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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에게 ‘긴다’는 것의 의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탑승 투쟁… 바닥을 기다, 주권을 선포하다
등록 2022-05-11 14:56 수정 2022-05-12 01:14
2022년 5월3일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승강장에서 열차를 타려 나아가고 있다. 한겨레 박지영 기자

2022년 5월3일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승강장에서 열차를 타려 나아가고 있다. 한겨레 박지영 기자

출근 시간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지하철 탑승 투쟁을 벌이던 장애인들이 이번에는 휠체어에서 내려와 바닥을 기어 지하철을 탔다.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심정적으로 함께하던 사람들은 언론에 실린 사진을 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반대하던 사람들에게는 짜증과 분노의 감정이 유발됐겠지만 말이다.

‘토포스’에 대한 권리 선언

한편으로는 참담함이 밀려왔다. 흔히 인간을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걷다’를 대표적 차이로 말한다. 인간의 몸은 다리를 통해 땅에서 떨어져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의 몸으로 여겨진다. 몸이 땅에 붙어 움직이는 것은 ‘몸부림’으로 여겨진다. 삼보일배가 일어섰다 꿇었다가 걷는 것을 반복하며 자신을 땅에 낮추는 숭고함을 보여주는 것과는 정반대다. 여기는 일어나고 걷는 과정이 없다. 오로지 바닥에만 붙어 움직일 때는 인간의 표지가 없다. ‘존엄’을 알리는 표지가 하나도 없다. 인간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모습으로 비친다.

참담함은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이 처절함을 극대화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동료 시민이 존엄을 위해 저렇게 할 때까지 무엇을 했느냐는 반성에서 나오는 참담함이다. 지지하고 심정적으로 함께한다고 ‘동료’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동료’가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이다. 걷거나 앉아서 그들의 기는 모습을 보는 나와 그들이 어떻게 같은 ‘동료’일 수 있겠는가. 내 몸이 바닥에 내려지지 않는 것을 깨달으며 ‘동료’라는 말이 하기 좋은 말이었음을 순식간에 알게 되어 느끼는 비참함이다.

그러나 동시에 지하철 바닥을 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삼보일배와는 또 다른 강인함을 느낀다.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허구적인 ‘인간’ 존엄의 실체를 보여주는 모습에서 느끼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땅을 긴다’에는 ‘소수자’의 현 상태에 대한 처절함의 강조나 투쟁하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숭고함과는 분리된 다른 차원이 있다. “나는 이 땅/장소(토포스·Topos)에 속한 사람이요!” 토포스에 대한 권리의 선언, 즉 주권자로서의 선포다.

장애인은 토포스가 없는 존재였다. 코로나19 대유행은 장애인에게 토포스가 없음을 시작부터 극명하게 알려줬다. 대구에서 코로나19가 대유행했을 때 대구의 장애인들은 문자 그대로 ‘갇혔다’. 나가지도 못했고 누구의 활동 보조도 받을 수 없었다. 전국의 개인과 단체가 대구 장애인들과 함께하기 위해 손세정제와 마스크 등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그 요청을 받은 사람들은 또 주변 연락망을 통해 긴급한 요청을 보냈다. 그때의 위기는 그렇게 겨우 넘어갔지만 시설에 갇힌 장애인들은 이후 반복적으로 ‘유폐’되거나 ‘방출’됐다.

집만 있고 움직일 수 없다면

토포스가 없는 삶을 ‘원통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학계 노벨상으로 부르는 제1회 기어츠상을 받은 권헌익의 책 <학살, 그 이후>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원통한 죽음’이라고 하는 죽음이 나온다.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집에서 친척에게 둘러싸여 죽지 못하면 그것은 원통한 죽음이다. 원통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할 계보인 ‘조상’이 되지 못한 채 망령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이 망령들을 가리켜 권헌익은 자유도 소속도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즉, 그는 죽어서 ‘조상’이란 계보에 소속돼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동시에 그는 구천을 떠돌아다닐 뿐 자기가 죽은 장소와 고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망령에게는 거주할 집도, 이동할 자유도 없다. 그에겐 토포스가 없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장소라는 뜻의 토포스는 집과 이동 양쪽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집 있는 사람만이 이동할 수 있다. 집 없이 움직이는 건 망령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 집만 있고 움직일 수 없다면 그것은 집이 아니다. 감옥이다. 그것은 소속이 아니라 감금이다. 떠돌이란 이동에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 머물 곳이 없고 벗어날 곳이 없는 길에 갇힌 존재다. 토포스의 한국말 번역에 딱 들어맞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령이 망령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한국말로는 해원에 해당하는 것을 베트남 사람들은 ‘옥을 부수고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하철 바닥을 ‘긴’ 장애인들의 투쟁은 ‘이동’권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주거와 이동 모두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며 이‘곳’이 자신의 집이며 동시에 이동할 수 있는 땅이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주거와 이동 모두를 아우르는 ‘곳’일 때 비로소 그 존재에게 토포스가 된다. 어느 하나만 있으면 감옥이거나 헤매는 것일 수밖에 없다.

