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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는 말이 아직 부족한 나라

독일·영국·일본·프랑스 ‘동의 없는 성행위’ 처벌… 한국은 여전히 피해자 저항 정도 따져
등록 2026-05-07 21:41 수정 2026-05-12 15:47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와 여성·시민·사회 243개 단체가 2023년 7월2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 본관 앞에서 형법 제297조 강간죄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와 여성·시민·사회 243개 단체가 2023년 7월2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 본관 앞에서 형법 제297조 강간죄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동의 없는 성행위(성교 포함)는 개인의 기본권인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성폭력이므로 처벌해야 한다.’

세계가 인정하는 상식이다. 독일은 2016년 개정 형법에서 폭행·협박을 구성요건(법이 정한 금지행위)으로 하는 ‘성적강요죄’ 외에 ‘성적침해죄’를 신설해 동의 없는 성행위를 성범죄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미국은 2022년 연방형법 개정으로 타인의 동의 없이 성행위를 하면 강간죄 내지 강제추행죄가 성립하고, 폭행·협박을 동반하면 가중처벌한다. 영국에서도 타인의 동의 없이 간음 내지 성적 접촉을 하면 강간죄 내지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각주 1) 일본도 2023년 7월 시행된 개정 형법에 ‘부동의성교죄’ 등을 신설해 상대방이 성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형성·표명했는데도 성교 등을 하거나 상대방이 그런 의사를 형성·표명하기 곤란한 상태에서 성교 등을 하는 사람을 처벌한다.(제1560호 참조)

세계는 이미 ‘비동의=강간’

강간죄와 강제추행죄에서 ‘최협의설’(각주 2)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입법례를 가진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다. 프랑스도 성범죄에서 폭행은 피해자가 저항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지젤 펠리코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집단강간 사건(각주 3)이 알려진 이후, 프랑스 의회는 2025년 10월 형법을 개정했다. 이 개정 형법은 그전까지 폭력·강요·협박에 의하거나 기습적으로 이뤄진 모든 성행위로 정의된 ‘성적 침해’를 모든 비동의 성행위로 규정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스페인 등과 마찬가지로 ‘비동의 강간’ 개념을 법에 명시한 유럽 국가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각주 4)

나아가 유럽의회도 2026년 4월28일 ‘모든 유럽연합 국가에서 강간은 동의가 없는 상태를 기준으로 정의돼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 인권조약기구 중 하나인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이미 2017년 한국을 비롯한 여성차별철폐협약 당사국에 “성범죄의 정의는 자유로운 동의가 없다는 점을 기반으로 하며 강압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권고했다.(각주 5)

이처럼 동의 여부에 초점을 맞춘 강간죄 등 규정 마련은 세계적 흐름이다. 한국 국회와 정부가 입법 부작위(마땅히 할 일을 안 함)로 시대 변화에 뒤처지는 동안 한국 법원의 판례 법리와 재판 실무는 바뀌고 있다. 비록 명시적으로 강간죄에서의 최협의설을 폐기하지는 않았지만, 대법원은 사후적으로 봤을 때 피해자가 죽을힘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더라도 피해자가 성교 당시 처했던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해 강간죄 성립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판례를 제시했다.(각주 6) 그것을 고려할 수 있는 인식론적 도구인 ‘성인지 감수성’을 판결 이유에 언급한 대법원 판결도 이후에 선고됐다.(각주 7) 대법원은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으므로 그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2018도7709)

저항을 증명하라는 폭력

일각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에 입각한 판단이 피해자의 진술만을 지나치게 신빙해서 무죄추정 원칙을 훼손한다고 비판한다.(각주 8) 무죄추정 원칙의 핵심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는 입증, 즉 유죄를 확신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입증이다.

그러나 성인지 감수성을 매개로 한 판단은 피해자의 주관적 내면에 법관이 감정을 이입해 무조건 피해자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부정할 만한 외부적 정황에 대해 법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원리로 작동한다. 다시 말하면,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는 입증에 이른 것인지를 면밀하게 검토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처한 특수한 사정을 상황적 맥락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자를 둘러싼 환경 등 외적 요소와 피해자 행위 간 상호작용을 배제한 채 행위 자체만을 따로 분리해서 본다면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성인지 감수성에 입각한 판단은 공소사실에 대한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는 입증 여부를 재검토함으로써 무죄추정 원칙을 보강하고, 판결이 가지는 설득력과 무게감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각주 9)

‘동의는 불분명한 개념이라 명확성을 요구하는 형법상 범죄로 규정하기 어렵다.’ 상대방의 동의가 없음을 기초로 하는 성범죄의 정의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처벌 여부가 피해자 의사에 달린 경우는 주거침입, 폭행, 상해, 절도, 카메라등이용촬영(일명 불법촬영) 등 형사법에 이미 존재한다.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이제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더욱이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한 성범죄 도입은 처벌 공백을 보완한다. 2018년 7월 동의 없는 성행위를 성범죄로 처벌하는 법이 시행된 스웨덴에서는 강간죄로 기소된 사건이 2017년 236건에서 2020년 455건으로 증가했다. 스웨덴 검사들은 ‘가해자의 폭행, 협박, 취약성 이용이 있었는가’ 또는 ‘피해자가 어떻게, 얼마나 저항했는가’가 아니라 ‘피해자의 자발적인 동의가 있었는가’로 가해자의 유죄 입증 초점이 바뀐 이후 법을 적용하기가 더 수월해졌고 유죄 판결을 얻는 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각주 10)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1. 대법원 2023년 9월21일 선고 2018도13877 전원합의체 판결
2. 강간죄와 강제추행죄의 구성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이 상대방의 항거가 현저히 곤란할 정도로 강력할 것을 요구하는 해석
3. 지젤 펠리코의 남성 배우자 도미니크 펠리코가 2011년부터 10여 년간 지젤에게 약을 먹이고 의식을 잃게 한 뒤 50여 명의 남성이 지젤을 강간하도록 한 사건
4. 곽서희, ‘프랑스, 강간죄에 합의 개념 포함하는 법안 가결’,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국제동향, 2025
5. UN CEDAW, General recommendation No. 35(2017) on gender-based violence against women, updating general recommendation No. 19(1992)
6. 대법원 2005년 7월28일 선고 2005도3071 판결
7. 대법원 2018년 4월12일 선고 2017두74702 판결, 대법원 2018년 10월25일 선고 2018도7709 판결
8. 우인성, ‘‘성인지 감수성’에 관해 판시한 대법원의 성범죄 형사판결에 관한 소고(후략)’, 형사판례연구 제29권, 2021
9. 김선화, ‘‘성인지 감수성’은 젠더편향적 기준인가?(후략)’, 법조 제74권 제1호, 2025
10. Brå(스웨덴 국립 범죄예방위원회), ‘Application and consequences of the consent law’,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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