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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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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보내드린 지 3주 만에 아들, 너도 가면 난 어떡해…

[미안해, 기억할게] 이태원 희생자 이야기 ㉔양희준
심리치료·노래·바리스타·봉사활동까지, 꿈많고 따뜻했던 막내아들
등록 2023-02-18 04:48 수정 2023-02-24 07:42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일러스트레이션 권민지

가족들은 고작 3주 만에 다시 장례식장에 왔다. 할아버지 사진이 놓였던 자리, 손자 사진이 들어섰다.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떠나보냈던 양수현(65)씨는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다시 상복을 입었다. 3주 전 아들로서 입었던 옷을 아버지가 돼 다시 걸쳤다. 빈소에 덩그러니 놓인 아들 사진을 보며 주저앉아 울었다. “네가 가면 나는 어떻게 하냐… 어떻게 사냐….”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도 괜찮아.”

2008년 12월11일. 초등학교 6학년 희준은 미래의 자신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꿈은 캐릭터 디자이너를 하려는데, 소방관도 하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기려는 것 같아. 백수만 아니면 만사 OK! 내 꿈은 내가 개척해 나가야 하니까.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도 괜찮아.”

양희준씨가 문신을 배우는 모습. 유가족 제공

양희준씨가 문신을 배우는 모습. 유가족 제공

희준이 꿈꾸던 미래는 시도 때도 없이 바뀌었다. 고등학생 땐 심리치료사가 되겠다고 미친 듯이 책을 읽었고 스무 살이 넘더니 노래하고 싶다고 했다. 문신을 배우고 커피 내리는 법을 익혔다. 그중에서도 남을 돕는 일에 가장 열심이었다. 사회복지시설에서 대체복무를 하며 특히 사회복지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희준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산하 경기도 광주 한사랑마을에서 중증장애인의 일상생활 등을 돕는 일을 했다. 한사랑마을에서 사회복무요원을 담당했던 직원 오희정씨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했던 친구”라고 희준을 기억했다. 희준은 소집 해제 이후에도 종종 이곳을 찾아 봉사활동을 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희준은 가족과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여행을 많이 갔다. “다른 가족들은 여행을 다녀온 게 추억이라고 하는데 저희는 그게 일상이었어요.” 희준의 큰누나 양진아(35)씨가 말했다. 누나인 진아씨와 현아(30)씨가 결혼한 뒤에도 가족은 자주 모였다. 누나와 조카들이 집에 올 때면 희준은 밖에 있다가도 서둘러 집으로 들어왔다.

양희준씨가 제주도에 여행가서 찍은 사진. 유가족 제공

양희준씨가 제주도에 여행가서 찍은 사진. 유가족 제공

누나들에게 희준은 어릴 때부터 약하고 여린 동생이었다. 큰누나와 8살 터울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다 툭하면 우는 동생을 누나들은 ‘아들'이라고 불렀다. 희준은 누나라고 부르는 대신 일부러 이름을 부르거나 ‘야’라고 했다. 누나들이 물건 하나 사다달라고 부탁하면 툴툴거렸다. 그래도 막상 돌아와서는 부탁한 물건을 무심코 건넸다. 그런 동생이었다.

그런 희준이 누나들에게 오빠처럼 보였던 순간이 딱 한 번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빠 옆에서 상주 역할을 했을 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희준이 가장 먼저 했던 말은 이랬다. “누나, 울지 마. 엄마 아빠가 힘든 거 누나도 알지? 그러니까 너무 많이 힘들어하지 마.” 진아씨는 그런 희준을 보며 ‘오빠였다면 이랬을까’ 생각했다.

2022년 10월28일. 스물여섯 희준은 봉사활동을 하며 알게 된 중증장애인 시설 이용자와 함께 오랜만에 한사랑마을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런데 코로나19 확진자가 갑자기 늘어나 외부인 방문이 금지됐다. 희준도 마침 감기 기운이 있어 몸이 좋지 않았다. 다음날 낮에 희준은 엄마 김영숙(57)씨와 병원에 다녀왔다. 오후에 엄마가 집에 들어오니 희준은 나가고 없었다. 엄마가 보낸 문자메시지에 희준은 ‘엄마, 나 친구가 데리러 와서 저녁만 먹고 들어올게요'라고 답장했다. 마지막 연락이었다. 아무도 희준이 이태원에 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날 희준은 친구 세 명과 함께 서울 이태원에 갔다. 외국인 친구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이태원에서 우즈베키스탄 음식을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밥을 먹고 나와 인파에 친구들은 흩어졌다. 그날 밤 자정께, 엄마 영숙씨는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전화가 걸려왔다. 희준의 휴대전화 번호가 뜨는데, 희준이 아닌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까지 희준과 같이 있다가 먼저 구조된 친구는 희준이 구조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친구가 다른 사람들을 돕고 돌아오니 희준은 그 자리에 없었다. 휴대전화만 남아 있었다. 전화를 받은 부모님은 그길로 이태원으로 향했다. 누나들은 다음날 아침에야 소식을 들었다. 누구 하나 희준의 소식을 알려주지 없으니 가족이 직접 나섰다. 누나들은 서울에 있는 모든 병원 응급실에 전화를 걸었다. “덩치 크고 문신 있는 사람 있을까요?” “없습니다.” “신원조회 안 된 사람 있을까요?” “없습니다.” 똑같은 질문과 답이 반복됐다.

