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었을 때 김정인(35·가명)씨와 부모님은 너무 놀랐다. 작은 원룸이 운동기구와 레크리에이션 용품으로 가득했다. 각종 아령과 목검, 턱걸이 기구, 캠핑용 텐트가 화장실과 싱크대를 제외하고 작은 공간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심지어 벽 한쪽에는 일인용 고무보트가 세워져 있었다. 대학원 주차장에는 산 지 3개월 된 오토바이가 놓여 있었다. 원룸 건물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이곳을 주차장으로 사용했다. 12월에는 오토바이로 전국일주를 하려고 했다. 12월의 계획에는 제주도 2주 살기도 있었다. 책상 위에는 11월3일 떠나는 독일행 비행기표가 있었다. 옆에는 독일에서 쓸 유심칩이 놓여 있었다. 하고 있던 것, 하고 싶었던 것, 앞으로 할 것 등이 그렇게 가득한 채로 남겨졌다. 오토바이 열쇠고리에는 이렇게 수놓아져 있다. ‘Bellula vita’(아름다운 인생).
2022년 스물여덟 원준은 남에게 속을 내비치지 않는 아이였다. 서울의 대학원에 가는 것도 가족 카톡방에 “합격했다”는 말이 간단하게 올라온 뒤 알았다. 서울에 면접도 가고 시험 준비도 꽤 했을 텐데 결과만 알려줬다. 고향 경북 김천에서 서울로 올라온 원준은 정인이 사는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가까운 제기동에 살 집을 찾았다.
“대학원에서 졸업을 앞둔 지금도 원준이 공부에 재주가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태어난 것까지 기억나는 6살 터울의 동생이다. 눈이 똘망똘망하게 커서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바나나우유 하나를 먹어도 예쁜 걸 먹는 아이였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뭐 하고 싶다, 뭐 먹고 싶다라는 말은 별로 하지 않았다. “밥 묵었나” “읎다”라는 단답형의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사춘기도 부모 속을 썩이거나 반항하는 일 없이 지나갔다. 중학교 졸업 뒤, 취업하겠다며 구미에 있는 마이스터교로 진학했다. 진학 연계 과정으로 졸업 뒤 바로 취업했다. 방호복을 입고 공장 내 기계를 만지는 일이었다. 3교대였는데, “힘들다”라는 말을 정인도 들었다. 공장을 3년3개월을 다닌 뒤 군대에 갔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생각한 것을 계속 밀고 나갔다.” 그것이 젊음이고 원준이 가진 힘이었다. 군대를 갔다 온 뒤 대학교를 가겠다고 선언했다. 군대에서도 수능 공부를 한 것 같았다. 지역 사립대에 그해에 바로 입학했다. 동기보다 4년이나 많은 나이였지만 활발하게 학교생활을 해나갔다. 자원봉사 활동을 찾아서 했고, 필리핀 등의 나라로 해외봉사 활동을 하러 갔다. 영국에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산학협력 결과물로 총장상을 받았다. 대학 졸업 뒤 대학원에 갔다. 정부지원으로 학비는 들지 않는 석사과정이었다.
제기동 원룸을 보고서야 원준이 얼마나 운동에 진심이었는지를 알았다. “수영을 한다면 그냥 생존 수영을 하는 게 아니라 숨 쉬는 원리를 공부하기 위해 해부학을 공부하고 긴급구조 자격증까지 따는 식이었다.” 매일매일을 똑같이 생활했다. 저녁에는 헬스를 빠지지 않고 했다. 웃통을 벗고 거울을 보며 찍은 셀카에는 슬림한 몸에 근육이 꽤 붙어 있었다.
자전거 일주 수첩에는 2020년 7월 제주도 자전거 환상 종주를 도장으로 인증하고 있었다. 자전거와 함께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간 것이었다. 기차칸에서 웃는 모습의 사진이 남아 있었다. 살고 있던 제기동에서 한강까지는 먼 거리였지만, 원준의 휴대전화에는 밤의 한강 사진이 가득했다. “김천은 분지라 넓게 탁 트인 곳이 좋았나봐요. 서울을 열심히 즐기려고 한 것 같아요.” 모두 추측이다. 추측은 물음표로 이어진다.
2022년 여름에는 고무보트를 타고 한강을 혼자 나갔다가 패들(노)이 부러져 못 돌아올 뻔했다고 적어놓았다. 정인씨는 말이 없는 동생이었기에 더욱더 궁금하다. 너는 한강에서 무엇을 보았니, 왜 밤의 한강을 좋아했니, 한강에 자주 나간 것은 무엇 때문이었니.
