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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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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사람이, 보통의 공간에서, 보통의 목소리로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만 일어나야 하는 드라마는 방송을 통해서만 만나기를
등록 2022-05-21 08:43 수정 2022-05-23 02:31
단식 29일차.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곡기를 끊은 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와 미류 책임집행위원이 2022년 5월9일 국회 앞 농성장에서 책을 읽고 있다. 그 단식이 40일이 다 돼가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단식 29일차.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곡기를 끊은 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와 미류 책임집행위원이 2022년 5월9일 국회 앞 농성장에서 책을 읽고 있다. 그 단식이 40일이 다 돼가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그는 단식투쟁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권리를 말하거나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사람이 왜 자기 몸을 다치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단다. 또한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장엄해지는 게 싫다고 했다. 단식투쟁이 가진 종교적 속성이 불가피하게 투쟁하는 사람을 숭고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소박한 권리와 존엄을 지키려는 보통 사람들의 투쟁이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좋지 않으냐는 반문이기도 했다.

자기 몸을 희생해야 거룩해지는

국제인권을 연구하는 동안 경험했던 차이가 그랬다. 유럽인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불편을 야기하는 것은 사회구성원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사회’적 권리를 ‘사회’에 주장하고 ‘사회’가 듣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흐름을 중단하는 것이 ‘사회’적 존재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사생활을 방해하는 건 비난받아야 하지만, 사회적 과정에 영향을 끼치는 건 전혀 문제없다는 말이다. ‘방해’에 대한 그들의 공사 구분법은 철저했고 사회행동에는 당당했다.

반면 한국을 포함해 비서구 국가, 특히 아시아에서는 사회적 목소리를 내기 위해 사회를 방해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방해라고 비난받기 일쑤였다. 그것이 사생활 방해가 아니라 사회적 공간에서 사회적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개개인에게 불편을 끼쳤다고 비난받았다. 그래서인지 유독 단식, 삭발, 나아가 분신까지 극단적으로 자기 몸을 해하는 투쟁이 많았다. ‘희생’으로 정의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런 투쟁은 ‘사회적’이기보다 ‘종교적’이기에 숭고하며 그래야 겨우 사람들이 목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투쟁이 보통 사람들에게 권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것을 보통의 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너무 거룩해지면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투쟁하는 사람이 너무 멀어지기에 그를 ‘존경’하지만 함께하는 것은 부담스러워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자기 몸을 상하지 않고 거룩해지지 않으며 보통의 사람이 보통의 방식으로 보통의 목소리를 내도 그것이 들리는 사회가, 보통의 사람이 사회에 활발히 참여하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좋은 사회다.

그러던 그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진행되는 차별금지법 동조 단식에 참여했다.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그가 팻말을 들고 자신이 그렇게 선호하지 않던 단식에 참여한 것은 어쩔 수 없이 한 것만은 아니었다. 약간 지쳐 보였지만 그의 표정은 평상시보다 더 밝고 생기 있었다. 거기서 그는 단식을 결단하는 자신과 친한 두 명의 활동가뿐만 아니라 동조 단식을 하는 전국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그들과의 만남이 힘이 되고 생기가 되는 듯했다.

그가 올린 사진과 소식, 두 활동가뿐 아니라 동조 단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보내는 소식에는 단식으로 거룩해지는 사람의 모습은 별로 없었다. 대신 만남이 있었다. 서로를 외롭지 않게 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이었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서로를 격려하고 돌보는 사람들이 만났다. 아직 온전히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 ‘슬픈 사람들’의 만남이지만, 동시에 슬픔과 슬픔이 만나면서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시간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기쁨의 순간이기도 했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 기쁨이 된다는 것, 인간에게 가장 극적인 전환이 일어나는 장소가 바로 거기였다.

슬픔의 순간에 선 ‘대체불가능성’

이 만남이 있는 것, 그것이 드라마다. 드라마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 <파친코>의 첫 구절인 “역사가 우리를 망쳐왔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드라마는 역사 혹은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역사 혹은 사회는 늘 뭔가를 우리에게 약속했지만 제대로 이행되는 것이 없다.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것을 약속하고 정직하면 보호해준다고 약속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다. 그렇다고 뭔 상관인가. 사람은 계속 살아가는 존재다.

역사나 사회가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실패함에도 사람은 선택하고 선택에 따라 행동한다. 이런 사람을 드라마는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이 있어야 드라마가 드라마다워진다. 그럼, 사람은 왜 그 선택을 하는가. 만남 때문이다. 만남을 통해 사람은 전환하게 되고, 약속을 이행하거나 전환하기 위해 선택한다. 역사/사회가 계속 우리 삶을 망쳐놓더라도 말이다. 이번 학기에 연극 연출을 하는 학생들에게 ‘드라마’가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지 가르치면서 이 점을 강조했다.

