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선거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인구집단은 단연 ‘이대남’이다. 젊으면 ‘진보적’일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다수의 이십 대 남성은 보수정당 후보를 지지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보수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당의 젊은 대표를 지지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압도적으로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해온 광주·전남에서도 이십 대 남성들의 분위기는 이전과 많이 다르다고 한다.
정치, 특히 선거는 오로지 표를 중심으로 계산하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의 달라진 정치적 선택은 당연히 모든 정치세력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정치 지형에 변화를 가져올 정도로 이전과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들 이십 대 남성을 중심으로 선거 전략을 짜고 공약을 내걸 수밖에 없다. 특히 지금처럼 박빙의 선거가 되면 더욱 그렇다. 인구집단에 대한 공약이 쏟아진다.
반면 정치적 행동에 크게 변화가 없는 인구집단에는 집중하지 않는다. 지형의 변화가 없거나 미미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언론이 수면 위로 떠올리기 전에는 미미한지 조차 파악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그나마 몇몇 언론사를 중심으로 이십 대 여성을 다룬 기획 기사가 있고 이들의 미묘한 움직임에서 박빙의 선거 구도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예측하는 정도다.
그러나 선거에는 ‘이후’가 있다. 누군가는 당선된다. 당선되는 사람의 지위와 위상은 완전히 바뀐다. 그는 ‘정치인’이지만 그에 앞서 ‘통치자’가 된다. 통치자가 된다는 건 권력을 획득했다는 의미만 갖는 게 아니다. 인구집단과 맺는 관계가 달라진다. 정치인으로서는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을 결집해 상대방보다 단 한 명이라도 더 많아져 상대적 다수가 되는 게 지상 목표였다면, 통치자는 산술적 다수가 아니라 인구집단 ‘전체’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적어도 ‘공화국’(共和國)이라면 말이다. 정치에서 맨날 ‘통합’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기에 정치인으로서 인구집단을 바라볼 때와 통치자로서 인구집단을 바라볼 때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취해야 한다. 정치인은 지금 당장 표가 되는 사람과 지형에 변화를 가져오는 집단에 집중한다면, 통치자는 지금의 정치에서 ‘셈되지 않는 사람’을 셈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셈되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될 수 없으며 전체가 되지 않는 한 ‘공화’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되려는 정치인은 선거 기간에 자신을 지지하는 인구집단을 결집하기 위한 공약과 함께 반드시 셈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이 어떻게 셈할 것인지에 대한 구상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그가 선거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 ‘이후’의 시간, 즉 ‘통치’에 준비돼 있음을 알게 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람들, 특히 특정 정파가 확고하게 없는 부동층·중도층의 사람들은 후보자가 통치자로서 전망을 제시하는지 살펴본다.
거대 양당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자. 유감스럽게도 ‘셈되지 않는 사람들’ 이야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심지어 탄핵으로 쫓겨난 박근혜 전 대통령도 ‘노인’에게 수당을 2배로 올려준다고 공약했다. 이는 단지 돈을 더 준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그동안 노인이라는 인구집단의 사회적 기여가 공화국에서 셈되지 않았던 것을 셈하겠다는 의미가 함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최소 ‘통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의 업무를 시작했다.
누가 셈되지 않는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중에서 지금 이 ‘세대’와 ‘젠더’의 문제가 당락을 좌우할 정도로 뜨거움에도 완벽하게 비켜 가는 인구집단이 있다. 중년 이후의 여성들이다. 중년/노년 여성이 한국이라는 공화국에서 어떤 노동을 수행하고 그 노동이 어떤 공적 의미를 가지며 나라를 떠받치는지, 그러나 어떻게 완벽하게 셈에서 제외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선거판에서 좀처럼 찾기 힘들다. ‘대변’되지도 않고 ‘대표’되지도 않는다. 통치 대상이 아닌 것처럼 취급된다.
한국 사회는 중년 이후 여성의 노동과 존재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빚진 정도가 아니라 이들이 한국 사회를 지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이들의 존재와 노동을 ‘거의’ 셈하지 않고 그 비용을 절약해 눈으로 보이는 성장을 이뤄냈다. 만약 이들의 희생과 노동을 제대로 셈했다면 그 비용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었을 것이다.(나는 남성이 징집돼 군대에서 수행하는 셈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존재와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셈하는 데 다행히도 ‘필수노동’이라는 적절한 개념이 생겨났다.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노동이란 말이다. 이 노동의 개념은 코로나19가 확산되며 사회가 중단될 위기를 겪으면서 부상했다. 그 이전에는 허드렛일 정도로 취급됐는데 재난 상황에서 이들이 없으면 전체 사회가 정지해버림을 실감했다. 보건의료, 돌봄, 배달, 청소 등의 노동자가 포함된다.
