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인간적 수발? 그런 시대는 끝났다

인간관계에서 일상적으로 위계적 노동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 수발에서 서로를 살피는 돌봄으로 전환돼야
등록 2022-02-23 15:48 수정 2022-02-24 02:10
2021년 2월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부인 김혜경씨가 과잉 의전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2021년 2월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부인 김혜경씨가 과잉 의전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런 대선이 있었는가 싶다. 대선 전체를 지배하는 이야기는 미래의 비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 더 추하고 나쁜가에 대한 이야기만 난무한다. 추문이 전망을 압도한다. 그것도 후보들에 대한 이야기보다 후보들의 배우자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다. 거대 양당만을 보면 한쪽은 무속 논란에 허위 경력, 다른 한쪽은 과잉 의전 논란이 선거를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행이 아니라 수발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김혜경씨의 과잉 의전 논란이 문제’라고 해도 ‘김건희씨의 문제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개그맨 강성범씨가 “소고기 11만원이랑 9만8천원짜리 스킨로션”이 “장모님이 나랏돈 23억을 챙긴 혐의”와 “부인은 주가조작 35억 의혹”보다 더 중한 문제로 이슈화됨에 개탄한 것이 아마도 민주당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무엇이 더 중요한 문제인지 따지는 것은 필요하다. 정치와 가십이 구분되지 않으면서 가십이 정치가 되고 정치가 가십이 되는 것이 정치가 타락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왜 어떤 이슈에 더 자극되는지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언론 등이 여론을 조작하는 것도 있지만 동시에 그 이슈에 사람들의 감정이 촉발되는 것은 당대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 세계에서의 문제가 응축돼 터지는 지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민주당 정권에서 위기가 심화된 것은 부동산과 교육에서의 공정성 문제가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성폭력 사건이었다. 안희정씨에서 시작돼 오거돈씨를 거쳐 박원순씨에 이르기까지 연달아 터진 성폭력 사건은 민주당의 정체성과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 문제에선 보수 진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넘어 ‘더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했다.

민주당에서 터진 성폭력 사건을 관통하는 한 가지 열쇳말에 ‘수발’이 있다. 안희정씨와 박원순씨의 경우 비서직을 수행하는 이들이 피해자다. 그들이 수행해야 하는 직무의 어디에도 기술되지 않은 것을 이들이 수행해야 했다. 속옷을 챙기는 것부터 ‘심기’를 돌보는 것까지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들이 수행하던 노동은 수행이 아니라 수발에 가깝다.

수발이 근대적 의미의 계약적 노동인지를 생각해보자. 특정 조건에선 노동일 수 있다. 노인을 위한 요양보호 노동이 대표적이다. 여러 질병으로 일상적인 생활을 혼자 챙길 수 없는 노인들을 위해 필수적인 요양보호 노동은 노인의 일상을 ‘수발’한다. 청소부터 식사 준비와 세탁, 그리고 말벗이 돼주면서 감정까지 챙기는 일도 많다. 병원의 간병인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런 노동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런 노동에 대해 다른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돌봄’이다. 수발 대신 돌봄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 관계의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수발이라고 하면 신분제적 상하관계의 색채를 강하게 띤다. 한쪽이 다른 쪽의 행위 역량과는 상관없이 아랫사람이기 때문에 윗사람의 소모적인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수발이다. 수발은 그냥 상하관계가 아니라 인격적 종속을 의미한다.

비서로서 수행하는 일이 수발이 될 때 크게 문제가 된다. 근대사회의 가장 큰 규칙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인격적으로 평등하며 누구도 누구를 아랫사람으로 부릴 수 없다는 것이 근대사회의 가장 큰 원칙이다. 누가 누구를 고용해 명령하고 지시하며 일을 수행하게 할 때도 그것은 계약에 따른 직무에 근거해야지 인격적 종속이 되면 안 된다. 노동만 사는 거지 그 사람의 인격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2월13일 공개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무궁화호 열차에서 맞은편 좌석에 구둣발을 올려놓은 모습. 페이스북 갈무리

2월13일 공개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무궁화호 열차에서 맞은편 좌석에 구둣발을 올려놓은 모습. 페이스북 갈무리

자기 규율이 불가능한 경계 없는 요구

수발이 왜 수발을 드는 사람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인지에 대해 상징적인 사례가 로마시대의 노예들이다. 로마시대 철학자들이 산책하며 ‘고독’한 상태가 될 때 실제로는 그 주위에 노예들이 있었다. 노예들이 있는데도 그들은 ‘홀로’ 있었다고 말한다. 정신적으로 고독했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홀로 있었다고 생각했다. 노예는 비인격적 존재로서 그림자처럼 수발을 들었기 때문에 없는 존재가 됐다.