‘왜 바쁜 출근 시간에 꼭 이래야 하냐’는 말을 생각해보자. 이 말은 현대인의 바쁜 일상, 그 일상의 계보에서 장애인을 삭제한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계보에 장애인이 속했는가? 그 시간을 피해 이동하면 되지 않냐는 말은 ‘바쁜 현대인의 일상’이라는 계보에서 그들을 지우고 나머지 ‘한가한’ 시간에만 지하철에서 떠돌아다니라는 말이다. 이는 이동도 자유도 아니다. 이는 장애인에게 망령으로만 존재하라는 말과 다름없다. 정해진 시각, 정해진 장소에만 ‘출몰’하고 떠돌아다니는 것만 용인되지 거기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특정 장소를 가진 주권적 개인

이 망령들이 망령으로 남아 있지 않고 토포스를 기어다니며 여기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내 토포스임을 선언하고 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 존재로서 이곳은 내 활동 공간이 된다. 흥미롭게도 권헌익은 <학살, 그 이후>에서 베트남인에게 집을 가진다는 건 주권자가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주권을 가진 이는 소속이 있되 자유롭다.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라는 ‘사회적 통일체’에 속해 있되 그 무리를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내 ‘이름’을 갖고 참여할 수 있어 주권자는 자유롭다. 그래서 주권이란 소속과 자유 모두를 필요로 한다. 하나만 없어도 그것은 주권자가 아니라 망령에 불과하다.

나아가 주권자가 된다는 것은 주권을 가진 ‘존재’가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권헌익은 <학살, 그 이후>에서 주권자를 ‘특정한 장소를 가진 주권적 개인’이라고 말한다. 뭉뚱그려 ‘존재’라 하지 않고 분명하게 ‘개인’이라고 말한다. 즉, 주권자는 개인이다. 개별화돼야 주권자다. 특정 장소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특정 장소를 가진 ‘주권적 개인’이 돼야 비로소 주권자라고 할 수 있다.

특정 시간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이동은 이런 점에서 개인이 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주권자의 조건이 된다. 토포스에서의 이동 투쟁은 시간의 자유를 향한 투쟁이다. 우리에게 ‘시간 주권’을 돌려달라! 이거야말로 이동권 보장 투쟁이 왜 출근 시간에 일어났는지를 설명한다. 그 시간에 자유로운 다른 사람들을 훼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 시간에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권 선포인 것이다.

특정 시간에서 배제된 시간에 묶이는 한 그는 그 시간에 갇힌 존재라는 무리의 이름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다. 그는 사회적으로 그 무리에 소속된 자로서만 존재하며 이름 붙여진다. 토포스 안에서 자기만의 개별 동선을 가질 자유가 없다. 개별화되지 못한 채 특정한 존재, ‘장애인’만이 될 뿐이다. 역으로 특정 시간에서 배제된다면 그것은 토포스가 아니다.

시간 주권은 국가뿐만 아니라 근대인이 되기 위해 개인에게도 핵심적인 주권이다. 근대적 개인은 그저 숨 쉬고 가만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의미에서 개인은 자기 삶을 계획하고 기획하고 실현해야 한다. 개인이란 ‘생애사적 기획’의 주체를 말한다. 그는 자기 삶 전체를 운명에 맡겨진 대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기획하고 만들어야 한다. 결국 개인이란 ‘생애’라는 시간의 주권자를 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시간 주권이 없는 한 그는 자신이 속한 정치체인 나라의 주권자도 될 수 없고 자기 생애의 주권자인 개인도 될 수 없다.

예외의 선포가 아닌 예외 종식의 선포

장애인은 출근 시간에서 ‘예외’로 분류되고 배제된 존재다. 예외를 선포하는 것이 주권이라면, 장애인을 주권의 예외로 선포하는 것으로 작동하던 힘이 있다. 이번에는 거꾸로 장애인이 자신을 배제한 그 ‘예외’를 종식하는 힘으로 한국 사회의 전면에 등장했다. 예외의 선포가 아닌 예외 종식의 선포. 이거야말로 주권에서 배제된 존재가 주권을 선포하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 이들은 나타나서는 안 되는 그 예외의 시간에 출현할 수밖에 없었고 나타나서는 안 되는 인간의 예외적인 모습, 즉 ‘기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단지 처절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 모습으로만 주권자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는 한 망령이 나타났다. 그 망령은 공중을 떠돌지 않고 땅 위를 기고 있다. 망령에게 허락된 시간, 어스름한 개와 늑대의 시간인 새벽이나 저녁이 아니라 모두가 모두를 분별할 수 있는 또렷한 아침에 나타나 땅 위를 기며 주권을 선포한다. 여기가 나의 토포스라고. 지금이 나의 시간이라고.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 발생한 뒤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의 종단을 되새기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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