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저 학생들을 저렇게 열심히 하게 하는 걸까요?”
연극과 뮤지컬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기말을 앞두고 프로덕션 공연을 한다고 땀을 흘리고 있다. 한 학기 동안 연출가는 자기가 연출할 작품을 선정하고 연기 전공인 학생들, 그리고 무대설치를 전공하는 학생들과 협업해서 작품을 올린다. 한 학기 내내 공부하고 연습한 것이 총결산된다.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연극은 돈이 되지 않는다. 학생들도 잘 안다. 오래가는 직업이 될 수 없고, 돈을 벌 확률도 희박하다. 허황한 꿈을 가진 친구들이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냉정하다. 자신이 톱스타로 ‘뜰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른 직업들처럼 대박 한 번 치는 것도 그리 가능하지 않다. 냉정하게 말해서 자신의 재능과 위치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도 참 열심이다.
“진짜가 되고 싶어 해요.” 두 명의 동료 교수가 절박하게 대답했다. 학생들도 진짜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연출은 진짜 연출가가, 연기는 진짜 연기자가, 무대미술은 또 진짜로 연극미술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이 지금 하는 것은 진짜가 아니고, 아직 진짜 취급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이라도 진짜가 되고 진짜로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다.
‘진짜’라는 게 뭘까. 동료 교수가 말한다. 이른바 ‘톱 클래스’라는 학교에 가면 학생들도 안단다. 자기가 진짜가 될 것이고 지금 그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말이다. 그 학생들의 주변에 이미 연극을 ‘진짜’로 하는 사람들이 오고 간다. 그 ‘진짜’의 이야기가 또 오고 간다. 그렇기에 거기는 학교이지만 동시에 현장과 연결돼 순환하는 ‘현장’이다. 무엇보다 내가 그 길에 들어섰다는 감각을 들어가면서부터 가질 수 있다. 이미 그 ‘우주’ 안에 있는 것이다.
반면 여기서 한 걸음만 떨어져 있더라도 그 감각은 확 달라진다. 아무리 교수들이 열심히 하고 학생들이 땀을 흘리더라도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그 우주의 ‘변두리’거나 ‘바깥’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하는 것은 현장과 연결된 어떤 것이라기보다 그 우주에 진입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 공간에 머무르다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고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진입하려면 어떤 ‘장벽’을 넘어야 한다. 중심에서의 한 뼘 거리가 안과 밖을 가른다.
물론 이 ‘장벽’은 중심에 있는 학생들에게도 작동한다. 오디션을 봐야 하고 역량을 입증해야 한다. 그냥 ‘연줄’로 스르륵 갈 수 있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장벽’에 대한 감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장벽이 가로막지만 내가 그 현장과 연결됐다는 감각과 반대로 그 장벽 바깥에 있다는 감각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자신을 잠재적으로 진짜라고 여기지만, 후자에게 진짜는 현재에 대한 부정태로 존재한다. 종이 한 장 차이지만 자기 존재의 위상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다르게 분할된다.
이 감각의 차이는 가르치는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과 맺는 관계도 다르게 설정한다. 이미 그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를 지켜보고 피드백을 주더라도 자신의 ‘능동성’을 보호하려 한다. 가르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학생이 아직 ‘진짜’는 아니지만 그는 잠재적으로 진짜인 존재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의 능동성을 존중해야 한다. 학생 역시 자신의 능동성을 보호해야 한다. 그렇기에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사람과의 친밀성보다는 자신의 능동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거리’다.
반면 변두리 혹은 바깥에서 자신의 부정태로서 진짜가 되고 싶은 이들은 대체로 가르치는 이의 칭찬과 인정에 목마르다. 하나를 하고 나더라도 끊임없이 묻는다. “어땠어요?” 물론 이 말이 가짜의 칭찬과 위로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가짜 칭찬은 많이 들었고 그들 스스로 귀신같이 분별한다. 오히려 그런 가짜 칭찬에 더 상처받는다. 신랄하더라도 자기들이 ‘진짜’가 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인정을 바란다. “어땠어요?”
