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4월2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동의 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분명 싫다고 했다. ‘아파.’ ‘그만해.’ ‘안 돼.’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표현했다. 뺨까지 때리면서 거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남성은 멈추지 않고 유사강간을 이어갔다. 완력을 사용해 여성의 손목을 꽉 눌렀고, 완강히 저항하는 여성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여성은 계속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다. 그제야 남성은 범행을 중단하고 여성의 집에서 나갔다. 그런 그에게 법원이 선고한 판결은 무죄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저항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더 해야 했던 걸까요.” 피해자 ㄱ씨를 2026년 5월1일 만났다. 법률대리인인 오지원 변호사(법률사무소 ‘법과치유’ 대표)가 동석했다. _편집자
ㄴ씨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다. 늘 여럿이 어울려 만났고 허물없이 지낸 사이였지만, 각자 하는 일로 바빠 갈수록 만날 일이 줄었다. 그러던 어느 날, ㄴ씨한테 ‘오랜만에 보자’는 연락이 왔다. ‘네가 바쁘니까 내가 네 집 구경도 할 겸 너 사는 동네로 가겠다’고 했다. ㄱ씨가 ㄴ씨와 둘이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당시는 ㄱ씨가 건강관리를 이유로 술을 안 마시던 시기다. 그런 ㄱ씨에게 ㄴ씨는 저녁을 먹으며 술을 계속 권했다.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고, 하고 있는 사업이 힘들어서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한 ㄱ씨는 ㄴ씨가 건네는 술을 의심 없이 마셨다. 식당에서 반주로 마신 술과 이후 바(술집)에서 마신 술이 더해지며 취기가 몰려들었다.
집 구경을 하고 싶다는 ㄴ씨와 같이 집에 갔다. ㄴ씨가 집에서도 술을 찾았다. ㄱ씨는 ‘한두 잔만 먹고 집에 빨리 가라’고 했다. 하지만 ㄴ씨는 계속 머물렀다. ㄴ씨의 권유로 술을 더 마신 탓에 ㄱ씨는 많이 취한 상태였다.
그때 ㄴ씨가 ㄱ씨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ㄱ씨가 ‘하지 말라’고 했다. ㄴ씨의 강간 시도에서 촉발된 몸싸움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ㄴ씨가 멈췄다. 그사이에 ㄱ씨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후의 대화 상황을 녹음했다. ‘난 얘한테 호감을 느낀 적이 없는데, 애인도 있는 애가 왜 이러지?’ 충격받은 ㄱ씨는 혼란스러웠다.
ㄴ씨는 사과했다.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말에 ㄱ씨의 긴장은 조금씩 풀렸다. 그러면서도 성관계를 원치 않는다는 말은 계속했다. 그러나 ㄴ씨는 시간이 지나 ㄱ씨가 경계를 푼 상태를 이용해 기습적으로 유사강간을 했다.
그 특성상 물적 증거가 빈약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반된 진술만이 존재하는 다른 성폭력 사건과 달리, 이 사건은 녹음파일이라는 객관적인 물증이 있다. ㄴ씨의 유사강간 전후로 ㄱ씨가 약 1시간 동안 성행위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75회 이상 명확히 밝혔는데도 ㄴ씨가 이를 무시하고 범행을 이어간 정황이 녹음파일에서 확인됐다. 그런데 1·2심 법원이 유사강간죄로 기소된 ㄴ씨에게 선고한 판결은 무죄였다. 판결은 검사가 상고하지 않아 2026년 3월 확정됐다.
1심 법원이 판단 근거로 가장 먼저 제시한 법리는 ‘최협의설’ 판례였다. 강간죄의 구성요건(법이 정한 금지행위)인 ‘폭행 또는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은 ㄴ씨가 ㄱ씨를 상대로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을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2심 법원은 원심 판단이 타당하다고 했다.
이는 대법원이 성폭력 사건에서 최초로 ‘성인지 감수성’을 인용한 판결을 선고한 이후 최협의설에 근거한 해석에서 벗어나고 있는 최근 재판 경향과도 맞지 않는다. 앞서 대법원은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으므로, 그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대법원 2018년 10월25일 선고 2018도7709 판결)
여기서 성별로 인한 일상적인 차별과 불균형을 인지하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분석할 수 있는 인식 능력인 성인지 감수성은, 감성·감정이 아니라 관점의 균형을 잡기 위한 고도의 지적이고 이성적인 능력이다. ‘피해자다움’을 설정하고 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건마다 피해자가 놓인 상황·상태 등을 고려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물론 이 능력은 저절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각주 1)
이후 법원 실무는 피해자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판결에 반영하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성범죄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도 피해자가 매우 약한 유형력의 정도로도 쉽게 항거불능 상태에 빠진다는 점을 점점 더 이해하게 됐다. 이런 변화 속에 성범죄 재판에서 대부분의 쟁점은 ‘항거불능 폭행·협박의 유무’가 아니라 ‘피해자의 동의 여부’로 수렴되고 있다. 신체와 신체가 접촉하는 성범죄 사건에서 아무런 유형력도 작용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근래의 성범죄 재판에서는 “폭행·협박”보다는 “유형력” 용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각주 2)
ㄴ씨 사건을 심리한 두 법원은 ㄱ씨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세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특히 1심 법원은 ‘ㄱ씨가 ㄴ씨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피해를 입을 당시 ㄱ씨는 등 뒤에 창문이 있었지만 탈출할 수 없었다. 뛰어내리면 죽을 수도 있는 높이였다. 반대편 현관문으로 나가는 길은 자신보다 키가 10~15㎝ 정도 큰 ㄴ씨가 막고 있었다. 더불어 ㄱ씨는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저항하면서 뺨을 때렸는데 가해자가 ‘흥분된다’고 말하는 상황이 너무 충격이었어요. 모든 게 두려웠어요.” ㄱ씨의 말이다.
