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박빙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1%가 안 되는 표차로 당락이 갈렸다. 이 1%의 의미를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질 것이다. 아마 정반대 해석도 난무할 것이다. 또한 이 의미를 두고 당선자가 어떤 태도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나뉜 의견이 나올 것이다. 역설적으로 저 1%가 말해주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가 완전히 두 진영으로 갈려 있음을 방증한다.
잠시 돌아가보자. 이번 선거 기간 한국 사회의 ‘불길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몇 가지 그림이 있다. 첫 번째는 강원도와 경북에서 일어난 엄청난 규모의 산불이다. 울진의 산불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발생한 강릉은 방화였다. 방화범은 이웃이 자기를 무시해서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선거와는 전혀 상관없지만 그가 말한 ‘무시’는 지금 한국 사회가 어떤 위험한 상태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두 번째는 전직 국가정보원 직원들의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있고 그걸 공공연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은 다르다. 그들이 수행하는 업무의 특징은 그들의 ‘얼굴’이 밖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정치적 ‘중립’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핵심적 ‘안보’를 다루는 사람들의 ‘직업윤리’와 관련된 문제다.
이 두 사건이 상징적인 이유는 사람의 행동에 제동이 걸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방화범과 같은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화난다고 호떡을 기름에 던져 상인이 다치거나 마스크를 쓰라고 했다고 운전기사를 습격하는 등 이미 한국 사회에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거기에 어떤 제동도 걸지 않고 있다.
국정원 직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정치적 신념이 어떠하건, 나라의 안보 상황에 대한 ‘우국충정’이 어떠하건, 직업윤리는 사람의 행동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아무리 그게 문제가 없거나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다 해도, 심지어 옳은 일이라 해도 멈칫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국충정이라는 이름으로 ‘오죽하면’ 나서겠냐는 말로 그들의 집단행동이 정당화된다.
이 두 가지 일은 한국 사회가 망가졌다는 상징이다. 사람은 평소 살아갈 때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저 다들 개인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의지와 생각대로 행동하고 말한다. 그러다 사회가 존재함을 느낄 때가 있다. 좋은 경우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경제적 이유로 곤경에 처했을 때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에 따르면 개인적 불행을 겪는 이가 몰락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장치가 작동할 때 사람은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여러 복지제도를 ‘사회’적 안전망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사실 이런 경우보다 사회의 존재를 흔히 느끼게 되는 것은 ‘억압’을 통해서다. 평소엔 별다른 제동을 느끼지 못하다가 어떤 말이나 행동이 ‘선’을 넘을 때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사회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 선을 넘는 순간 강한 압력으로 물러서게 된다. 자기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는 강력한 억압 장치다.
한국이 오랫동안 좋은 보호망으로서의 사회가 부재하고 부실했다는 것은 넘어가자. 반면 한국은 전자의 억압 장치로서 사회가 매우 발달한 곳이다. 심지어 시위하면서도 길거리에 쓰레기 하나 버리지 않는 ‘희한한’ 사회였다. “○○일보가 보고 있어요”라며 시위 현장에서 공중도덕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면 동료 시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시민은 휴지통을 찾지 못하면 손에 쓰레기를 들고 오랫동안 헤매면서도 쉽게 길거리에 버리지 못했다. 사람들의 높은 시민의식이라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회가 그만큼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무장해제해도 살 수 있다’는 믿음그런데 안전망으로서의 사회가 부실한 가운데 후자로서의 사회도 무너져가고 있다. 이웃 주민이 무시한다며 방화한 것과 국정원 직원들의 집단 선언이 불길하게 느껴진 것이 바로 이 이유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양상 또한 심각해지고 있다. 많은 이가 ‘나만 왜?’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다수의 사람은 불안해하며 사회의 존재를 불신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며 각자도생을 강화한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개인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무장해제하고 살더라도 별일이 안 벌어짐을 믿게 하는 것이다. 이 믿음을 정치가 주지 못할 때 비극이 일어난다. 대표적인 것이 선거 기간 경북 포항에서 일어난, 손님이 택시에서 뛰어내려 숨진 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다수 사람은 그 정도로 안전하지 못하다는 불안감을 느끼면 패닉에 빠지고 모두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동료 시민이 위협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 항의할 때조차 말과 행동에는 형식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 형식을 갖추지 않으면 발언권과 행동에 권리가 없다는 것. 이것이 ‘억압 장치’로서의 사회가 하는 역할이다. 한 사회에 속한다는 것은 그런 ‘형식’을 배우고 따르는 일이다. 물론 이 형식은 그 정당성을 끊임없이 의심받으며 계속 수정돼야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가 붕괴한다는 것은 말과 행동의 ‘형식’이 붕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의라는 이름으로도 결코 정당화할 수 없을 만큼 형식이 파괴되고 붕괴한다. 형식의 정당성에 도전하는 항의들도 항의의 ‘형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적 항의는 그냥 분출되는 경우는 없다. 항의는 무질서해 보이는 그 순간조차 질서를 따른다. 반면 사회 붕괴란 일체의 형식을 갖춰야 한다는 의식 자체의 붕괴를 말한다. 걸러지는 것 없이 그저 분출된다.
