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가 너무 뻔해 보이는 지방선거였다. 야권은 온갖 악재가 끊이지 않고 여당은 인사 논란에도 집권 초창기 프리미엄을 잘 누리고 있다. 이 와중에 이번 선거에서 가장 용기 있고 의미 있는 정치적 진술은 더불어민주당 비상공동대책위원회 박지현 위원장이 “팬덤정당이 아닌 대중정당을 만들겠다”며 팬덤정치에 대한 문제제기를 전면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지현 위원장의 말은 지금 한국 정치에서 정치적 열정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정치를 망가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정곡을 찌르고 있다. 팬덤정치다. 팬덤정치의 가장 큰 해악은 정치를 ‘불화’와 ‘경합’의 문제가 아니라 ‘내전’ 상황으로 인식하고 실행한다는 점이다. 한상원 충북대 교수가 웹진 <ⓔ시대와 철학>에 카를 슈미트의 개념을 인용한 것을 빌리면 현재의 팬덤정치에는 ‘정당한 적’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부당한 적’만 존재한다.
상대방이 ‘부당한 적’이라면 반대로 이쪽은 ‘정의의 심판자’가 된다. 부당한 적을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하기에 어떤 규범이나 절제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 지켜야 할 ‘선’ 따위는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쟁만 있을 뿐이고 사회는 내전 상태에 돌입한다. 내전의 피해를 고스란히 무고한 사람들이 입는 것은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로 여겨질 뿐이다.
한상원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부당한 적’과 ‘정의의 심판자’ 사이의 내전은 우리 편을 ‘결사옹위’할 것을 요구한다. 적의 정당성을 허물기 위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침소봉대해야 한다. 반면 우리 쪽에서 부정부패이건 성추행이건 아무리 큰 잘못이 나와도 그건 사소하거나 눈감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다. 전쟁의 와중에 우리 편의 문제를 지적하는 건 ‘정의의 심판자’ 이미지를 훼손하는 부당한 적들의 음모에 놀아나는 ‘내부 총질’이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에서 여당, 야당을 떠나 ‘내로남불’이 문제가 되는 이유다.
근대 자유주의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팬덤’은 묘한 위치를 가졌다. 근대 정치는 원리적으로는 종교적 속성이 강한 ‘팬덤’과 상극 관계에 있다. 웬디 브라운이 책 <관용>에서 지적한 것처럼 근대 자유주의 정치는 공동체를 정치에서 추방했다. 서구에선 오랜 기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전쟁을 거치면서 종교라는 절대적 원리가 충돌해 대륙 전체가 황폐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와 종교적 삶을 분리하려 했다. 그 결과 정치의 주체는 공동체가 아닌 ‘개인’이 됐다.
물론 개인도 다양한 정체성과 준거집단에 기반해 정치에 참여한다. 유럽 정당 이름에 ‘기독’이 많이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회와 도덕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공유한 사람들이 정당을 만들고 그 정당을 통해 정치에 참여한다. 얼핏 공동체가 여전히 정치에서 결정적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종교뿐만 아니라 다른 정체성과 가치도 마찬가지다.
이때도 중요한 지점이 하나 있다. 정치에 참여하는 정당 구성원들이 그 정당의 가치에 무조건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가 정치적으로 발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 정치에 기반하지만 말하는 사람 안에서 ‘한 번 더 반성한(reflect)’ 것이어야 한다. 즉, 무엇이든 자기 안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반성할 때만 개인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한 번 더 반성한 의견을 갖고 나와야 정치에서 ‘절대적 원리’가 충돌하는 것을 방지하고 정치가 ‘의견’들이 경합하는 장이 될 수 있다.
반성하는 개인 없는 팬덤의 ‘도덕적 절대주의’내부 단합만큼이나 내부에서의 의견 ‘경합’이 정당의 생명력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적 원리가 정당을 지배하고 그것은 곧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 된다. 이것이 내전을 수행하는 팬덤정치가 위험한 이유다. 스스로를 ‘정의의 심판자’ 위치에 둠으로써 내부에서의 어떤 문제제기나 논의도 모두 적을 이롭게 하는 ‘내부 총질’로 받아들여 배척한다. 여기서 기준은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하고 정의로운가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적을 이롭게 하는가 아니면 타격을 주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적에게 타격을 주는 것이 정의이고 그 반대는 악이 된다.
따라서 정쟁은 과열됐지만 정치는 진전되지 않는 건 내 정당성의 문제를 상대의 허물로 덮어버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정치적 수사가 됐기 때문이다. 당장 인터넷 댓글만 봐도 그렇다. 인사청문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하려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어 임명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그럼 문재인 때는?”이란 말이 바로 나온다. 반대로 더불어민주당의 성추행 사건을 지적하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성상납 사건은?”이라고 대꾸한다. 서로 말할 자격이 없음을 강조해 모든 말을 무력화해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정치가 말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 말의 무력화는 심각하게 정치를 붕괴시킨다.