수발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이 성폭력을 비롯해 감정폭력 등에 희생되는 것은 그 일이 ‘그림자 노동’에 속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발이란 말 자체가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을 비인격적 존재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24시간 대기하면서 언제든 자기 ‘기분’에 따라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존재로서 말이다. 여기에는 요구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경계가 없다. 한계가 없으니 당연히 요구하는 쪽이 자신을 스스로 규율할 필요도 없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객차에서 반대편 자리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서 문제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인격적 존재로 보인다면 행동을 삼가는 자기 규율이 작동한다. 그러나 한국처럼 신분제적으로 위계화된 사회에서는 서열의 아래에 있는 사람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규율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 경우 ‘무례’는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가 아니라 지킬 예의 자체가 아예 없다는 말이 된다.

한국은 일상적으로 어느 공간에서나 수발을 요구하는 사회다. 이른바 ‘갑질’의 실체도 수발에 있다. 편의점에서 물건 하나를 사면서도 우리는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내 수발을 들 것을 요구한다. 요구를 거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비자의 말에 대꾸하지 말아야 하고, 술 취해서 헛소리하더라도 웃어넘겨야 한다. 소비자의 심기를 살펴서 물건을 팔아야 한다. 소비자 마음대로 해야 하고 그 뒤처리는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챙겨야 한다.

직무 역시 마찬가지다. 어디를 가나 수발이 직무가 아님에도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직무처럼 돼 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말하지만 대학원의 조교도 교수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 직장에 들어가면 신입사원들이 하는 일 중 하나가 상사 수발을 드는 것이다. 커피를 타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소소한 심부름까지 수발 노동이 여전한 곳이 많다. 회식이니 노래방이니 하는 곳에서 감정 수발을 들어야 하고 말이다. (영업직 사원의 경우 거래처의 수발을 드는 것이 곧 성과와 직결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더욱 심하다.)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살펴야 ‘돌봄’

한국은 수발 노동이 자연스러운 신분제적 위계 구조가 만연한 사회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종속에서 오는 모욕감이다. 누군가의 수발을 드는 것은 곧 그에게 종속된 존재이며 인격적인 굴욕감과 감정 착취를 감내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욕받은 존재가 늘 화나 있고 자신보다 위계가 낮은 사람에게 보복적으로 수발을 요구하는 ‘갑질’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특히 이 수발을 민감하게 여긴다. 문제는 수발을 요구하는 쪽의 생각이 정반대라는 것이다. 수발을 요구하는 쪽은 그것이 상대방의 ‘호의’이며 친밀성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것이 직무와 관련 없는 인간적인 어떤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는 듯하다. 수행하다보면 친밀해지고 친밀성이 싹트고 난 다음 그 관계에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고 수행한 것일 뿐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억울해하기까지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수발이 보여주는 그런 인격적 종속, 위계적 관계를 사람들이 단호히 거부한다. 거부해야 하고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의 근간이 되는 문법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종속은 없고 존중이 있어야 한다. 직무가 있어야 하고 직무에 따른 규율이 있어야 한다. 따르는 사람이나 지시하는 사람이나 말이다. 그래야 서로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고 근대적 의미에서 ‘노동’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그럼 수발은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다. 수발이 폐지된다면 그 자리에는 돌봄이 들어서야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요양보호사가 수행하는 일은 수발이 아니라 돌봄이어야 한다. 단어만 바꾸자는 게 아니다. 수발과 달리 돌봄의 핵심은 서로의 존재를 돌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를 돌보기 위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 그 인격을 존중하기 위해 자기를 규율하고 신중해지는 것이 돌봄이다. 이런 점에서 돌봄은 노동이자 관계의 새로운 문법이자 자기 규율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대선을 지배하는 화두는 공정이나 상식이지만 좀더 긴 안목으로 볼 때 ‘돌봄국가’ 혹은 ‘돌봄사회’로의 전환은 불가피하다.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한편에선 점점 더 외로워질 것이고 관계의 영역을 다시 구축할 새 문법이 필요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아마 이 돌봄을 시장에서 구매하는 형태로 갈 것이다. 반면 구매 역량이 없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방치 상태가 될 것이다. 상호부조를 시장에 모두 맡겨버린 사회는 황폐화된다.

핏줄 중심 돌봄에서 제도적 돌봄으로

돌봄사회의 핵심은 사람들이 서로 돌볼 수 있는 상호부조 시스템을 잘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돌보는 자들을 돌보는 것이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다. ‘구하라법’이 문제가 된 것도 이 지점이다. 돌보지 않던 사람이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로 돌보던 이들이 받아야 할 보호와 혜택을 차지하는 것 말이다. 핏줄 중심의 돌봄에서 실제적인 반려와 주거 중심의 관계를 국가가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보장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양육에서 교육 그리고 각종 복지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실제로 돌보는 사람을 보호하고 돌볼 때 사람들은 안심하며 서로 돌볼 수 있게 된다.

정치인들이, 특히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이 사회문제를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거대 야당은 가십으로 씹기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할 것이고 여당은 별것 아닌 것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라를 이끌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이 사건에서 촉발된 사람들의 감정에서 어떤 시대가 저물고 어떤 시대를 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징표를 읽었으면 좋겠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 발생한 뒤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의 종단을 되새기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