한 학생이 이번 학기에 콜센터 노동자에게 벌어지는 갑질과 그로 인한 사회적 비극을 다룬 연극을 연출하겠다고 했다. 그에게 ‘사회극’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만일 사회극을 하고 싶다면 지금 감정노동자가 얼마나 괴롭힘을 많이 당하고 감정을 착취당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당하는 사람의 ‘고통’에 초점을 두고 비참함을 강조하면 된다. 학생은 사회극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연극에서 어떤 장면에 주목하고 그것을 어떻게 연출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콜센터에서 늘 부실한 성적으로 비판받고 겨우 좋은 성과를 내기 시작했으나 그때 동료 콜센터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경험한 노동자와, 번번이 오디션에 떨어지는 연극배우 지망생이 옥상에서 만나는 장면이다. 그는 그 장면을 외로운 사람들이 만나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갈 힘을 갖게 되는 어떤 것으로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 장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그 학생과 나는 고통과 슬픔의 차이, 슬픔과 슬픔이 만나는 것의 의미를 공부하며 그 순간에 선 존재를 ‘대체불가능성’이라는 말로 개념화했다. 슬픔과 슬픔이 만났을 때 어떻게 서로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는지, 그 순간 존재는 어떻게 빛나는지 이야기했다. 역사 혹은 사회가 망친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래서 존재를 빛나게 하는 것으로서의 드라마에 대해 말이다.

고통과 슬픔의 차이, 슬픔과 슬픔이 만난다는 것

공연날 관객은 그가 연출한 연극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웹툰을 그리는 학생은 공연을 본 뒤, 이것이 단지 콜센터 직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과거에 당한 모욕과, 그 모욕의 결과로 자신이 얼마나 회피하는 삶을 살게 됐는지를 말하며 그때 자신에게 없었던 것, 그리고 지금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말했다. 그 역시 이야기를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지 큰 영감과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드라마를 본 객석과 무대 사이에 새로운 만남이 생겨난 것이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 기쁨이 된다는 것, 만나는 순간이 빛나고 만나는 사람의 존재가 서로에게 별처럼 빛나는 것, 그 드라마가 연극으로 또 탄생한 것이다.

현실에서 드라마는 어떠한가?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는 미류 활동가는 공간을 초월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는 보름달이 뜬 2022년 5월15일 밤에 충남 천안에 있는 사람과 주고받은 말을 페이스북에 전했다. “농성장에서 보름달이 잘 보이네요.” “천안에서 보이는 달도 커요.” “이제 달이 찼군요!” “꽉 찼음!!!” 그의 이야기는 다시 한번 만남이 무엇이고 만남이 어떻게 존재를 빛나게 하는지 보여줬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그곳은 위태롭지만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이야기와 이야기가 만나는 만남의 향연이 펼쳐지는 장소였다.

물론 인간에게 만남은 지옥이기도 하다. 사실 사람은 이런 지옥에서의 만남을 더 많이 경험한다. 다른 사람을 도구로 보고 동원 대상으로 볼 때 존재는 그냥 대체가능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만남에서 사람은 필연적으로 존재감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경험하게 된다. 성과를 내는 동안에만 잠시 자신이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존중받는 느낌이 들지만 한 끗 실패나 실수와 함께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만남은 지옥이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렇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각자의 고통을 강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슬픔을 만나는 것이 되면 그 순간 존재는 빛난다. 드라마처럼 역사/사회가 실패한 곳에서 만남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대체불가능한 시간으로 인식되고 함께 겪은 사람들은 무엇으로도 대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존엄이란 무엇으로도 대체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비록 이 순간과 그 존재는 시간이 감에 따라 퇴색하고 윤색돼버리지만 말이다.

이런 대체불가능성의 공간이 누군가의 삭발과 단식, 몸을 해하는 것을 통해서만 열린다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만남이 왜 꼭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만 일어나야 하는가. 현실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피어나는 고통스러운 꽃이다. 고통은 때로 사람으로 하여금 슬픔을 방해하며 만남을 불가능하게까지 한다. 이런 드라마는 방송을 통해서만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정의롭다.

장엄해지지 않고 보통의 공간으로

게다가 이 만남의 공간이 왜 연극에서처럼 고시원 옥상이나 국회의사당과 같이 ‘몰린’ 곳이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보통의 공간에서 서로의 슬픔을 만나 보통의 목소리로 정의를 요구할 수 있을 때 좋은 사회가 아니겠는가. 보통의 공간에서 목소리를 냈을 때 모욕당하고 차별받기에 그 목소리가 점점 더 일상에서 몰려 옥상으로, 굴뚝으로, 단식농성장으로 가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이 몰린 곳에서만 만남의 공간을 열고,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보통의 장소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현실의 드라마는 다른 드라마여야 한다. 역사/사회가 실패하는 것에서 드라마는 시작되고 주인공들은 빛을 발하지만 현실에서는 역사/사회가 실패하지 않는 것, 제대로 작동함을 보여주는 것이 드라마여야 한다. 사회가 실패하지 않을 때, 드라마는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고, 단식농성을 하는 두 활동가는 장엄해지지 않고, 사람들은 보통의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 드라마를 보여주는 게 정치의 책무일 것이다. 정치권이, 특히 더불어민주당이 자신이 약속한 사람들에게 사회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켜줬으면 좋겠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 발생한 뒤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의 종단을 되새기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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