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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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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탈’ 수사는 틀렸다...이태원 참사 독립조사기구가 필요한 이유

영국 힐즈버러 축구장·독일 러브퍼레이드 참사 조사보고서 살펴보니…
사회구조적 요인까지 살필 ‘독립조사기구’ 꾸려야
등록 2022-11-12 14:31 수정 2022-12-09 01:37
1989년 영국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열린 리버풀 FC와 노팅엄 포레스트의 경기에서 관람객 97명이 압사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참사 이후 리버풀 홈구장 안필드에 놓인 추모 꽃다발. REUTERS

1989년 영국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열린 리버풀 FC와 노팅엄 포레스트의 경기에서 관람객 97명이 압사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참사 이후 리버풀 홈구장 안필드에 놓인 추모 꽃다발. REUTERS

156명이 희생된 이태원 참사는 한국 사회의 안전관리 체계 민낯을 드러냈다. 참사 원인을 밝힌다며 경찰이 자체적으로 시작한 수사는 벌써 ‘셀프 수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군중을 밀었다는 ‘토끼 머리띠 남성’이나 길가에 기름을 뿌렸다는 ‘각시탈 남성’을 찾는 등 수사의 방향이 구조적인 진상규명과는 점점 멀어지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구조적 요인을 조사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조사위가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힐즈버러 축구장 압사는 여러 요소가 복합돼 발생한 참사였다. 숨진 희생자들은 참사의 원인이 아니었다.”

1989년 영국 힐즈버러 참사를 21년 만에 재조사한 독립조사위원회(조사위)는 진상조사 결과를 이렇게 한 줄로 요약했다. 인권변호사와 범죄학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조사위는 2년에 걸쳐 조사한 결과를 2012년 발표했다. 1989년 당시엔 경찰이 ‘과격한 리버풀 팬의 경기장 난입’이라는 수사 결과를 내놓은 탓에 참사의 원인이 희생자들의 잘못이라는 쪽으로 규정됐다. 그러나 2010년 유족이 제기한 쟁점을 토대로 재조사에 나선 조사위는 2년에 걸쳐 45만 쪽의 자료를 확보하고 수십 명의 관계자를 면담한 끝에, 참사의 책임이 희생자가 아닌 축구클럽의 부실한 안전관리와 경찰의 미숙한 현장 대응에 있었음을 확인했다.

희생자는 참사의 원인이 아니다


<한겨레21>은 1989년 축구장에서 군중 97명이 숨진 힐즈버러 참사에 대해 영국 독립조사위원회가 2012년 펴낸 조사보고서, 2010년 독일의 음악축제 러브퍼레이드에서 21명이 숨진 참사에 대해 디르크 헬빙 취리히연방공과대학 교수가 펴낸 사회적 조사 보고서를 살펴봤다. 두 보고서는 참사의 직접적 책임이 있는 몇몇을 문책하거나 처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참사에 영향을 준 물리적·사회적·구조적 원인을 두루 분석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축구협회컵(FA컵) 준결승전이 열린 1989년 4월15일 오후 2시50분께, 힐즈버러 경기장 앞 개찰구는 리버풀 팬들로 빽빽했다. 개찰구가 워낙 좁고 고장이 잦은 탓에 2시간을 기다려도 경기장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경기 시작이 임박할수록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군중의 압력이 커졌다. 경찰은 인파 분산을 위해 관중석으로 진입하는 커다란 옆문을 열었다. 한꺼번에 경기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 군중은 가장 가까운 관중석 쪽으로 곧장 달려갔다. 먼저 관중석 앞쪽에 자리를 잡았던 이들은 갑자기 몰려든 군중과 경기장 앞에 설치된 철망 사이에 눌려 질식사했다.

2012년 발표된 보고서는 참사 당시만이 아니라 그 전에 있었던 상황까지 거슬러 올라가 관계기관의 대응을 파악한다. 축구장의 좁은 개찰구로 인한 혼잡 문제는 참사 이전에도 여러 번 문제를 일으켰다. 참사 8년 전인 1981년엔 인파를 분산하려 옆문을 개방했다가 38명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고 1988년에도 일부 팬이 밀려드는 인파에 혼절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러나 축구클럽은 이런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깊이 있게 분석하지도, 유의미한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축구클럽은 1989년 경기 때도 “전년도의 규칙을 따르면 된다”며 관계기관 브리핑을 따로 열지 않았다.