물론 남녀노소 구분 없이 이 노동에 종사하지만 그중에서 돌봄과 청소 영역을 들여다보면 압도적으로 중년 이후 여성이 여기에 속해 있다. 간병부터 요양보호, 아동복지 등 감염병 시대에 사회적 거리 두기가 불가능한 노동, 감염 위험이 매우 큰 노동을 이들이 수행한다. 재난 시대 위험의 ‘최전선’에 있는 노동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어린이들에게 학업과 돌봄을 동시에 제공하는 아동복지센터가 있다. 사회복지사의 관할 아래 몇몇 복지센터를 돌아다니며 아동복지교사들이 어린이들을 돌본다. 센터의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아이들이 잘 먹게 하는 것이다. 센터 교사들이 아무리 지도해도 방역 당국의 ‘지침’이나 ‘바람’과는 달리 아이들은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하고 있지 않다. 교사들은 그 옆에 딱 붙어 앉아 아이들의 학습을 지도한다. 교사는 자신이 아무리 철저하게 마스크를 써도 늘 불안하다고 호소하지만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물론 이렇게 하다 문제가 벌어지면 책임은 센터와 교사들이 져야 한다. 방역 당국의 지침을 어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잘 먹이고 잘 돌보고 잘 가르치려는 것이 문제적 행위가 돼버린다. 여기야말로 책임감이 강할수록 오히려 문제가 될 가능성이 커지는 ‘일선 현장’이다. 제대로 통치가 작동한다면 이들의 노동이 셈해져야 하고 이들의 돌봄이 보호되고 돌봐져야 한다.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노동은 거의 셈되지 않고 있다. 한 예로 한 지방자치단체는 넓은 지역에 아동복지센터가 흩어져 있어 교사 한 명이 일주일에 멀리 떨어진 두 곳을 맡는다. 이렇게 두 곳을 번갈아 가며 주 5일 하루 6시간을 노동하면 한 달에 120만원을 받는다. 그마저도 무기계약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방자치단체는 이들과 2년 단위로 계약한다. 1년 단위이던 것을 고쳤다. ‘필수’노동이지만 동시에 가장 ‘불안정’한 노동이다.
공공노동의 연쇄고리로 엮인굳이 이것을 왜 중년 이후 여성이라는 인구집단의 문제로 인지해야 하는지 물을 수 있다. 저평가받는 필수노동 전체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통치하는 사람은 두 축을 봐야 한다. 하나는 집단으로서 인구를 돌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의 생애주기를 돌보는 것이다.
특정 성별의 나이대가 특정 노동영역에 집중됐다면 그것은 노동영역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인구집단에 속한 시민의 생애주기를 돌보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는 중년 이후 여성의 사회적 삶을 나라가 어떻게 보장하고 보호할 것인가의 문제다.
또한 이 영역의 노동을 보면 중년 이후 여성들끼리 복잡하게 얽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90대 노모를 모시고 사는 60대 여성이 요양보호 일을 하러 갈 때 노모는 데이케어센터에서 돌봄을 제공받는다. 70대 어머니가 요양보호사의 돌봄을 받는 동안 50대 딸은 아동복지센터에서 저소득층/소외계층 아이들을 돌본다. 돌봄 영역에서 이들이 공공노동을 수행하는 형태의 연쇄고리로 엮인 것이다. 계급·계층도 빈곤부터 중산층까지 광범위하다. 그렇기에 이 노동영역은 중년 이후 여성이라는 인구집단을 특정해 살필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이 인구집단의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크게 빚졌으면서 의미 있는 인구집단으로 분류하지도 않는다. 사회 전체가 이들의 노동력을 거의 ‘횡령’하는 수준으로 값싸게 부려먹고 나아가 위험과 책임은 전부 다 전가해버리면서 말이다. 따라서 제대로 셈할 줄 아는 통치자라면 국가가 진 이 빚을 갚고 이들을 보호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어떻게 더 쉽게 갈취할지 궁리할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는 복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공화국의 정체와 관련된 이야기다. 공화국 시민들은 자신의 존재가 제대로 셈해질 때 자기 삶에 자부심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속한 나라가 비록 지금 모든 것을 셈하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조금씩 이전에 셈하지 않던 것을 셈하며 존중하는 것을 보면서 정치체에 희망을 가지게 된다. 삶이 나아지고 내가 사는 나라가 더 넉넉해질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그래야 한자 의미 그대로 ‘공화’(共和)로 나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통치자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일은 그가 공화국 인구집단 중 누구를 셈하고 누구를 셈하지 않는지를 셈하는 것이다. 그들의 셈법에 대해 셈해야 한다. 그 셈법이 지금까지 셈되지 않던 사람들에 대한 덧셈인지 뺄셈인지 말이다. 양당 후보의 정치적 셈법은 잘 알겠다. 그런데 통치자의 셈법이 보이지 않는다. 남은 일주일,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은 유권자는 그들의 통치자로서 셈법을 셈할 것이다. 당락은 거기서 결정될 것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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