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전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이후 장애인 인권 이슈는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 처음에는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요구한 것은 정치권이 이동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지해달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정치인들이 이동권의 중요성을 인지한다고 했지만 번번이 기획재정부에 의해 실제 예산 확보와 집행이 막힌 것에 대한 항의였고 요구였다.
또 문제가 된 것은 전장연의 항의 방식이었다. 왜 하필 ‘비장애인’이 출근하는 바쁜 시간에 지하철을 가로막고 투쟁해 선량한 ‘일반’ 사람의 일상을 방해하고 불편하게 하느냐는 항의였다. 여기에 악의적으로 편집한 동영상에 의해 장애인은 자기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임종을 보러 가는 유가족의 앞길도 막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됐다. 그리고 이준석 대표는 이런 항의 방식을 ‘비문명’이라고 비판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같은 시기에 ‘문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태평양 건너편에서 일어난 아카데미 시상식의 해프닝으로 알게 됐다. 윌 스미스가 자신의 파트너에 대해 해서는 안 되는 농담을 한 크리스 록의 뺨을 갈겨버린 사건이다. 파트너를 조롱하는 것을 참지 않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폭력은 안 된다는 비판이 많았다. 윌 스미스는 사과하고 아카데미 회원에서 자진해서 물러났지만 그에 대한 비판과 징계는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폭력은 안 된다”는 이 말에 문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함부로 남에게 손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명의 성숙이란 손대서는 안 되는 ‘남’의 범주가 더 많아지고 넓어지는 과정이었다. 처음에 ‘손대서는 안 되는 남’은 명백하게 재산을 가진 백인 남성만을 의미했다. 여성과 어린아이와 노예는 때려도 상관없었다. 심지어 죽여도 상관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문명’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명이란 명백하게 ‘문명인’만을 대상으로 했고 나머지는 아니었다. 이 백인 남성들만이 문명의 주체이자 주인인 ‘시민’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 범주는 넓어졌다. 어린아이는 자기 자식이더라도 함부로 체벌해서는 안 된다. 훈육이 목적이라도 그것이 ‘아동 학대’라는 인식이 점점 보편화했고 법으로 규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기도 한다. 동물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 역시 ‘동물 학대’로 처벌받는다. 서구에서는 이를 넘어 동물을 요리할 때 어떻게 죽일 것인지, 즉 어떻게 손을 댈 것인지에도 규칙을 정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이 문명이기 때문이다.
대서는 안 되는 ‘손’의 의미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 처음에는 명백하게 육체에 손을 가하는 것만을 의미했다. 폭력은 곧 육체적 폭력이었다. 그러나 점차 언어적 폭력 역시 육체적 폭력 못지않게 타인의 인격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이번 윌 스미스의 폭력이 그저 그의 잘못만 이야기되는 게 아니라 크리스 록의 ‘농담’ 또한 폭력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이 ‘육체’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인격’이라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매체의 발달은 타인의 이미지와 정보 역시 타인이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점차 확산시켰다. 과거라면 그 이미지가 당사자의 인격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사람의 ‘육체’보다 더 그 사람의 인격에 닿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육체에 훼손을 가하는 것만큼이나 타인의 이미지를 함부로 찍고 조작하고 돌려보는 것 역시 심각한 인격 훼손이다.
타인이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는 장애인의 몸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보면 그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도와준다며 함부로 휠체어에 손을 대는 경우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도움’에 놀란 장애인이 불쾌해하면 “도와주는데도 거부하는 삐뚤어진 마음을 가졌으니 장애인이지”라는 말을 그 자리에서 당사자에게 노골적으로 퍼붓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휠체어가 장애인에게는 몸의 일부이며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의 불쾌감을 그 ‘나쁜 혀’로 또 함부로 댔다.
필요와 요구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이런 경우는 많이 없어졌다.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소극적으로 움직이라는 말이 아니다. 도움을 주고 싶을 때 좀더 적극적으로 의사를 묻고 동의를 구한 다음 움직이라는 말이다. 지하철에서 본 가장 멋진 모습은 한 시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각장애인에게 다가가 도움이 필요한지 묻고 난 다음 그에게 자기 팔을 잡고 움직이는 것이 더 편한지 아닌지를 대단히 정중하게 다시 묻는 장면이었다. 그는 어떤 것이 더 좋은지 자기가 잘 몰라서 묻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말의 또 다른 차원이 열린다. 그것은 상대방을 동료 시민으로 대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시민’의 의미다. 장애인이나 다른 소수자를 동료 시민으로 대하라는 말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이 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의미를 훌쩍 넘어선다. 또한 그 소수자 역시 나와 같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도 넘어선다. 동료 시민으로 대하라는 말은 나와 같은 사회의 같은 법적 (권리를 동등하게 가진) 구성원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다.