이 질문에 답하기는 매우 어렵다. 난처한 경우가 많다. 그들의 퍼포먼스에서 보이는 한계가 뻔히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연습의 한계이거나 경험의 한계라면 차라리 쉽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선 이게 이른바 ‘재능의 한계’일 때 가장 난처하다. 아무리 보인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재능에 대해 말하는 일도 쉽지 않고, 또 그렇다고 보이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도 기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학생들이 지금 보이는 어떤 한계가 재능의 한계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재능의 한계라고 부르는 것은 한계의 잠재적 부분이 보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대부분은 그 자기 재능의 한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자기 재능의 한계에 도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도달하기도 전에 그 ‘보이는’ 잠재적 한계를 가지고 배우는 이의 의지를 일찌감치 꺾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게 더 낫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진짜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학생들, 이야기를 나눠보면 의외로 자신이 그렇게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과대한 인식을 가진 경우는 많지 않다. 자신에 대해 냉정한 편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낙담하고 우울해하는 일이 많지만 허황된 경우는 많지 않다. 막연히 잘되겠지 하는 그런 생각도 별로 없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진짜가 되고 싶다”의 앞에 다른 말이 하나 더 붙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가 되고 싶어요. 진짜 딱 한 번만이라도.” 이들을 대하는 윤리는 재능이 있다/없다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지금은 실망스럽더라도 나중에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라는 말로 일찌감치 포기하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승승장구 잘나가고 성공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재능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한계에 도달한 뒤 미련 없이 떠나기 위해서라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들이 진짜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진짜로 대하는 마음이다.
‘진짜’가 되고 싶어 하니 뭐가 ‘진짜’인지를 알아야 한다. 진짜 하고 싶다는 그 ‘진짜’가 뭔지를 물어본다. 그러면 다들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남이 시키는 대로 그것만 하는 게 아니라 내 의견을 가지고 ‘참여’하고 싶다는 것이다. 전체 과정에 존재하는 능동적인 존재다. 희곡을 쓰건, 연출을 하건, 혹은 웹툰을 그리건 학생들은 남이 해석한 것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자기가 발견하고 해석한 ‘진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
이들을 진짜로 대하는 것은 잘한다/못한다가 아니라 진짜로 네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계속 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한다면, 불가능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묻는다. 그것이 낭만적 사랑인지 합리적 사랑인지, 아니면 둘이 만나 하나의 무대를 만들고 둘이 그 무대에 서는 사랑인지를 묻는다. 또한 지금의 사랑이 사랑인지 아니면 애완인지를 묻고 애완과 사랑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과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진짜 하고 싶다는 이야기에 대해 누군가 끈질기게 물어본 적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게 내 이야기이다보니 당연히 내가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음을 알게 된다. 잘 안 풀리는 이유가 기술이나 재능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사실은 잘 몰라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나에 대해 무지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 ‘집요한’ 질문들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어야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즉흥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되 도달해야 하는 것은 체계적이고 촘촘한 질문의 그물망, 무엇이 질문이고 무엇이 질문이 아닌지 질문을 분별하는 것으로서의 이론이다. 얼마 전 타계한 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가 말한 것처럼 고통을 넘어서서 자기 안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고 그 상처를 넘어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론이다. 이론을 통해서만 고통에 대해, 질문에 대해 대충 넘어가지 않고 집요해질 수 있다. 이론만이 질문을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거짓 질문에 넘어가지 않고 분별해낼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나는 우주의 안과 밖을 가르는 저 장벽이 기실은 연줄과 기회와 재능의 장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어의 장벽이고 차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앞에서 말한 분할된 감각은 여기서 언어의 분할과 만난다. 장벽의 안쪽에서는 그들이 당연히 이 우주의 일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우주가 어떻게 구성됐는지 그 이치와 원리, 작동 방식에 대한 이론을 가르친다. 반면 장벽의 변두리, 바깥에서 이런 ‘이론의 언어’는 사치로 여겨진다. 살아남기 위한 기술 중심으로 훈련한다.
맞다. 이들에게는 먹고살기 위해서 ‘기술’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가 되고 싶은 저들에게 이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는 대학이 직업 훈련의 공간이 아니라 삶과 세계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통해 어쩌고 하는 말을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짜가 되고 싶다”는 저 학생들의 열망, 그것이 이론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삶이 직면하는 고통과 상관없이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이론이 아니라 집요하게 파고드는 질문의 체계, 촘촘한 그물망으로서의 이론 말이다.
감각과 언어의 분할·지배에 맞선 벨 훅스다행히 학생들은 말한다. “어렵지만, 정말 재밌습니다.” 누가 이들이 이론을 기피하고 겁낸다고 말하는가? 혹시 이들이 이론을 배우는 것을, 질문을 배우고 질문을 분별하게 되는 것을 겁내는 건 아닌가? 이들이 분할된 언어를 넘어 감각의 분할에 맞서는 언어를 획득하는 것 말이다. 감각과 언어의 분할을 통한 지배에 맞섰던 시대의 학자, 벨 훅스의 명복을 빈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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