. 세계적으로 정치학이 윤리학에 자리를 내주었다고 평가됐고, 한국에선 노동운동 자리에 문화운동이 들어섰다던 그 시기다. 이제 광장이 아니라 교실에서, ‘교실 이데아’를 부르며 혁명이 시작되는 것으로 상상됐다.
2008년 금융위기 및 SNS 도래와 함께, ‘반정치’(Anti-politics) 시대가 열린다. 여기서 반정치란 정치를 거부하는 비정치(Apolitics) 상태가 아니라 정치 엘리트, 제도, 정당, 국정 운영 자체에 반대하는 형태로 드러나는 정치적 분출을 의미한다. 무두 정치, 즉 우두머리 없는 좌파 반정치가 부상한 것이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과 재스민 혁명 등이 보여줬던 것처럼 고도의 정치화가 일어났지만 제도화는 이뤄지지 않았고, 유럽에서는 포퓰리즘 물결이 일었다. 한국에선 희망버스와 #안녕들하십니까 운동이 펼쳐졌고, ‘나는 꼼수다’를 비롯한 시사 팟캐스트들이 팬덤을 형성하면서 정치 미디어의 풍광을 바꾸었다. 그러나 모든 운동은 기성 질서를 흔드는 데 그쳤을 뿐, 안정적인 조직화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리고 2020년대, 하이퍼정치의 시대가 도래했다. 예거의 말처럼 반정치와 하이퍼정치는 칼로 무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서로 중첩된 상태로 진행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모호한 구분선을 전제로 살펴보았을 때, 한국 사회는 박근혜 탄핵 광장과 더불어 하이퍼정치의 영역으로 진입했고, 이는 12·3 내란 이후 본격화했다. 시사 유튜브 시장의 급격한 성장을 통해 우리는 정치 고관여층의 급증을 가늠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와 달리 한국의 응원봉 광장은 정권교체를 불러왔지만, 이후 사회 변화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광장의 열망은 국무총리 소속 사회대개혁위원회 출범으로 수렴됐고, 위원회에 참여했던 조직화된 운동 단위들의 노력은 폄하할 수 없다. 그러나 대중은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 주식 계좌를 열었고, 광장은 잊혔다.
반정치가 제도 파괴적 분노와 그에 대한 거부를 동력으로 삼는다면, 하이퍼정치는 관종력(혹은 자기표현), 도덕적 열정 그리고 파편화된 정체성을 동력으로 삼는다. 전자가 “기존 정치를 뒤집어엎자!”고 외친다면, 후자에게 소구하는 구호는 “모든 것이 다 정치적이다”일 것이다. 그리하여 하이퍼정치 시대에는 과잉된 정치적 열정이 일상화된다. 정치가 광장을 넘어 개인의 일상, 소비생활, SNS 활동 등 문화 전반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항상 켜져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에 더해 이재명 정부의 주식시장 부양 정책과 함께 투전판으로 휩쓸려 들어간 이들은 정신없이 등락하는 주가지수와 그 변동성 속에서 주 7일, 하루 24시간, 정치를 생각하게 됐다. 이 난장판이 ‘정치’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이퍼정치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들 속에서 출현했다. 탈출이 쉬운 사회, 온라인에 상시적으로 접속한 삶, 그리고 사회 전반의 금융화가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퍼’는 ‘과잉’을 의미할 뿐 아니라 초개인주의(Hyper-individualism), 하이퍼텍스트(Hypertext), 초금융화(Hyper-financialization)를 함께 지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예거에 따르면 탈산업 시대의 고용 불안정 속에서 가족과 연인, 정당과 공동체를 떠나는 일은 더 이상 번거롭지 않은 유동적 삶의 양식이 됐다. 이 ‘탈출’(exit)의 용이성은 삶의 모든 차원을 단기적 논리 아래로 밀어 넣어, 우정과 결혼, 직업과 정치적 헌신을 점점 짧은 시간 단위로 압축한다. 정규직에 대한 희망이 없는 노동환경은 개인이 단단한 직업적 정체성을 세울 길을 애초에 막아선다. 결과적으로 인내심과 지속성을 잃은 하이퍼정치는 거대한 열기와 자극만 무한 순환시킬 뿐, 삶을 바꾸는 실질적 유산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증발해버린다.
‘엑시트’가 시대정신이 된 한국 사회에서, 하이퍼정치는 SNS를 만나 엄청난 동력을 얻었다. 밈과 해시태그 공유만으로 정치 참여의 문턱은 낮아졌지만, 역설적으로 정당 가입이나 조직화 같은 두터운 결사체적 헌신은 해체됐다. 언제든 ‘언팔로’하고 빠져나갈 수 있는 “낮은 헌신, 낮은 비용”의 구조 속에서, 시민들은 단편적 자극에 반응하며 한 조직에서 다른 조직으로 손쉽게 옮겨다니는 파편화된 주체로 자리 잡았다. 정치적 관심은 주식을 사들이듯 폭발적으로 몰렸다가 기대수익이 없으면 즉시 회수된다. 정치는 한때 금융시장의 전유물이었던 “거품과 폭락, 테마주의 광풍을 그대로 재현”(윌리엄 데이비스)한다. 이런 묘사는 단순히 정치 현상을 금융의 언어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치활동과 경제활동이 어떻게 분리 불가능하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에 가깝다.

강명지(머리에 두건을 두른 이)씨와 ‘말벌 동지들’이 2025년 3월25일 당시 고공농성 중이던 김형수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장을 응원하기 위해 서울 중구 한화빌딩 앞을 찾아 대화하고 있는 모습. 김명진 기자
‘단타’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정치를 갱신할 수 있을까. 예거는 ‘재제도화’를 제안하고, 두 가지 진입 경로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첫째는 어린이집이나 요양원 등 일상적인 돌봄의 현장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일터다. 노동자를 투자자로 소환하는 이 엄혹한 금융화의 현실에서도 “일터는 여전히 잉여가치가 생산되고 경제적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비록 “천진난만해 보이는” 대안이라 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명백하다. 면 대 면으로 만나고 몸과 몸이 부딪히는 자리에서, 그 모든 부정성을 껴안은 상태로 구체적인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움직일 때에야, 비로소 재조직화가 시작될 수 있다.
돌이켜보면 한국이 반정치 시기를 지나는 동안 빡세게 조직화된 집단이 있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페미니스트 그룹들이다. 그들이 민주주의와 역동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바꿔온 문화가 응원봉 광장을 만들었다. 물론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반대 투쟁이나 서울 혜화역 시위 등이 반정치 시대를 이끈 것도 사실이고, 이런 반정치적 성격이 응원봉 광장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다만 광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여러 투쟁 현장에 연대하기 시작한 청년/퀴어/여성인 ‘말벌 동지들’이 노조 활동 및 페미니즘 운동과 맺는 관계가 재제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건 아닌지, 기대해보고 싶다.
손희정 시사덕후·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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