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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그런데”를 묻지 않나

연세대 학습권 침해 소송을 대할 때 필요한 것, 다른 목소리의 존재 여부 확인하고 그 목소리를 들으려는 마음
등록 2022-07-10 16:33 수정 2022-07-11 01:26
‘연세대 사건’에서 청소노동자와 연대하고 지지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한참 지난 뒤에나 보도됐다. 하지만 연세대에서 학생들의 청소노동자 연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18년 연세대 청소노동자들은 구조조정 철회를 요구하며 무기한 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연세대 사건’에서 청소노동자와 연대하고 지지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한참 지난 뒤에나 보도됐다. 하지만 연세대에서 학생들의 청소노동자 연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18년 연세대 청소노동자들은 구조조정 철회를 요구하며 무기한 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최근 가장 뜨거웠던 이슈는 단연 연세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재학생 3명이 학습권 침해를 이유로 소송을 제기한 일이었다. 노동자와 학생이라는 ‘을’과 ‘을’의 갈등, MZ세대의 개인주의적 성향, 이미 ‘기득권’화된 노동조합에 대한 대중의 반감, 여기에 시위 소음에 따른 생활 침해와 고통 등 사건의 모든 요소가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확 끌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대남’이 생생하게 튀어나온 사건?

특히 진보 성향 사람들 다수에게 이 사건은 보수화됐다고 생각하는 20대, 특히 20대 남자들에 대한 인상을 확증하는 데 손색없었다. 고소인 중 공개적으로 발언한 학생은 ‘이대남’이었고 한 언론 인터뷰에서 고소인들과 동일한 입장을 취한 학생들은 ‘공교롭게도’ 남학생이었다. 역시 공교롭게도 청소노동자에게 ‘연대’하는 발언을 한 인터뷰이는 여성이었다.

진보층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던 20대(대학생), 그중에서 이른바 ‘명문’ 대학생, 그중 특히 이대남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로 튀어나온 사건이었다. 이들에겐 지난 몇 년간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갑론을박을 벌이던 그 존재의 ‘실재’를 확증하는 사건이었다. 당연히 이 사건은 그냥 한 대학교에서 아주 적은 수인 3명의 학생 이야기가 아니라 세대(20대)와 성별(남자), 계층(중상층)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즉각 인식됐다.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혐오의 감정과 믿음이 어떻게 보편적으로 구조화되고 확산하는지 그 담론적 과정을 잘 보여준다. 지금 개탄하는 사람들이 한 세대 전에 이 사건이 벌어졌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비교해보면 현재 반응의 특징을 알 수 있다. 물론 과거에도 ‘요즘 20대들의 이기주의’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랐을 것이다. 세대와 명문대, 젠더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선정적 주제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 개탄‘만’ 하는 사람들이 이전 시대라면 자기들의 반응에서 다른 질문 하나가 개탄 이후 바로 붙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학생들만 있는 건 아닐걸? 다른 학생들 반응은 어때?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학생들은 없어?”

이 꼬리표, ‘그런데’로 이어지는 ‘다른 학생들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는지 아닌지가 결정적 차이를 만든다. ‘혐오’가 이미 확증적으로 구조화됐는지, 나아가 혐오가 확산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지가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담론적 과정이다. 이 꼬리표가 붙지 않는다면, 혐오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구조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확정됐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건 하나가 발생함과 동시에 이처럼 확증된 혐오는 삽시간에 그 마음을 공유하는 모든 이에게 퍼진다.

혐오는 개인적 감정으로 보이지만 명확하게 사회적 정동이다. 혐오는 구체적 개별자나 구체적 행동을 향해 폭발적으로 터지지만 동시에 명확한 사회적 범주를 따라 움직인다. 범주화되지 않는 혐오란 존재하지 않는다. 혐오는 범주를 가리지 않는 행위(예를 들어 소음이나 고소와 같이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위협하는 행위)로 촉발되지만 타깃으로 삼는 것은 사회적 범주, 즉 존재다. 20대, 여성, 노인,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처럼 말이다.

“그건 모르겠고 이건 내 권리”

따라서 혐오가 구조화되면 아무런 저항 없이 즉각 범주화가 작동해 그 범주에 속하는 모든 존재의 공통된,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특징으로 인식된다. 연세대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진보적인 사람들은 이것을 반사적으로 20대 혹은 이대남의 특징으로 인지하고 순식간에 그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의 감정을 유감없이 표출한다. “쟤들은 안 돼, 큰일이야”라고. 물론 보수적 사람의 일부는 노동조합에 똑같은 반응을 보일 테고 말이다.