이렇게 되면 정당은 다른 의견을 활발하게 교환하고 논쟁하는 곳이 아니라 이미 선언된 정의를 ‘수행’만 하는 곳이 된다. 정의의 심판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자신을 이미 한국 사회의 본질적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진리의 담지자’로 여긴다. 다른 사람들은 언론이나 사법기관 등을 장악한 거대한 세력에 의해 선동당하고 놀아나는 허깨비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정치와 관련된 인터넷 댓글에서 ‘선동’과 ‘개돼지’란 말이 가장 많이 나온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다수의 대중은 그저 ‘선동에 놀아나는 개돼지’라는 말이다.(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상투어를 많이 쓴다는 것은 그가 무사유적인 존재’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이 말이야말로 얼마나 무사유적인 표현인지 알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팬덤과 정치가 결합할 때 한 번 더 기만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문화적 현상으로서 팬덤은 개인적인 것과 대립한다. 공동체로서 팬덤을 지배하는 건 ‘국지적 진리’이며 그 국지적 진리에 대한 ‘도덕적 열정’이다. 팬덤에서 중요한 것은 ‘한 번 더 반성한 의견’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가 비밀스럽게 알게 된 ‘국지적 진리’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수행하는 것이다. 팬덤의 핵심에 ‘도덕적 절대주의’가 있다. 여기에는 개인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팬덤정치의 수행자는 자신들이 ‘도덕적 열정’을 가졌다는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결코 자신들이 ‘집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만이 홀로 ‘깨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깨어 있다’는 수사가 어떻게 한국 정치의 한편에선 열정을, 다른 편에선 조롱의 의미로 쓰이는지 살펴보면 정말 흥미롭다.) 어떤 가치나 명령에서도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신들의 의견은 절대 맹목적이지 않고 앞에서 말한 바로 그 ‘한 번 더 반성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팬덤이 지닌 공동체적 정체성은 기묘하게도 팬덤‘정치’에선 행위자들에 의해 부정된다. 이들은 자신이야말로 자유로운 시민이며 팬덤은 그 자유로운 개인들의 도덕적으로 열정적이되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연합이라고 생각한다. 팬덤이 맹목적이라고 말하면 자기들 내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논쟁하며 의견 교환을 하는지 보여준다. 반지성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면 각자의 견해가 얼마나 한 번 더 반성한 것인지 열정적으로 증명한다. 팬덤정치에 대한 어떤 비판도 이들에게는 씨알이 먹히지 않는 이유다.
여기서 팬덤정치의 치명적인 문제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타자에 대한 이미지가 아니라 자기 이미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자를 ‘선동에 놀아나는 개돼지’로 여겨 아예 정치적 토론 대상으로도 여기지 않기에 적대가 경합으로 전환되지 못한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자기 이미지가 자유와 개인이라는 관점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환상적이기에 반성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도 문제다.
팬덤정치는 근대 자유주의 정치가 탈가치화된 자유의 이름으로 공적 공간에서 추방한 ‘도덕’을 적극적으로 끌어오되 그것이 전근대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활성화한다는 판타지를 제공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팬덤정치 수행자가 자신들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는 ‘도덕적으로 열정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다. 그들 자신에게 전혀 퇴행적이지 않고 한 단계 더 진화한 형태의 정치적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반성하지 않고 확신하는 주체만큼 위험하고 위협적인 존재는 없다.
바로 이 점에서 박지현 위원장이 공언한 “팬덤정치에서 대중정치로의 전환”은 절대 녹록한 문제제기가 아니다. 한 정당의 문제가 아니며 정치적 궁핍을 타개하려는 술책도 아니어야 한다. 따라서 박지현 위원장의 문제제기를 민주당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과 정치권, 그리고 학계를 포함해 한국 공론장이 정치적 위기의 핵심 문제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사실 넓게 보면 이 문제는 정치 경계를 넘어 ‘반성하는 주체’가 어떻게 다시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가 될 것이며 사회의 미래는 여기에 달렸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반성하는 주체’는 다시 어떻게 가능한가<한겨레21>이 내준 이 지면(‘사건의 사회학’ 칼럼)을 통해 나는 ‘위’의 정치에 의해 ‘반성하는 주체’들의 ‘사회’가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그리며 반면 아래에서는 어떤 분투가 있는지를 간간이 말했다. 그 분투에 화답하는 정치란 무엇인지도 짧은 소견을 밝힐 수 있었다. 질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내 관심은 아무리 정치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삶을 망친다고 해도 아래로부터 사회는 재건된다는 점이다.
‘사건의 사회학’ 이후에는 내가 있는 교육 현장에서 사회의 재건, 반성하는 주체는 어떻게 끊임없이 탄생하는지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좀더 초점을 맞추려 한다. 그럴 때 ‘한국은 망했다’는 먼저 망했다는 의미에서의 선망국(先亡國)에서 위기를 전 지구적으로 가장 먼저 감지하는 선망국(先望國)이 될 것이다. 그동안 ‘사건의 사회학’을 읽어주신 독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 발생한 뒤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의 종단을 되새기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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