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남자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판박이 얼굴에 앞머리를 내린 헤어스타일, 뿔테 안경에 데님 셔츠와 바지까지. 이태원 참사 희생자 홍의성의 쌍둥이 동생 홍두성(31)씨는 기자에게 미리 보내준 형의 사진 속 모습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먼저 떠난 형을 그리워하며 형이 입던 옷을 입고 머리도 형처럼 잘랐다고 한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일란성쌍둥이 형제는 모든 것을 함께 하며 자랐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다. 두성씨는 반에서 누가 햄버거를 돌리면 집에 가져가서 형과 나눠 먹었다고 한다. “항상 형님이랑 같이 먹는 게 익숙해서 혼자 먹는 게 이상했어요. 형님도 그랬어요. 껌 하나 생겨도 나눴어요.”
두성씨는 5분 먼저 태어난 형을 “형님”이라 부른다. 두성씨가 다섯 살 때 형이 먹던 귤을 뺏어 먹자 엄마가 ‘형님’으로 부르게 했다. 둘도 없는 친구처럼 단짝으로 지내면서 ‘형님’은 의성을 부르는 애칭이 됐다. 형과 누나도 있는 막둥이 형제는 같은 방을 썼다. 말싸움은 가끔 했지만 사이가 크게 틀어진 적은 없을 정도로 우애가 남달랐다. 두성씨 휴대전화에 의성은 ‘울트라매력피플 형’, 의성의 휴대전화에 두성씨는 ‘내동생♥’으로 저장돼 있다.
쌍둥이 형제는 안동의 한 대학에 나란히 진학했다. 형 의성은 간호학과, 동생 두성씨는 작업치료과를 다녔다. 만우절 때 장난 삼아 과를 바꿔서 수업을 듣기도 했다. 동생은 형의 과 모임에 가고, 형은 동생의 과 친구들과 어울렸다. 군대도 함께 갔다. 강원도 양구에 있는 부대에 배치받았는데, 의성은 군생활을 빡세게 해야 한다며 수색대를 지원했고 두성씨도 따랐다. 둘은 같은 생활관 옆자리에 나란히 누워 잠을 잤다.
의성은 결단력과 끈기가 있었다. 산악구보를 하면 늘 상위권이었다. 훈련 성적이 좋아 휴가를 많이 얻자 동생에게 양보하며 함께 휴가를 나왔다. 형제는 고된 행군을 마치고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나눠 먹으면서도 장난치고 낄낄거리며 행복한 추억을 쌓았다.
형제가 처음 떨어진 건 스물네 살이 되면서다. 두성씨는 대구에서 자취하며 작업치료사로 일했다. 장애 있는 아이들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일이다. 의성은 스물다섯에 안동의료원 병동간호사로 일했다. 여유가 생기면 자기 일이 아닌데도 동료 업무까지 맡아서 하고 후배들도 잘 챙겼다고 한다. 2년쯤 일했을 때 간호사로서 더 보람된 일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꿈꿨다. 하지만 가족이 만류하고 떠날 여건이 되지 않았다.
의성은 차라리 일을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며 삼성서울병원 수술실 간호사로 이직했다. 의성의 배움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스물아홉에는 디지털헬스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성균관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나이 들면 간호사로 오래 일할 수 없을 것 같아 원격의료 쪽으로 경력을 개발하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두성씨도 서른이 되기 전에 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마침 서울 동대문에서 옷 도매 일을 하는 친구의 소개로 옷가게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사실 서울행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형님이었어요. 서울 가면 형님이랑 같이 살 수 있으니까요.” 형제는 강남구 일원동에서 집을 구해 살았다. 둘은 같이 밥해먹고 놀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서른이 돼서는 캠핑을 자주 갔다.
2022년 10월29일에도 원래 지인과 셋이서 캠핑을 가기로 했다가 취소돼, 둘이 시간을 보냈다. 몇 주 뒤 찾아뵐 부모님 선물 사러 백화점에 들렀고, 의성이 저녁에 회사 동료의 결혼식에 다녀오는 동안 두성씨는 형을 기다렸다. 형제는 그냥 집에 가기 아쉬운데다 마침 핼러윈이고 해서 이태원에 가보기로 했다.
이태원에 도착한 게 밤 9시30분께였다.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온 김에 세계음식거리나 구경하고 집에 갈 생각이었다. 해밀톤호텔 옆 골목길로 갈 마음은 없었는데 인파가 밀려들면서 점점 골목으로 쓸려갔다. 그러면서 형과 동생은 2~3m가량 떨어졌다. 두성씨는 10분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못하니 무서워졌다. 점점 숨 쉬기도 힘들어졌다. 기절할 것 같은 찰나 왼쪽 뒤편에서 “홍두성! 홍두성!” 하는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성씨는 호흡이 안 돼서 대답을 못했다. ‘나는 지금 많이 힘든데 형은 소리치는 거 보니까 괜찮은가보다. 이 상황만 잘 넘기면 같이 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0분이 지났을까. 서서히 압박이 풀렸다. 주변 사람들이 기절해서 힘이 빠진 건지 골목 뒤쪽 사람들이 빠져나가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형님”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골목 아래 대로변으로 빠져나갔나 싶어 큰길로 향했다. 밤 11시40분께였다. 대로변에는 구급차가 몰려 있었고 얼굴이 옷에 덮인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두성씨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누운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옷을 발견했다.
뛰어가서 보니 형이 눈을 감고 있었다. 코피가 흘렀다. 두성씨는 소리치면서 도와달라고 했다. 간호사와 소방관이 왔는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하며 자리를 떴고, 자정을 넘겨서야 구급차를 타고 서울대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새벽 1시30분쯤 되자 밖에서 기다리던 두성씨를 의사가 불렀다. 두성씨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 번만 더 심폐소생을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의사는 “그러면 형을 괴롭히는 것밖에 안 된다”고 했다. 두성씨는 경남 거제에 사는 큰형한테 연락했다. 큰형이 병원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안치소에서 의성을 지켰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자꾸 형을 꺼내서 보고 얼굴을 맞대고 울었어요.” 두성씨는 날이 밝아서야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한 번도 우는 걸 본 적 없는 아버지가 우셨다. 검시가 늦어져 그날 저녁 8시에야 두성씨와 큰형은 운구차를 불러 안동으로 향했다.
장례를 치르고 두성씨는 술로 밤을 지새웠다. 정부가 연결해준 심리상담을 몇 차례 받았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술 마시며 휴대전화에 녹음된 형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안동 집에 의성의 컴퓨터와 옷가지 등 유품을 두고 함께 살던 서울 방과 비슷하게 꾸며놓고 지낸다.
두성씨가 들은 형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이름을 두 번 외친 것이었다. 형이 못다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형님은 아마 자기는 신경 쓰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재밌게 살라고 했을 것 같아요.” 의성을 생각하며 두성씨는 하루하루를 이겨내고 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한겨레21>은 참사 한 달째부터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추상화로 뭉뚱그려졌던 이야기를 세밀화로 다시 그려내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었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가족을 위한다고 만든 행정 절차가 어떻게 그들을 되레 상처 입히는지 <21>은 기록한다. 재난의 최전선에 선 가족들의 이야기는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록하는 우리 사회의 묵직한 사료가 될 것이다. 희생자의 아름다웠던 시절과 참사 이후 못다 한 이야기를 건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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