이미 2005년에 이와 배치되는 대법원 판례가 나왔다. “사후적으로 보아 피해자가 성교 이전에 범행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피해자가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다.(대법원 2005년 7월28일 선고 2005도3071 판결)
법원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법원도 ㄱ씨가 비동의(거부) 의사를 표시한 사실은 인정했다. 그런데 ㄴ씨에게 범죄를 실현한다는 인식과 의욕, 즉 유사강간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ㄴ씨 입장에서 ㄱ씨의 동의가 있었다는 착오가 생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법원은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ㄱ씨는 유사강간 피해 전에 자의로 ㄴ씨와 키스하고 애무했다.’
그러나 ㄱ씨는 “그 상황에서도 ㄴ씨에게 성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계속 표현했다”고 말했다.
법원은 ‘죄의 성립요소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는 형법 조항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ㄱ씨의 비동의 사실을 몰랐다면 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ㄱ씨가 계속 말과 행동으로 ‘싫다’고 했는데도 ㄴ씨가 성폭력을 감행한 것은 ‘그래도 괜찮겠지’라는 미필적 고의(각주 3)가 ㄴ씨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심 재판 단계부터 ㄱ씨를 대리한 오지원 변호사가 이 점을 의견서에서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이 역시 다른 법원의 판단과 달랐다. 2018~2019년 선고된 성폭력 사건 1심 판결 중에는 ‘피고인과 피해자가 과거에 성관계를 한 사실이 있다는 것만으로 장래에 있을 모든 형태의 성관계에 대한 동의까지 추정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피고인이 범행 이후에 피해자와 성관계를 한 사실이 있다는 등의 사정만으로 피해자가 과거에 있었던 강제적인 신체 접촉 및 성관계에 대하여 동의하거나 추인을 하였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고 보고 피고인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한 경우가 있다.(각주 4) ㄱ씨의 ‘표시된 거부 의사’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피고인이 피해자의 내심의 의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며 ㄴ씨의 착오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것은 그 책임이 ㄱ씨에게 있다고 본 것과 다름없다.
이는 재판부가 강간통념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강간통념이란 강간 등 성폭력 범죄와 관련해 일반인 등이 알고 있는 편견이나 고정관념 등의 잘못된 인식이자 강간을 미화하는 관념으로서, 성폭력 범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심리적 기제를 말한다. ‘남자가 성관계를 요구할 때 여자가 “안 돼”라고 응답하는 것은 허락한다는 뜻이다.’ ‘남자는 성충동을 통제할 수 없어 여자의 동의가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만일 여자가 목을 껴안고 애무하다 발전하여 남자가 성폭행을 했다면 잘못은 여자에게 있다.’ 이런 인식이 모두 강간통념에 해당한다.(각주 5) 형사사건에서 법관이 적용하는 경험칙이 법관 개인의 개별 사건 판단 경험의 축적이라는 주관적 요소를 내포한다는 점(각주 6), 법원도 사회적 통념에서 사고하고 판단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ㄴ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두 재판부의 경험칙은 강간통념과 무관하지 않다.
ㄱ씨는 오지원 변호사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위원회 변호사들의 도움으로 4월17일 ㄴ씨의 무죄가 확정된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재판소원 제도가 없었다면 평생 이 억울함을 떨치지 못하고 ‘내가 잘못한 건가’라는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냥 ‘노’(No)라고 말하면 멈추는 세상, ‘노’를 ‘노’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ㄱ씨의 말이다. 성적 자기결정권과 인격권,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의 기본권이 침해된 ㄱ씨의 호소에, 이제 헌재가 응답할 차례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동의 없는 성행위를 처벌하는 해외 입법례를 다룬 기사는 2026년 5월 12일 보도될 예정입니다.
1.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D 지음, 동녘 펴냄, 2022
2. 김동현, ‘비동의간음죄 도입론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형법 297조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 쟁점과 과제 토론회’ 자료집, 2023
3. 어떤 행위로 인해 범죄에 해당하는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행하는 심리 상태
4. 김선화, ‘‘성인지 감수성’은 젠더편향적 기준인가?(후략)’, 법조 제74권 제1호, 2025
5. 박기쁨,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과 국민참여재판에서의 배심원 지침에 관한 연구’, 사법정책연구원, 2022
6. 이선미 등, ‘성폭력 형사사건에서의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과 경험칙에 관한 연구’, 사법정책연구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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