경찰 역시 수년간 구장 치안을 맡았던 이가 아니라 “10년 동안 힐즈버러에서 일한 적도, 군중 관리 경험도 없는” 이를 치안 담당 총책임자로 앉힌다. 경기 3주도 안 남긴 시점이다. 조사위는 1981년 사고 이후 경찰과 구장 간 불협화음이 이러한 인선의 배경이 됐을 것으로 판단했다. 새로 부임한 경찰은 안전이 아닌 군중의 마약과 무기 소지 가능성에 더 무게를 뒀다. 평소 경기장에 인파가 몰리면 관중석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닫아두곤 했으나, 그는 그런 관행도 알지 못했다. 참사 당일, 경기장 안팎에 배치된 경찰들은 서로 군중 관리 상황을 공유하지 않았다. 경기장 밖에 배치된 경찰은 옆문을 개방하면서 “경기장 안에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대로 경기장 안의 경찰은 입구 쪽 상황을 몰라, 앞쪽에 있던 관중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키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다.

구급대원들도 대응이 늦었다. 현장 관리자는 경기장의 소요가 흔한 관중의 경기장 난입 탓이라고 판단해 구급차 통제실에 “경미한 부상이 있지만 응급차량이 필요하진 않다”고 보고한다. 그는 경기 중단 15분 만에야 뒤늦게 사태를 깨닫고 ‘중대사고’임을 보고했다. 구급차가 오후 3시30분께 현장에 도착했으나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중상자와 사망자를 가려내는 절차가 계속 지연됐다. 희생자 가운데 일부가 살아 있었다고 추정되는 시간이다. 이 와중에 경찰은 체육관에 누워 있는 주검을 대상으로 무리하게 알코올 검사를 했다.

앞의 내용은 1989년 참사 당시가 아니라 2012년 조사위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힐즈버러 참사로 최종 유죄 판결을 받은 책임자는 경찰과 축구클럽 관계자 등 3명뿐이다. 하지만 조사위는 경찰 수사만으로 다 밝힐 수 없었던 구조적인 안전관리의 문제점을 총망라해 보고서에 기록했다.

2010년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열린 음악 축제 러브퍼레이드에서 21명이 압사한 참사가 발생했다. 축제장으로 들어가는 좁은 터널에 인파가 몰렸다. REUTERS

2010년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열린 음악 축제 러브퍼레이드에서 21명이 압사한 참사가 발생했다. 축제장으로 들어가는 좁은 터널에 인파가 몰렸다. REUTERS

군중 압사 연구자가 작성한 ‘시스템 실패’ 보고서

2010년 7월24일 독일 뒤스부르크에는 140만 명의 인파가 모였다. ‘러브퍼레이드’라는 음악축제를 즐기러 행사장에 온 이들이었다. 이 중 일부가 병목현상이 나타난 행사장 내부 길목을 빠져나가지 못함에 따라 21명이 압사하고 500여 명이 다쳤다.

이 참사에 대해서는 독일 경찰과 지방자치단체의 조사보고서 이외에 민간 차원의 조사가 별도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군중 압사 연구자인 디르크 헬빙 교수가 언론 보도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사고 영상, 온라인 커뮤니티 증언 등을 토대로 이른바 ‘대중 조사’에 나섰고 2012년 ‘시스템 실패로서의 군중 참사: 러브퍼레이드 분석을 통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헬빙 교수는 참사의 구조적 원인에 주목했다. 우선 행사 자체가 ‘처음부터 부적합한 장소에서 열렸다’. 앞서 러브퍼레이드는 넓은 광장이 있는 베를린에서 주로 열렸다. 하지만 안전관리에 어려움을 겪은 베를린시가 주최를 거부하면서 2007년부터 주최지가 해마다 바뀌었다. 2010년 마침 ‘문화도시’로 지정된 뒤스부르크시가 주최를 자처했다. 뒤스부르크 행사장은 기찻길과 고속도로 진입로 사이에 낀 곳이라 대규모 군중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주최 쪽은 참가자 수를 줄이겠다고 약속하고 행사를 유치했다.