시민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 내가 개별적 인격체, 즉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오직 시민만이 무엇 무엇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그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보잘것없더라도 그를 자기의 고유한 역사와 경험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의견을 말하는 존재로 여겨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료 시민으로 그를 대한다는 말은 그를 개별적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별적 인격체로 대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의 말을 손쉽게 한 범주의 이야기로 환원하며 그의 필요와 요구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개별적 인격체에 가하는 상당히 모욕적인 인격 훼손이 된다. 예를 들면 말할 때마다 “요즘 세대는” “장애인은 역시” “성소수자라서 그런지” 등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상대방은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저 그에게 특정한 ‘인구 집단’의 의미만이 있고 ‘나’라는 존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는 특정한 인구 집단의 한 샘플로서의 ‘대상’일 뿐 의사와 견해를 가진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건 동료 시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따라서 동료 시민의 의미는 그를 개별적 인격체, 개인으로 대하라는 요구가 된다.
‘소수자’라는 말이 가진 난처함이 여기에 있다. ‘소수자’라는 말 자체가 사실은 그를 ‘범주’화한 말이고 끈질기게 그의 말을 특정 인구 집단으로 ‘환원’하는 말이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의 좋은 점이건 나쁜 점이건 ‘역시’라는 말과 함께 소수자의 특징으로 환원된다. 물론 그가 하는 말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 인구 집단으로서 자기가 정체성을 가진 ‘소수자’ 전체를 위해 하는 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 말 속에 담긴 그의 개별적 인격은 언제나 소수자라는 범주 속에 용해돼버리고 만다. ‘다수자’가 개인으로서 고독할 수 있다면 소수자는 사회적인 개인으로 존재하기 지극히 힘들다는 사실을 직면하면서 고독하다.
이런 점에서 소수자의 반대항에는 ‘다수자’나 ‘기득권’이 있는 게 아니라 ‘개인’이 있다. 그 어디에도 환원되지 않고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하면 다른 어떤 범주의 특성으로 환원되는 게 아니라 그 개인의 말로 기록되고 회자되고 이해되는 사람 말이다. 사실은 이렇게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특권’이며 ‘기득권’임을 소수자가 아니라면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래서 ‘다수자’는 또 한번 자신의 특권을 가지고 그에게 함부로 손댄다. 왜 개인으로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왜 언제나 집단으로 숨어서 이야기하냐고 비판한다. 소수라는 ‘집단’에 숨어 그 집단에 문제가 생겨도 말하지 못하고 피해의식에 절어 감추려고만 하고 모든 비판을 봉쇄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그런 행위가 모든 게 비판을 감당해야 하는 ‘열린 사회’에서는 가장 비문명적이라고 말이다. (사실 그 ‘집단’이야말로 봉합이 불가능할 정도로 균열됐고 서로 ‘웬수지간’이 될 정도로 이견이 심각하며 토론하고 있다.) 그가 사회적 담론의 공간에서 ‘개인’으로 존재하기 지극히 힘들다는 점은 무시해버린다.
당선자와 박경석이 ‘동료 시민’이 되는 모습나는 윤석열 당선자가 한국 사회를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넘어 우리가 서로를 동료 시민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실현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선자가 전장연을 만나러 가서 인구 집단으로서의 장애인이 어떤 현실에 있고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장애인의 ‘대표’ 중 한 명인 박경석 전장연 대표에게 듣는 것을 넘어 장애인 ‘박경석’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를 통해 두 사람이 인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 현 수준에서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개별적 인격체로 존중하는 ‘동료 시민’이 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아마 통치자가 공식적 업무를 시작하기 이전에 한국이 동료 시민들로 이루어진 ‘공화국’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멋진 모습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정말이지 함부로 타인에게 손대지 않는, 진정한 ‘문명’국이 될 것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 발생한 뒤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의 종단을 되새기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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