2022년 10월30일 오전에 김천의 부모님 집으로 경찰이 찾아왔다. 10시30분 무렵이었다. 전날의 이태원 사고에서 신원이 확인됐다고 했다. 부모님은 서울에 있는 정인씨에게 연락했고, 정인씨는 서울 노원구 을지병원으로 달려갔다. 사람 많은 곳도 술을 마시는 것도 즐기지 않고 놀러다니지도 않던 아이였기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은 원준이 확실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 말씀으로도 (주검의) 옷이 다 벗겨져 있었다고 하더라.” 배에는 붉은색으로 표시돼 있었다. 원준의 옷은 결국 찾지 못했다. 소지품도 하나 없었다. 가방이 없는 건 이해됐지만 휴대전화도 찾을 수 없었다. 참사일 오전, 친구와 북한산에 갔던 원준은 이태원에서 저녁을 먹자는 친구의 제안에 따라 이태원으로 갔다. 그래서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태원은 혼잡했고 3시간 동안 헤매다가 결국 저녁을 못 먹고 헤어졌다. 헤어진 곳 어디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운동해 건장하던 아이가 왜 빠져나오지 못했는지, 거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 ‘구급 일지’를 요청했지만 일지에도 의문을 풀어주는 말은 없었다. 담당 경찰에게 여러 번 요청하고 유실물센터를 헤맨 끝에 휴대전화를 찾을 수 있었다.
급하게 고향에서 2일장을 했다. 쿵쿵쿵, 하루는 정리하고 누웠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급하게 났다. 문을 열어보니 피자집 옷을 입은 청년이 헉헉거리며 서 있었다. 청년 옆에는 킥보드가 있었다. 원준의 중학교 때 친구였다.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원준의 소식을 듣고 그대로, 1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킥보드를 타고 달려왔다.
해지하지 않은 휴대전화로 친구들의 안부 문자와 함께 연극, 오페라, 발레 예매표 안내가 온다. 이런 것을 즐기는 줄 몰랐다. 동생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여전히 많다. 이렇게 억지로 동생을 알아가고 있다.
정인씨는 누우면 잠이 안 오고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들어 정신과를 찾았다. “찻길 가까이에서 노는 아이를 보고 있는 기분이에요. 차가 오면 어떡하지, 아기가 찻길로 뛰어들면 어떡하지, 이런 불안한 기분이 없어지지 않아요.” 정인씨와의 인터뷰는 사고가 난 지 3개월째인 1월31일에 했다. 부모님은 원준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여전히 참여하지 못했다. “원준이의 떠남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세요.”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정말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민상담도 해주고 친오빠 같았던 원준 오빠가 이제 옆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픕니다. 더 많은 걸 이야기하고 웃고 싶었는데, 정말 이상한 이야기를 해도 쾌활하게 웃으며 들어줬어요. 오빠 웃음은 정말 나이에 맞지 않는 어린아이 웃음이었습니다.
한때 마지막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제가 꼭 오빠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서 내 마지막에 떡볶이 들고 와달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예의가 없는 걸 알지만 원준 오빠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 햄버거를 들고 왔습니다. 원준 오빠는 햄버거를 좋아했어요. 프랜차이즈점에서는 버거킹이 1등이었습니다. 앞으로 햄버거를 볼 때마다 원준 오빠 생각이 더 깊어질 것 같아요.
(…) 원준 오빠는 큰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든든했어요. 그리고 꿈도 많았습니다. 원준 오빠의 꿈은 자전거 타고 대한민국 일주 또는 일본 일주를 하는 것이었어요. 또 대학원 졸업하면 서울 스타트업이나 진주 쪽 회사에서 몇 년 일하다가 사업하고 싶어 했습니다. 성공하면 제게 일자리를 줄 테니 시험공부나 하라며 저를 아껴주던 오빠였어요. 그리고 나이가 들면 농촌에서 농사도 짓고 카페도 운영하며 살 거라고 했습니다.
(…) 제가 정말 원준 오빠를 큰사람으로서 좋아했는데, 고맙다는 말도 많이 못한 것 같아 이 편지를 빌려 말합니다. 원준 오빠! 오빠라고 부르는 게 낯선데 진작에 이렇게 부를걸! 미안! 덕분에 행복했고 많이 웃었어. 좋은 추억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그동안 정말 고마웠고 고마웠어. 우리 잘 지내다가 보자!! 안녕 나의 자전거 보호자!!
<한겨레21>은 참사 한 달째부터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추상화로 뭉뚱그려졌던 이야기를 세밀화로 다시 그려내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었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가족을 위한다고 만든 행정 절차가 어떻게 그들을 되레 상처 입히는지 <21>은 기록한다. 재난의 최전선에 선 가족들의 이야기는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록하는 우리 사회의 묵직한 사료가 될 것이다. 희생자의 아름다웠던 시절과 참사 이후 못다 한 이야기를 건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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