당시 참사가 발생한 터널을 지나던 관람객 수는 약 17만 명으로, 애초 주최 쪽이 예측한 23만 명에 훨씬 못 미쳤다. 그러나 행사장 입구에 세워진 푸드트럭과 경찰차 등으로 인해 진입로가 좁아진 것이 문제였다. 예상보다 입장에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공연 진행 시각을 넘겨서도 입장하지 못한 관람객이 수두룩했다. “경기장 밖은 인파를 흡수할 편의시설이 미흡했고, 행사 개최가 늦어지면서 군중의 참을성도 바닥난 상태였다.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하나밖에 없었으며 오가는 인파가 분리되지 않아 마구 섞였다.”(헬빙 교수의 보고서)

현장에는 경찰도 3천 명이나 배치됐다. 그러나 축제가 진행되는 도중에 교대근무조가 바뀐데다 경찰 대부분이 군중 안전관리에 서툴렀다. 경찰은 행사장 바깥쪽에 경계선을 쳐서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악수를 뒀다. 확성기를 따로 챙겨가지 않았고 무전기는 통신 과부하로 먹통이었다. 현장엔 응급차량 통행로가 따로 없어 참사가 일어나서도 구급차량이 안쪽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참사 발생 1시간 가까이 지나서도 행사 주최자가 ‘성공적인 행사’라는 언론 인터뷰를 할 정도로 전체 상황을 파악하는 체계가 마련돼 있지 않았다.

지자체와 경찰의 총체적 문제점 조사해야

헬빙 교수는 보고서에서 “참사는 단지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여러 가지 위험요인의 관리 실패가 맞물려 일어난다. 희생양 하나를 삼는다고 재발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태원 참사의 원인과 관련해서도, 이 두 참사와 유사한 쟁점에 대해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핼러윈 때 이태원에 인파가 몰린 것은 올해가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10년간 이태원에 비슷한 위험 상황이 있었는지, 지자체와 경찰이 그간 좁은 골목에 몰리는 군중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등이 분석해야 할 사안으로 꼽힌다.

안전관리 체계와 재난대응 체계도 총체적으로 되짚을 필요가 있다. 용산구청은 2022년 핼러윈을 앞두고 안전관리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고 경찰은 참사 당일 군중 안전보다 마약 등 범죄 대응에 집중했다. 통행로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탓에 구급대는 환자 수송을 늦게 했고, 이마저도 치료가 급한 중환자가 아닌 심정지 환자를 인근 병원에 먼저 보냈다.

이와 같은 참사의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려면 ‘(경찰 등) 책임자로부터 독립적인’ 조사위원회를 꾸려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제안한다. 앞서 이태원 참사와 유사한 압사 사고가 일어났던 2005년 상주 축제나 2006년 롯데월드 무료개방 깔림 사고에 대해서도 독립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시스템안전을 연구한 윤완철 카이스트 명예교수(산업및시스템공학)는 “경찰이 집회와 같은 군중 관리는 익숙하나 행사처럼 ‘함께 섞이는’ 군중 관리는 서툴렀을 수 있다”며 “지자체도 지역에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유명한 거리를 파악해두고 그곳의 군중 밀집 위험에 미리 대처했어야 하는데 미비했다. (조사를 통해) 이런 부분들이 종합적으로 조사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관계기관이 △평상시 위험 보고를 적절히 했는가(감시·보고체계) △미비점을 발견해 조직에 반영했는가(학습체계) △행사 전에 미리 위험 시나리오를 준비했는가(예측체계) △참사 당시 위험에 적절하게 대처했는가(대응체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더 늦기 전에, 더 잊히기 전에

조사위 설립이 늦어질수록 조사 대상자들의 기억이 왜곡되거나 경찰 수사를 거치며 소극적으로 변할 수 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관련자 1천여 명을 만나 별도 조사보고서를 낸 홍원화 경북대 교수(건축공학)는 “생존자들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왜곡되기 때문에 현장 증언을 발 빠르게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을 통해 참사에 관한 팩트를 총체적으로 정리해야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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