말과 형식의 붕괴. 이번 선거가 어느 쪽이 당선되는지와 상관없이 불온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뜩이나 뜨거운 열기에 취해 극단적인 언설과 행동이 난무하기 쉬운 것이 선거와 같은 정치 페스티벌이다. 그렇기에 정치인은 득표라는 단기적 이익에 맞춰 극렬 지지자들의 형식 파괴에 취하거나 그것을 부추기기보다는 통제하고 제지해야 한다. 선거 같은 정치 과정에서부터 말과 행동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해야지만 발언권이 생기는 것을 정치인과 열렬 지지자들부터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 이후 사회를 구축하자는 정치의 말에 힘이 실릴 수 있다.
실망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후보자들부터 자신의 말과 행동에 형식을 부여하기는커녕 파괴를 통해 주목받으려 했다. 그 파괴에는 어떤 형식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파괴가 아니라 붕괴에 가까웠다. 지지자들의 형식 파괴를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기고 부추겼다. 한 현장에서는 흥분한 지지자들의 “○○○이는 죽여도 돼!”라는 고함이 내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 말에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라고 하는 것, 그것이 사회를 통해 통치하려는 선거에 나온 정치인의 임무인데도 그 현장에서는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 현장을 지나던 지인은 너무 섬찟하고 무서웠다고 말했다.
아무렇게나 말하더라도 사회적 발언권이 생기는 것. 오히려 더 주목받고 권력까지 생기는 것. 이것은 사회의 구성원에게 매우 나쁜 신호를 보낸다. 동료 시민을 공격하고 사회를 파괴해도 된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이 발언이고 정치이고 권력이고 돈이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미 정치에 정치의 형식이 작동하는 게 아니라 주목 경제의 논리와 형식이 지배하는 것이다. 정치의 자율성은 무너지고 주목 경제의 식민지가 됐다.
이것이 어떤 파괴적 결과를 가져오는지 여실히 보여준 것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임기 마지막에 터진 의회당 습격 사건이다. 미국인들에게 이것은 그냥 폭력 사태가 아니었다. 그저 광기 어린 열렬 지지자들의 난동이 아니었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정치를 넘어 사회적 삶 자체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것은 정치 형식을 파괴한 트럼프식 정치의 당연한 결과였다.
선거는 끝났다. 그리고 이 선거 기간 형식 파괴의 뒷감당을 해야 할 때다. 통치자로서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사회 붕괴에 ‘공안’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개인은 각자도생을 위해 무장할수록 부족함을 느끼며 끝내 치안 강화를 바란다. 강력한 감시와 처벌을 요구한다. 이게 통치자가 정치 실수를 은폐하며 택할 수 있는 손쉬운 길이다. 물론 이 길의 끝은 동료 시민 간 더 큰 불신과 불안, 그리고 공안적 경찰국가의 탄생이 될 것이다.
좁지만 다른 길이 있다. 다시 시민들이 삶에 사회적 형식이 부과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통치자 스스로의 말과 행동에, 통치자 최측근의 말과 행동에, 그리고 통치자의 열렬 지지자들의 말과 행동에 형식을 요구하며 그것을 벗어날 경우 발언권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아래로부터의 직접민주주의니 시민 행동이니 하며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를 위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주목 경제와 결합한 팬덤 정치다.
정치를 타락시킨 주범이 된 팬덤 정치한국 사회의 밀실화된 정치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준 팬덤 정치는 그 시대적 소명을 끝냈다. 지금 팬덤 정치는 그 자체로 주목 경제이며 정치를 주목 경제의 논리로 타락시키는 주범이 됐다. 자극적이어야 주목받을 수 있고 자극적이려면 더 과격하게 형식을 파괴하며 보는 이에게 쾌감을 줘야 한다. 이 때문에 팬덤 정치는 자신들이 숭배한다는 ‘우상’을 사실은 ‘검투사’로 콜로세움에 세운다. 정치적 삶의 형식을 파괴하며 이를 눈치챈 사람들은 정치로부터 도망가게 만든다.
다행히 이번 선거의 마지막에 한국 시민은 다시 뭉쳤다. 누가 보기에는 양쪽으로 똘똘 뭉친 진영 선거지만 그 이면에는 역대급 비호감 선거에서 난무하는 혐오와 과격 발언에 질려 정치로부터 탈주하던 ‘중도층’ 시민이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발길을 투표소로 돌렸다. 예상과 달리 투표율이 낮지 않았던 한 요인이다.
당선자는 발길을 돌려 투표소로 향한 이들, 정치의 파괴에 강력한 경고를 주고 저지하려던 시민들을 귀하게 여기고 이들에 근거해야 한다. 이제부터 통치이기 때문이다. 통치는 열렬한 지지자들에게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그게 사실은 통치자 자신을 콜로세움에서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사회는 통치자에게도, 시민들에게도 누군가의 ‘돈벌이’를 위한 콜로세움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 발생한 뒤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의 종단을 되새기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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