양희준씨가 봉사활동을 할 당시 돌봤던 아이가 써준 편지. 유가족 제공

양희준씨가 봉사활동을 할 당시 돌봤던 아이가 써준 편지. 유가족 제공

다시, 다시, 다시 확인해볼게요

다음날 오전 10시께 부모님 휴대전화로 연락이 왔다. 경찰은 희준이 을지대병원에 있다고 했다. 부모님과 진아씨 부부가 먼저 병원에 도착했다. 부모님은 희준이 누워 있는 영안실 안에서 울기만 했다. 한참 울고 나와서 “제대로 확인을 못했다”며 다시 확인하겠다고 했다. 진아씨 남편이 들어가 다시 확인했다. “직접 확인을 못했다”고, ”다시 들어가겠다”고 부모님은 그 소리만 반복했다.

그렇게 3주 만에 가족은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모든 게 똑같은데, 불과 3주 전 상주복을 입고 손님을 맞고 음식을 나르던 희준만 없었다. 누나들은 희준의 장례식 내내 할아버지 장례식이 겹쳐 떠올랐다. 희준이 잠시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 이후 가족의 슬픔과 상처는 더 커졌다. 장례식장에서 경찰이 “부검하겠냐”고 물어보고, 지원금을 받은 이후 국가에서 연락이 온 적은 없었다. 심리상담을 받으면 `환자'가 되는 것 같아 꺼려졌다. 주변에서 더 측은하게 볼까, 연락도 차단했다. 아무도 그날 밤 희준이 어떻게 을지대병원으로 가게 됐는지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내 동생이 언제 어디서 (숨졌는지), 딱 그것만 알았으면 좋겠는데….”(누나 진아씨)

현아씨는 을지대병원부터 거꾸로 동생의 동선을 하나하나 추적했다. 관공서에 전화를 돌리고 정보공개청구를 하다보니, 다음날 새벽 3시부터 아침까지의 이동 경로는 어렴풋이 알게 됐다. 하지만 참사 발생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희준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현아씨는 아직도 모자이크 되지 않은 참사 당시 영상을 보며 동생을 찾는다.

어린 시절 양희준씨(오른쪽 아래)와 작은누나 양현아씨(왼쪽), 큰누나 양진아씨. 유가족 제공

어린 시절 양희준씨(오른쪽 아래)와 작은누나 양현아씨(왼쪽), 큰누나 양진아씨. 유가족 제공

생존자를 위로하고, 유가족에게 위로받고

2022년 12월15일 한덕수 국무총리가 이태원 참사 생존자였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재현군을 향해 “본인 생각이 좀더 굳건하고 ‘치료를 받겠다’는 생각들이 더 강했으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말했을 때 누나들은 희준과 함께 이태원을 찾았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현아씨가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밤에 눈을 감으면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요. 혈액순환이 안 돼서 다리도 너무 시려요. 근데, (한덕수 총리가) 저희가 잘못했대요. 차라리 그날 저도 (하늘나라로) 갔으면 이런 트라우마도 안 겪었을 텐데….” 현아씨는 말했다. “아니야. 너희가 이렇게 살아서 얘기해줘서 고마워. 살아줘서 너무 고마워.”

현아씨는 가족 중 처음으로 이태원에 갔다. 유가족 모임에서 처음 만난 한 희생자 어머니를 붙잡고 “동생이 너무 보고 싶다”며 펑펑 울었다. 부모님은 아직 이태원에 가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사십구재를 지낸 다음날 아침 현아씨 여섯 딸이 일어나 말했다. “(돌아가신) 시골 할아버지랑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 “왜?” “꿈에 나왔어요.” “삼촌 잘 지내? 웃고 있어?” “웃고 있어요.”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양희준씨의 큰누나 양진아씨가 쓴 편지. 유가족 제공

양희준씨의 큰누나 양진아씨가 쓴 편지. 유가족 제공

양희준씨의 작은누나 양현아씨가 쓴 편지. 유가족 제공

양희준씨의 작은누나 양현아씨가 쓴 편지. 유가족 제공

<한겨레21>은 참사 한 달째부터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추상화로 뭉뚱그려졌던 이야기를 세밀화로 다시 그려내기 위해서다.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었던 것이 수사 과정에서 어떻게 배제되고, 가족을 위한다고 만든 행정 절차가 어떻게 그들을 되레 상처 입히는지 <21>은 기록한다. 재난의 최전선에 선 가족들의 이야기는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록하는 우리 사회의 묵직한 사료가 될 것이다. 희생자의 아름다웠던 시절과 참사 이후 못다 한 이야기를 건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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