여기에는 지목된 사회 범주의 행동적 특징이 어느 정도 반영되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이전 세대와 비교해 현재 젊은 세대가 자기를 방어하고 합리화하는 언어를 더 잘 구사하는 것은 동시대 사람들의 경험적 사실에 부합한다.(물론 이것도 세대의 특징이라기보다는 동시대 말하기의 지배적인 양상으로 봐야 한다.) 특히 권리의 문제에서 이전 세대가 대충 넘어갔다면,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이 잘못한 것과는 상관없이 침해받는 자기의 권리에 대해 똑 부러지게 말한다.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라며 분리해 인식하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이전 세대와는 다른 태도다. 자기가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자기 권리가 침해되더라도 “내 잘못도 있으니까”라고 넘어가던 것과는 아주 양상이 다르다.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라며 사안을 분별하는 역량이 현실에서는 “그건 모르겠고 이건 내 권리”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내 잘못도 있지만 이건 부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잘못을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는 말하기가 되기에 십상이다. ‘그건 모르겠고’가 붙으며 사건의 사회적 맥락이나 과정,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권력과 위치의 차이와 그에 따른 권리의 불균형 등 종합적인 부분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자기 권리만을 강조하는 경우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대화는 일반적으로 협상해 ‘타협’을 모색한다. 따라서 ‘확정적으로 존재하는 내 권리’가 아니라 ‘그건 모르겠고’라며 뭉개버리는 바로 그 지점을 알려고 할 때 대화가 필요해진다. 대화는 양쪽이 서로의 위치를 파악해 불균형한 자기 권리를 조정하기 위해 필요하지 한쪽의 권리를 관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모르겠고 더 나아가 알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 대화는 알려 할 때 비로소 시작됨을 망각하는 것이 동시대의 특징이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자기 권리만을 주장하는 ‘대(大)권리의 시대’가 열리며 대화는 무의미해지고 사회는 불가능해진다. 진보적 사람들이 이 사건을 보며 개탄한 근원에는 이런 불길함이 있을 것이다. ‘사회가 불가능해졌다’는 불길함 말이다.

그러나 이 불길함을 현실화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불길함이 특정 범주를 따라 사회적 사실로 확증된다는 것 자체에 있다. 앞에서 말한 ‘꼬리표’가 개탄의 한숨 이후 바로 작동해야 하는데 그게 작동하지 않는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회적 사실로 믿기 때문이다. 이번 연세대 사건에서도 청소노동자와 연대하고 지지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한참 지난 뒤에나 보도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그들이 그 사건 이후에 대응하기 위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닐 텐데도 말이다.(연세대에서 학생들의 청소노동자 연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존재보다는 ‘존재의 구원 불가능성’이 혐오 근원

아무리 개탄스러운 일이 벌어져도 다른 목소리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그 목소리를 들으려는 마음, 사실은 그것이 ‘연대’의 마음이다. 역설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연대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 채 연대가 죽었다고 확증하고 개탄할 때 연대를 부재하고 불가능한 것이 되게 한다. 대(大)권리의 시대를 본격화하고 가속하는 것은 이 둘이 만났을 때다. “그건 모르겠고 이건 내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 목소리 말고 다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만났을 때 말이다.

이렇게 보면 최근 사람들의 마음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의 행태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려고 하기보다는 반대로 ‘구원 불가능성’에 유독 집중하고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작건 크건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보이는 가능성에 집중하는 것은 ‘정신승리’나 위선적인 일처럼 보이고, 구원 불가능해 보이는 지점을 보는 것은 냉철하고 객관적인 판단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니 개탄하는 가운데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이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마치 인간의 구원 불가능성을 확인해야지만 안심하고 편안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다른 혐오와 달리 인간에 대한 혐오가 무엇에 바탕을 두었는지 잘 보여준다. 인간 혐오는 현상태 혐오를 넘어선다. 다른 혐오와 달리 인간 혐오의 바탕에는 그게 어떤 범주이든 간에 인간이란 존재가 과연 구원 가능한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 깔려 있다. 즉, 존재보다는 존재의 (구원) 불가능성이 혐오의 근원이다.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로 규정되고 그럴 때만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쟤들은 안 돼”라는 말이 대표적으로 그 불가능성에 대한 말이다. 우리는 점점 특정 범주를 넘어 인간 전체의 구원 가능성을 회의하고 부정하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이 구원 불가능성에 대한 징표로 여긴다.

<사랑에 관하여>의 저자인 프랑스 철학자 뤼크 페리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역사란 이 인간의 구원 가능성 패러다임이 변화해온 역사다. 우주론적 구원에서 신학적 구원으로, 그것은 다시 인본주의적 구원을 거쳐 해체의 시대로, 그리고 사랑을 통해 존재의 구원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라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이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인간은 왜 구원받아야 하고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거의 상실이다. 모든 존재에 대해 확증적으로 터져나오는 혐오는 인간의 구원 가능성의 근거를 좀처럼 마련하지 못하는 현재 상태의 그림자일 것이다.

구원은 얼마 안 되는 그들로 인해 존재하는 것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쟤들은 안 돼”라며 차고 넘쳐나는 구원 불가능성의 증거를 하나 더 보태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이라고 물으며 이미 존재했고, 지금 말하고 있으며, 앞으로 존재해야 하는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듣는 일이다. 인간의 구원 가능성은 ‘다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지 않고 구원받았을 다섯 명으로 상징되는 ‘얼마 안 되는 그들’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정신승리라고 비웃음을 당해도 말이다. 그런데 인간 역사에서 구원은 항상 시대의 불가능함을 거슬러 정신승리한 사람들에 의해 오지 않았던가?

새롭게 시작하는 이 연재를 통해 나는 인간의 구원 가능성에 부정하고 낙담하는 이 시대에 웹툰과 연극, 그리고 만화와 뮤지컬을 창작하는 학생들과 어떻게 인간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지 그 도전과 좌절, 실패와 기쁨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며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아가는지 조망해보려 한다. 흥미롭게 들어주시기를 바란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질문을 같이 고민해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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